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장마가 끝나자마자 무더운 날들이 이어진다. 따가운 햇볕 아래 오이는 오이답게 푸르고 가지는 가지답게 보랏빛으로 묵직하게 익어간다. 이른 아침 풀을 베고 있는데 삼총사 언니들이 산에서 내려온다. 잠깐만요, 밭에서 소리 지르고, 서둘러 집에 와서 보따리를 싼다. 보따리라야 별거 없다. 가지와 오이고추와 옥수수와 토마토가 다이다. 보따리 전해주고 헤어져 돌아오다 수돗가에서 일하던 승분 언니를 만난다. 잠깐 집에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언니 집에 들어가 커피 마시며 얘기 나누다, 피클에 가까운 오이짠지와 수박 반 통과 튀겨온 강냉이와 말린 버섯 얻어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의 집 숟가락 개수까지 훤하다는 산골에 몸 부린 지 10년 차다. 알려고 하지 않아도 알아지고 귀 막으려 해도 들리는 게 이웃들 사정이다. 누구네가 언제 마늘 심는지 깨 터는지, 누가 최근에 치매 판정받고 어느 시설에 출퇴근하게 됐는지 훤하다. 마을회관에서 만나고 동네 나서다 만나고 밭일하다 만나니까. 누가 무엇을 심는지 거두는지 대개 보인다. 보이는 게 있으면 몸도 움직인다. 그래서 산골 사는 백수도 나름 바쁘다. 내 코가 석 자인 상황 아니면 호미와 엉덩이 방석 들고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밭에 뛰어가게 되니까. 말벗이라도 해주고 뭐라도 거들 일이 반드시 있으니.
도리깨질하는 앞에 서서 고개만 까딱거려도
수월하다는 앞집 임영자 씨 말 듣고
저짝에서 하나 넘기고 이짝에서 하나 제치고
둘이 하면 힘든지도 모르고 잘 넘어간다는
아랫집 맹대열 씨 말 듣고
쌀방아 보리방아 매기미질도
둘이서 셋이서 하면 재미나대서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양승분 씨 밭에 가서
가만히 서 있다
콩 터는 옆에 앉아 껍데기 골라냈다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콩알을 줍기도 했다
심지도 않은 땅콩 한 소쿠리 얻었다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수월하다는 앞집 임영자 씨 말 듣고
저짝에서 하나 넘기고 이짝에서 하나 제치고
둘이 하면 힘든지도 모르고 잘 넘어간다는
아랫집 맹대열 씨 말 듣고
쌀방아 보리방아 매기미질도
둘이서 셋이서 하면 재미나대서
콩 튀듯 팥 튀듯 바쁜 양승분 씨 밭에 가서
가만히 서 있다
콩 터는 옆에 앉아 껍데기 골라냈다
사방팔방 날아다니는 콩알을 줍기도 했다
심지도 않은 땅콩 한 소쿠리 얻었다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 김해자 「백수도 참 할 일이 많다」
환갑 지난 지 2년 차인데, 젊은이로 불리는 나는 고추 몇 줄 따고 나면 절뚝이며 걷고, 무성한 풀 좀 베고 나면 허리께가 탈이 난다. 어깨는 말할 것도 없고 손의 관절도 수시로 쑤신다. 내 몸의 통증을 통해 새삼 남의 아픔을 이해하게 된다. 언니 혹은 어매라 부르는 분들의 절뚝거리는 걸음이나, 두 손으로 허리 받치고 뒤로 넘어질 듯 서 있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게도 된다.
두어 집 들렀다 단호박 한 자루 얻어서 오는 길에, 우정인 어매 집에 갔더니 김매느라 바쁘시다. 아흔이 코앞인 어매는 올해부터 요양병원 다니신다. 일주일에 5일은 차로 태우러 오고 태워다 준다. 열 손가락이 다 구부러지고, 다리를 손으로 당겨서야 앉을 수 있지만, 우정인 어매 낯빛은 항상 밝다. 잠깐 들러도 뭐라도 먹여 보내려고 하신다. 당연히 텃밭도 돌보고 강아지도 돌보고 길냥이 밥도 챙겨준다. 몇 살 아래인 맹구 언니나 한참 아래인 승분 언니가 옥수수나 감자 쪄서 나눠 드시며 한담도 나누고 냉장고도 정리하고 청소도 살짝 해주곤 한다. 나눈다거나 도와준다거나 돌본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사는 것이다.
눈꺼풀이 가물가물 내려오는
다 늦은 저녁에 무신 마을회의를 간다고
분내 폴폴 나는 감자 쪄 들고
우정인 어매가 납작 엎드려 계단을 오르는디
엉거주춤 팔 하나 쭈욱 뻗어 계단에 올리고
팔 하나 납작 내려 다리 움켜잡고
흔들흔들 다리를 마악 들어 올리는디
어라, 마침 건너편에서 절뚝절뚝 걸어오던 종분 씨가
후다닥 달려와 우정인 어매 엉덩이를 살짝 받쳐드는디
얼레, 허리에 두 손 받치고 뒤로 자빠질 듯 다가오던
금례 씨가 넘어진 아이 안듯 어매를 일으켜 세우는디
얼쑤, 허리에 기합 넣고 우드드득 일어서는디
아싸아, 흙 묻은 손바닥 탁탁 터는디
감자껍질은 툭툭 벌어지는디
다 늦은 저녁에 무신 마을회의를 간다고
분내 폴폴 나는 감자 쪄 들고
우정인 어매가 납작 엎드려 계단을 오르는디
엉거주춤 팔 하나 쭈욱 뻗어 계단에 올리고
팔 하나 납작 내려 다리 움켜잡고
흔들흔들 다리를 마악 들어 올리는디
어라, 마침 건너편에서 절뚝절뚝 걸어오던 종분 씨가
후다닥 달려와 우정인 어매 엉덩이를 살짝 받쳐드는디
얼레, 허리에 두 손 받치고 뒤로 자빠질 듯 다가오던
금례 씨가 넘어진 아이 안듯 어매를 일으켜 세우는디
얼쑤, 허리에 기합 넣고 우드드득 일어서는디
아싸아, 흙 묻은 손바닥 탁탁 터는디
감자껍질은 툭툭 벌어지는디
– 김해자 「광덕 부르스」
장자는 전란의 한복판에서 눈물겨운 삶을 살아냈던 민초들이 군자이자 위대한 승리자임을 우의적으로 말해준 혁명적인 문필가였다. 『장자』의 주인공들은 권세와 재산은 말할 것도 없고 몸조차 온전하지 않은 곱사등이와 절름발이와 언청이 같은 사람들이다. 어눌하고 지적인 능력조차 없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따른 곱사등이 ‘애태타’ 같은 사람을 통해, 장자는 우리가 잃어버린 존재의 실상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 같다. “만물과 더불어 따뜻한 봄과 같은 관계를 이루”는 것이 큰 덕이라는 사실을. 이 왜소하고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거인이라는 것을.
좋아도 만나고 싫어도 접해야 하는 이웃들과 지내면서 배워가는 게 있다면,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은 애초에 없다는 것. 가난하고 의지할 데가 없을수록 서로 보살피고 나눠 먹는다는 것. 타자에 의해 내 삶이 만들어지고 지탱되며, 내 목숨은 만물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 지극히 당연함에도 체감하거나 실감하지 못했던 상식적인 사실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하지만 희망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하나같이 번듯한 학력과 외모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갑질이 늘어가는 사회에서 아랫것들에게 베푼다는 듯이 복지와 돌봄을 설파하는 오만한 사람들 속에서, 적어도 부끄러워하며 주는 자들과 자발적으로 나누고 돌보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것이 인간다움이니까. 그것이 존재의 실상이니까. 김치의 어머니인 배추와 무가 그러하듯이. 배추와 무의 어머니인 흙이 그러하듯이.
- 김해자
-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하여,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해피랜드』 등을 펴냈고, 백석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만해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haija21@naver.com - 사진_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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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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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의 하루가 배추 속처럼 꽉 찼네요~
광덕 부르스 멋지네요!
부르스 한판이 깝깝한 가슴을 툭툭 벗겨주네요~
삼인조 부르스 화이팅입니다.
지극히 당연하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과 같이
오늘부터 그린㉓ 만물과 더불어 나누고 돌보는 삶
잘 보고 갑니다
지극히 당연하게,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과 같이
오늘부터 그린㉑ 만물과 더불어 나누고 돌보는 삶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