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자연과 도시가 어우러져 있는 작은 동네에서 살았다. 우리 집 뒤편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산과 들이 펼쳐져 있었다. 다른 쪽으로는 회색 도시가 둘러싸고 있었다. 도시개발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시기 우리 동네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개발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나는 그 더딘 시간 덕분에 자연을 즐기며 그곳에서 초등학교부터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살았다.
나를 지지하는 – 생각
어느날, 집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어떤 집을 송충이 떼가 뒤덮었다는 소식을 듣고 열심히 달려갔다. 털이 송송거리는 귀엽지만 징그러운 송충이 떼가 한 집을 뒤덮은 모습은 정말 세기말적이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송충이지만 어려서는 길에 송충이가 참 많았다. 송충이 떼를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새빨간 태양이 ‘으르렁’ 거리며 논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는데 그 붉은 태양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한동안 멈춰서서 바라보게 되었다. 무엇에 홀린 듯이 넋을 잃고 바라보니 태양이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이상한 기분까지 들기도 했다. 송충이 떼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태양을 봐서인지 기억 속 그 붉은 태양은 매우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그때 그 강렬함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하지만 공연 준비로 힘이 들 때, 깊은 명상의 시간으로 들어갈 때,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할 때 그 비현실적인 태양은 가끔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건넨다.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아마 어린 시절을 자연에서 보내지 못했다면 이런 위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지지하는 생각. 내가 나를 위로하는 생각. 이 글을 쓰는 내내 실컷 태양 생각을 하니 힘이 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 몸
준비된 몸은 많은 영감을 준다. 자신감도 하나의 영감인데 자신감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고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해준다. 결국 몸의 순환 상태가 좋을 때 좋은 생각이 들어 온다. 춤을 추기 전에도 몸을 풀지만 글쓰기 전, 워크숍 하기 전, 미팅하기 전, 싸우기(?) 전, 발표하기 전 등 중요한 일을 앞두고 나는 매트 위에 있게 된다. 사실 몸을 움직이기 전 잘 먹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결국 어떤 하나의 영감을 얻고자 한다면 일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화장실도 잘 가야 하니.
가슴 뛰는 – 헤매기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고, 가지 말라고 하는 길만 골라 다녀서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시간을 돌아 돌아 지금의 내가 완성되었다. 여기저기 피가 나고 마음의 상처도 많이 들었지만, 나의 경험은 늘 값지다. 나의 ‘헤매기 DNA’가 말을 걸어올 때마다 가슴이 뛴다. 몸은 과거와 미래를 가늠할 수 있지만 나의 인생은 가늠하기란 늘 쉽지않다.
책: 요즘은 책, 지적 허영심으로 시작한 책 읽기 리서치는 복잡했던 나의 머릿속을 차분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책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계속 가든지 아니면 중간에 멈추겠지, 좀 더 가보면 생각들이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이 길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디론가 가 있겠지.
타인: 얼마 전 한 작가의 퍼포먼스 후 토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 작가의 인성과 깊은 성찰이 만들어낸 태도가 참 우아했다. 얼마나 많은 헤매기 안에서 스스로를 붙잡고 저기까지 왔을까! 정리된 결과보다는 정리되는 과정을 나눌 줄 아는 용기가 아름다웠다. 작가가 얼마나 성실히 그 시간을 보냈는지 얼마나 진실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오롯이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런 타인의 태도로부터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태도가 나에게 큰 울림을 주고 나를 다시 보게 하고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한다.
헤매고 헤매며 길을 잃는 사이에서 하나의 빛을 만날 때 너무나 행복하다. 6개월째 흐릿한 영감으로 사는 것도 쉽지 않지만, 하루하루 노력하며 길을 찾는다면 또렷한 영감을 만나겠지, 언젠가는. 나의 영감이여, 어서 오라. 그런데 영감이 있기는 할까?
- 이윤정
- 댄스프로젝트 뽑끼의 대표로 활동 중이며 춤, 안무, 퍼포먼스, 예술교육, 소메틱 수련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사회와 예술의 접점에서 몸에 잠재성을 탐구하고 소수자와 미약한 몸들이 공명하고 공생하기 위한 안무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작픔으로 <설근체조> <내장진동> <동시다발> <점과척추사이> <1과4,다시> 등을 안무했다.
dangja17@naver.com
인스타그램 @yunjunglee_ppopkki -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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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감성템⑮ 생각, 몸, 헤매기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