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 사업의 일환으로 떠난 베트남. 낯선 도시와 낯선 학교, 그리고 낯선 아이들 틈에서 어색했던 것도 잠시,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던 마음이 곧 자리를 찾아 아이들을 향한 애정과 수업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찼다. ‘나’에서 시작된 시선과 생각은 금방 ‘마을’까지 넓어져 학생들의,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변화를 이끌었다. 우리 세 명의 예술강사는 놀랍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우리를 성장시킨다고. 그렇게 우리는 같은 고민을 하고,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다시 만난 선생님들
베트남에서의 첫 만남은 안개 속에서 이뤄졌다. 다음 동아리 수업 예정 마을인 ‘깟깟’에 들렀다 늦은 오후, ‘사파’에 도착했다. 짙은 안개를 뚫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걸어왔다. 사파에서 동고동락 중인 사람들이다. 안개 속으로 베트남어와 한국어가 섞여 스며들었다. 이제 막 수업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도란도란 미술수업과 사진 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틈으로 저녁거리에 대한 궁리가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현지 운영 책임자를 맡고 있는 서정훈 씨의 양손에는 저녁 만찬거리들이 묵직하게 들려있었다. 베트남에서 NGO 봉사활동을 오래 해 베트남어에 능숙한 박예린 씨(운영팀)는 전화로 다음 일정에 관한 내용을 확인하느라 분주했다. 통역을 책임지고 있는 리엔과 하잉은 운영팀의 프엉에게 한 단어씩 천천히 한국말을 전했다. 그리고 그들 틈에는 반가운 얼굴들도 있었다. 수업을 막 끝낸 강사 김민지 씨와 여한아 씨였다. 한국에서 익힌 얼굴들을 베트남에서 마주하니 오랜 친구를 만난 듯했다. 두 사람은 오후 수업에서 모든 걸 쏟아내고 온 탓이었을까. 많이 지쳐 보였다. 우리는 첫눈처럼 어깨에 소복이 쌓인 안개를 털어내고 숙소로 들어갔다.
“쌤! 겨울에 뭐해요? 우리 베트남 가요!”
베트남으로 떠나기 전 나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익산미디어센터를 들락거렸다. 여느 여름처럼 매미가 울었고 날씨는 무더웠다. 건물 밖은 불볕더위로 뜨거웠고 건물 안은 사람들의 열기가 식지 않았다. 여름 내내 베트남의 역사와 환경, 교육 제도, 베트남어에 관련된 수업이 계속되었다.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며 시원한 바람을 털어내는 선풍기 아래에는 교육안 수정을 위해 기획자와 강사들이 모여 있었다. 사파에서 초•중학생 사진 강의를 맡은 여한아 씨도 함께였다. 여한아 씨는 지난해 여름, 담당 기획자에게 “쌤! 겨울에 뭐해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그것이 이 여정의 시작이었다. 당시 그녀는 보조강사로 일해 줄 것을 제안 받고 ‘잘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지만, 그동안 미디어 분야를 통해 문화예술교육을 해온 경험을 믿고, 베트남 행을 결심했다. 그리고 올해, 그녀는 다시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보조강사가 아닌 주강사로서 자신의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며 무척 기뻐했다.
여한아 씨와 함께 강사로 참여한 미술교육담당 김민지 씨도 설렘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올해 처음 사업에 참여한 김민지 씨. 시간 날 때마다 여행을 즐겨왔던 그녀는 여행을 다니며 학교 또는 아이들과 교류했던 경험들이 이번 문화예술교육사업에 보탬이 되어 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다. 모든 회의 일정이 끝나고 ‘이제 곧 매미 울음소리가 희미해지겠구나.’ 생각하며 사람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왔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만나 베트남으로 떠나왔다.
꿈꾸는 아이들,
별처럼 빛나는 눈동자
내가 머무는 마을과 조금 떨어진 중학교에서 사진 수업이 있는 날. 수업을 앞둔 교실 한구석에 재활용품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마을 주민과 아이들의 꿈이 담겨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이 직접 모아온 것들이다. 이곳에 머무는 날짜가 늘어갈수록 수업에 대한 아이들의 열의가 점점 높아져 가고 덩달아 수업 분위기도 무르익어 간다.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한 초등학교와 마을 외곽에 자리한 중학교에서 각각 이루어지는 수업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마을’로 시선이나 생각을 넓혀가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각각 스무 명. 사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여한아 씨가 담당하고 미술 관련 수업은 김민지 씨가 진행한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의 수업은 이번 교육을 이끌어 가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오늘 수업은 마을 주민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마을의 모습을 인터뷰하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시간. 학생들은 조를 나누고 역할을 정한 다음 학교를 벗어나 마을로 이동했다. 활발하고 매사에 적극적인 ‘비엣 아잉’이 앞장서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인터뷰할 내용을 설명하는 동안 한 명은 촬영을 맡고 남은 한 명은 인터뷰 내용을 세세히 기록했다. 사진을 찍는 ‘쯔엉’의 모습에는 진지함이 묻어났고 ‘짱’은 한 단어라도 놓칠세라 부지런히 메모했다. 아이들만 진지한 게 아니다. 인터뷰 내용이 적혀 있는 스케치북 반대쪽에 마을 모습을 그려주시는 마을 어르신은 아이들과 같이 그 그림들을 보며 남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대낮인데도 아이들의 눈빛이 별처럼 반짝인다.
‘꿈꾸는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배우는 선생님들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저녁. 이때부터는 선생님들이 공부하는 시간이다. 한방에 모여 앉아 수업의 장단점이나 운영에 필요한 이야기들을 나눈다. 수업을 진행하며 느끼는 것들에 관하여 많이 들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평소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을 자랑하는 여한아 씨가 먼저 아이들과 있었던 일을 들려준다.
“오늘 ‘꿈꾸는 마을’ 사진 촬영 후 글을 쓰는데 늘 소심하고 조용한 ‘푹’이라는 친구가 걱정됐어요. 이번 수업에도 다소 소극적이었거든요. 그런데 ‘푹’이 아이들이 웃고 있는 그림을 하늘에 놓고 찍었더라고요. 그러면서 ‘학교가 더 좋아진다면 이 아이들처럼 우리 학교 아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겠지?’라고 써놓은 거예요. 아이의 개인적인 성향에 대한 걱정과 우려보다는 가능성을 찾아주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김민지 씨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하나같이 글씨를 잘 쓰고 글씨체도 예쁘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신기해했다.
“결과물을 보면 각자 개성 있는 글씨체만큼 참신한 아이디어나 내용이 자주 나와요. ‘푹’처럼요. 만들기 수업에서는 어떤 재료를 선택해도 스스럼없이 자신의 것으로 잘 표현해 내요. 수업마다 놀라움의 연속이에요. 재료가 갖는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그 이상으로 만들어 주죠.”
이곳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들이 갖는 생각의 한계를 상상력으로 훌쩍 뛰어넘었다. 오가는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는 선생님들.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해 ‘하나’를 가르치고 나면 선생님들은 ‘둘’을 배운다.
한국이 그리워지는 만큼
좋아지는 사파의 아이들
체류 기간이 늘어난 만큼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 한식에 대한 그리움도 커져간다. 회의가 끝나고 요리 경험이 많은 서정훈 씨의 손끝에서 김치찌개와 몇 가지 나물 반찬이 뚝딱 완성되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한식에 배가 앞산만큼이나 나왔다. 마른 몸 어디에 저렇게 많은 음식이 들어갈까, 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여한아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족과 떨어져서 먹고 싶은 한국 음식들을 참아야 하는 대신, 다른 것들을 배불리 채워가고 있다. 여한아 씨는 힘들 때마다 이곳의 아이들에게서 해답을 찾았단다.
“아이들은 어디를 가도 똑같은 것 같아요. 순수하고 호기심 많고 가끔 말을 안 듣죠. 한국에서 수업을 준비할 때는 학생 이외의 부분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이번 교육 역시 외부적인 문제들에 언어와 문화 차이까지 있으니 더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이들 자체에 더 집중할 수 있는 방식을 깨달아 가고 있어요.”
미술 분야를 담당하는 김민지 씨 역시 한국에 두고 온 것들만큼 이곳에서의 시간이 특별해졌다.
“자유로움 속에서 아이들의 가능성을 일깨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 또한 좋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아요. 학교 수업에서 벗어나 우리와 함께 수업하며 변화하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좋아요. 한국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어요.”
세상의 중심이 ‘아이들’인 교육
지내온 시간만큼의 시간이 또 지나면 전시와 함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된다. 남아 있는 수업시간이 줄어들수록 아쉬운 마음도 커져 간다. 교육을 진행하며 김민지 씨는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하는 센터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됐다.
“이곳 아이들에게는 지속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러려면 문화예술교육을 할 수 있는 센터가 필요하겠죠. 개인적으로는 문화예술교육이 자유롭게 이뤄지는 쉼터 같은 공간이면 좋겠어요.”
여한아 씨는 다른 무엇보다 이곳의 교사 인력이 지속적으로 양성되기를 기대했다. 그녀 역시 미디어 교사 양성과정을 통해 문화예술교육을 알게 되었고 지금처럼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예로 들며 지속성이나 가능성에서의 확신을 품고 있었다. 모두의 고민과 바람이 같은 곳을 향한다.
“씬짜오 타이 장!(안녕하세요? 장 선생님!)”
일요일 오후. 쌍둥이 형제, ‘타이’와 ‘빙의’가 씩씩한 목소리로 조용히 잠들어 있는 학교를 깨운다. 그 뒤를 따라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나도 인사를 한다.
“짜오엠(안녕!)”
학생들은 한 주 동안 촬영한 사진들을 컴퓨터로 옮기기 시작한다. 프린트 담당인 ‘프엉’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이제 곧 수업이 시작된다. 얘들아! 어서들 와라. 결석도, 지각도 환영이다.
글, 사진_ 장작(장근범)
일과 작업, 문화예술교육을 병행하며 살고 있다.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사업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사업은 수원국의 문화 존중과 주인의식(ownership)이 강조된 문화예술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공적개발원조의 본래 목적인 인도주의적•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은 물론, 국제사회 내 ‘지속 가능 발전 교육으로서의 문화예술교육 가치 확산’에 기여하고자 2013년에 시작되었다. 올해는 세 명의 예술강사(장근범, 김민지, 여한아)가 베트남 라오까이성 사파현 초ㆍ중교육과 사파에 처음으로 결성된 동아리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베트남 지원사업은 2017년까지 5년간, 지속적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ㅇ주최 : 문화체육관광부
ㅇ주관 :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ㅇ문화예술교육ODA 사업단 : 익산공공영상미디어센터
ㅇ협력기관 : KOICA 베트남 사무소
* 이 시리즈는 문화예술교육 공적개발원조 (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사업을 위해 베트남으로 떠난 예술강사 3명의 이야기로, 총 4회에 걸쳐 소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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