우리는 마음속에 많은 이야기를 담고 산다. 발화되지 못한 이야기까지. 어쩌면 ‘나(자아)’라는 것은 이야기의 집합체일지 모른다. 진짜 중요한 것은 말하지 못한 그 이야기일지 모른다. 누군가가 자신의 진짜 깊고, 비밀한 속마음을 살짝 비쳐 줄 때 나는 그 시공간에 ‘함께’ 있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음악으로 표현될 수 있도록 코치의 자리에서 돕고 있다. 2013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꼬마작곡가’를 시작으로, 지금은 복지기관 어르신들과 함께하고 있다. 삶에 의미 있는 경험, 그리고 개인의 일상과 삶을 표현하고 풀어내는 문화예술교육을 지향하는 복지기관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2022년 천안시노인종합복지관 어르신들과 함께했던 ‘2022 온라인 두근두근 청춘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호두과자, 병천순대, 그리고 소머리국밥
천안 어르신들과의 첫 수업은 코로나19 방역 지침으로 인해 실시간 비대면 수업으로 만나게 되었다. 새롭게 참여한 분들을 위한 기초반과 전년도부터 참여하신 분들로 구성된 중급반, 두 반으로 나뉘었다. 첫 시간에는 어르신들과 천안 지역 이야기를 나누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노래 <고향의 봄>을 개사했다. 천안의 유명한 것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대부분 <고향의 봄> 노랫말에 기반하여 아름다운 자연이나 지역 명소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기초반에서 병천순대, 호두과자, 소머리국밥 이야기가 나왔다. 소머리국밥이라니! “(리듬 맞춰서) 소- 머리국- 밥-” 이 넘치는 위트와 매력에 지금도 슬며시 웃음이 난다.
내가 사는 천안에 봄이 오면은 / 각원사에 철쭉꽃, 목련화 가득
호두과자, 소머리국밥 맛나게 먹고 / 우리 친구 손잡고 걸어 봅니다
– <천안의 봄> 중
비대면 수업 3회 후, 드디어 대면 수업으로 함께 만났다. 수업 전반기에는 참여자 간에 관계 형성을 위해 다양한 음악 놀이를 한다. 연주 이전에 서로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한 번 더 웃는 것으로 자기의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심리적으로 안전한 환경이된다. 그러나, 두 반의 분위기는 매우 달랐다. 만날 때마다 시끌벅적 유쾌한 기초반, 강사 얼굴은 쳐다도 안 보고 각자 손안의 악기만 들여다보는 점잖으신 중급반. 삶의 배경을 보니 초급반 어르신들은 어릴 때 시골 사신 분들이 많았고, 자녀의 직장이나 자신의 건강 문제로 수도권에서 오신 지 몇 년 안 된 분들이 많았다. 그와 달리 중급반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나신 91세, 89세 고령의 어르신과 초등 교사나 교수직을 퇴직한 분, 젊을 때 외국에서 사셨던 분, 그러면서 충청권에서 오래 사신 분들이 많았다. 표현이 많은 기초반, 악기 실력을 갖춘 중급반. 성향이 너무나도 다른 두 반과 함께 가을에 공개할 ‘청춘제’ 영상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까?
속상한 마음을 담아 외치는 천안 태평가
8월 초, 방학 후 만난 수업에서는 온라인 청춘제에서 우리가 선보일 영상 계획을 공유해 드렸다. 워낙, 긍정적으로 피드백해 주시는 분들이어서 재미있겠다는 반응을 해주셨다. 에픽하이의 노래 <가족관계증명서>를 감상하며 형식에 대해 알아보고, 순창 ‘할미넴’ 영상도 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영도 깡깡이마을 어르신들이 쓰신 인생 시를 함께 보고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봤다고 그림도 그렸다. 초급반에는 살면서 속상했거나 화나는 일을 생각해 오라는 방학 과제를 내드렸었다. 발표시간이 되자 몇십 년 전 일부터 요즘 속상한 일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이야기들을 반주 음악 길이에 맞게 수정하고, 비트에 맞춰 불러보고, 반주 음악을 말하기 편한 템포로 조정하였다. 한 분씩 앞에 나와 마이크 잡고 불러보았다. 짜증 나고 속상해서 내 인생엔 없었으면 좋았을 것 같은 그 일을 크게 말하고 나니 이제는 웃음이 났다. 수업을 마치고 나가는 초급반 어르신들이 즐거워하시니, 중급반 어르신들이 초급반만 재미있는 것 하냐며 부러워하셨다.
남~편이 예쁜 꽃, 양귀비씨 구해왔다 / 단속반에 걸려 벌금을 냈다 / 아이고, 피 같은 내 돈 오 백만 원

– 송기자 <천안 태평가>
어머니, 너무 아들, 아들 마세요 / 어여쁜 손주들도 낳아드렸잖아요 / 나도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죠

– 곽춘실 <천안 태평가>
칼림바 연주를 준비하는 중급반 어르신들은 힙합 스타일로 편곡한 <태평가>를 부르고, 연주 연습을 하셨다. 영 익숙하지 않은 리듬인데, 스튜디오에 가서 녹음한다는 생각에 열심히 연습하셨다. 드디어 스튜디오 녹음 첫 날, 두 반이 함께 <태평가> 합창했다. 녹음 스튜디오가 어떻게 생겼는지, 과정은 어떻게 되는지, 마이크에 노래하고 헤드폰으로 들리는 내 목소리는 어떤지, 개인 녹음 전에 환경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녹음 날, 워낙 잘하던 칼림바 연주팀인데 녹음 부스에 들어가니 연주의 민낯은 드러나고, 긴장해서 실수 연발. 예상보다 길어지는 녹음 시간에 마음이 급해져 삐져나오는 내 마음의 소리들. 다시, 다시, 한 번만 더! 어르신들이 오히려 선생님 힘드시겠다며 위로를 해주셨고 이런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냐며 좋게 말씀해주셨다.
세 번째 방문엔 랩 연주팀 출동. 어르신들의 난생처음 녹음이라 예상 시간을 종잡을 수 없었다. 랩은 한 분씩 녹음하였는데, 한두 번 만에 오케이 사인이 났다. 기대했던 대로 수월하게 녹음이 진행되어 참 즐거웠다. 어르신들에게도 재미난 경험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병원에 입원해 몇 주간 못 나오셨던 한 어르신은 발표회 날 갑자기 나타나셨다. “나 사진 찍고 싶어서 왔어~”
  • 스튜디오 녹음
창작 과정에서 만나는 주인공 ‘나’
나는 내 손으로 만들면서 얻는 기쁨을 안다. 그 창작의 가치를 어떻게 사람들과 같이할까 고민하던 중에 ‘꼬마작곡가’로 실제로 부딪쳐 보는 기회가 생겼고, 여러 가지 시도해볼 수 있었다. 사실, 그냥 하면 되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하나 하는 생각에 못 하는 것일 뿐. 그래서 수업 전반기에 관계 형성을 위한 음악 활동을 할 때, 어르신들에게 자신을 초등학교 2학년으로 생각하시라고 말한다. 모든 어린이는 호기심 많은 예술가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랩> 수업은 이전에 청소년과 여러 번 진행한 경험이 있지만, 어르신들과는 처음이었다. 어르신들뿐 아니라 나에게도 모험이었다. 그러나 어르신들은 음악적 연주 경험은 많지 않지만, 삶의 경험과 이야기는 풍부했다. 랩은 멜로디에 구애받지 않고 말하듯 자연스럽게, 그리고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 더 편안하게 창작이 가능했다. 음악 분야 수업은 대부분 연주 수업으로 기능 중심이 되기 쉽다. 창작 수업은 잘한다, 부족하다, 이런 비교 없이 자기가 잘 드러나면 되고, 남들과 다를수록 창의적인 작품이 된다. 내가 창작 수업을 좋아하는 이유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정말 좋겠네’ 인생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표현된 노래였을까. ‘사진 찍고 싶어서 왔어’ 하신 어르신처럼, 누군가의 엄마·아빠로 열심히 뒷바라지하면서 살아오신 어르신들도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같은가 보다. 유튜브에 나온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셨다. 가족과 지인들에게 영상 공유는 물론, 딸의 계속되는 잔소리에 ‘너는 유튜브 나와봤냐’로 당당히 응수했다고 하신 어르신도 계셨다. 또한, 새로운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어떤 분은 TV에서 나오는 랩을 보고 저게 노래냐, 손가락질하셨는데 자신이 이걸 하고 있다며, 해보니 재미있다고 하셨다.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묵고 묵었던 감정을 표현하신 것에 보람을 느꼈다. “이 말을 해도 되나”라며 매우 조심스럽게 시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했던 어르신과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놀랍게도 그 시어머니는 이미 몇십 년 전에 돌아가신 분이었다. 실제로, 몇몇 어르신들의 경우, 그 마음을 아프게 했던 분들은 벌써 한참 전에 돌아가신 분들이 많았다. 정작 그 마음을 들어주어야 할 사람은 가고 없는데도 남겨진 감정은 참 강력하고 강력하다. 그 어르신은 이후로 수업 때마다 “내가 감히 밖에다 우리 시어머니 얘기를 했다니…” 하시면서도 우울증이 낫는 것 같다며 나중에 엄마가 세상에 없어도, 엄마가 보고 싶을 때 영상으로 볼 수 있겠다는 딸의 얘기도 전해주었다.
  • 나의 이야기를 담은 글쓰기
삶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날 때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온다는데, 그렇다면 나는 한 클래스에서 약 1천5백 년 치(?)의 이야기와 만나는 셈이다. 놀랍지 않은가? 어르신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태어난 고향 신의주 이야기, 나막신 신고 다닌 이야기, 명동 음악다방에 놀러 다닌 이야기까지, 그야말로 문화유산이고 역사다. 놀라움의 연속인 그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나는 참 재미있다. 때로는 어르신들이 낯선 문화예술교육 수업 방식에 적응하기 어려워하시기도 한다.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 그만 수업하자”라고 할 때는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르신들의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가 조금씩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요즘 다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엮어 ‘2023년 청춘제’를 준비하고 있다. 새로운 기관, 어르신과 함께 하는 와중에 작년에 만났던 천안 어르신들 생각이 많이 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청춘제를 준비하며 생기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겪어내는 힘이 되고 있다. 어르신들의 삶의 이야기가 밑거름되어 만들어진 청춘제는 어르신들에게, 우리에게 또 하나의 삶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조정아
조정아
문화예술교육가. KAC 코치. 작곡과 문화예술경영을 공부했다. 음악을 통해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영유아부터 어르신까지, 쪽방촌 아이들, 미혼모 아이들, 개발협력국 아이들. 이런 만남들이 나를 지켜주었고, 덕분에 잘 살아올 수 있었다. 언젠가 우리 모두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진짜 근사한 내 음악을 하고 싶다.
melodyroom@naver.com
사진제공_조정아 문화예술교육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