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비닐, 상품 포장 비닐, 과자 비닐, 비닐장갑, 간편식이 담긴 팩 비닐 등 우리 일상에 깊이 스며든 일회용품이나 비닐을 우리는 언제부터 사용해 왔을까? 너무 무감각하게 사용해 왔던 것은 아닌지, 소비하기 전에 이것을 의식할 수 있다면 사용량을 줄이거나 개선하려는 어떤 다른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 비닐이 완전히 분해되는 데는 그 종류에 따라 몇십 년에서부터 몇백 년까지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수백 년을 사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터무니책방에서 만난 동네 예술가 친구인 방영경, 신현진, 엄선 작가는 각자의 관심사였던 소비, 교환, 쓰레기를 주제로 관련 책을 읽고 소비 일기를 기록해 보고자 2020년 스터디 모임을 시작했고, 2021년에 ‘사회를 마주하는 N개의 문화예술교육’ 사업(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 참여하여 <비닐스런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
비닐을 둘러싼 일상의 감각
<비닐스런 프로젝트>는 나의 일상에 스며든 비닐·플라스틱을 의식적으로 바라보고, 수집하며 나의 취향과 소비를 관찰하고, 이를 기록하여 나의 ‘비닐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을 감각하는 프로젝트다. 우리가 사용하는 비닐이 실제로 언제, 어떤 종류를, 어떤 상황과 어떤 이유로 사용하고 언제 쓰레기로 발생하는지, 비닐의 소비와 사용의 지점들을 기록하였다. 또한 평소에 몰랐던 비닐과 얽혀있는 나의 이야기와 일상의 맥락들을 발견해 보고, 비닐의 재질, 성질, 표면의 소리를 살펴보며, 비닐이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존재하는지를 기록하는 활동을 통해 좀 더 깊이 인식하는 시간을 가졌다.
2022년에 진행한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는 <비닐스런 프로젝트>의 두 번째 아카이브로, 과자를 매개로 ‘알맹이와 껍데기’ ‘소비의 의식’ ‘라이프 패턴’을 기록하고 비닐과 소비의 중심에 놓여있는 과자와 포장을 탐구하며 좀 더 우리 사회 안에 있는 ‘비닐스런 일상’을 유쾌하게 풀고자 했다. 기록, 워크숍, 전시로 구성된 프로젝트는 과자와 과자를 소비하는 이의 관계와 의식을 관찰과 탐구, 공유의 형태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과자의 알맹이 그늘에 가려진 것들 – 포장, 의미, 마케팅, 기억 등 다양한 맥락을 찾아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부족한 일상의 에너지 지원을 한다거나, 소소한 기쁨이나 위로를 주는 존재, 또는 단순히 씹을 거리,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존재, 과자에 얽힌 사연들이 기록 사이 사이와 워크숍, 커뮤니티 안에 발견되었다.
“비닐 사용의 행동을 지적하기보다 지금 우리와 비닐 사이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서 비닐과 만나고 헤어지는 여러 순간 중에 어떤 지점을 건드려야 효과적일지를 생각해 보았어요. 우리는 수많은 비닐을 만지고 찢고 구기고 버리는데, 기억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래서 나에게 비닐이 왔다, 있다, 뜯었다, 버렸다는 행위를 자각하고 의식하는 부분에 방점을 찍어보기로 한 거죠. 우리가 지나쳐 가는 비닐을 자각할 수 있을까?”
– 엄선 작가
“어렸을 때부터 과자를 무척 좋아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무료하고 허전한 시간을 달래주기도 하고 다양한 식감과 맛으로 그때그때의 기분 전환에 큰 도움을 주어 어떤 때는 위로가 되기도 했던 것 같아요. 과자는 참 사소하고 간편해서 부담 없이 쉽게 내 손에 들고 올 수 있는 식품이죠. 그런 개인적인 이유와 더불어 비닐스런 프로젝트의 핵심 키워드인 ‘비닐 소비 의식’에 대해서도 과자를 통해 더욱 깊게 이야기 나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 방영경 작가
흥미와 재미로 무장한 비닐 연구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를 시작하면서 구체적으로 누구를 만나야 할까, 누구랑 비닐을 함께 모아야 더 재밌고 흥미가 생길까 고민하게 되었다. ‘쓰레기 소비를 줄이자’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에서 놓치는 ‘의식하기’의 지점을 참여자의 기록과 관찰로 드러내는 작업이어서 흥미와 재미는 매우 중요했다.
“과자를 남다르게 좋아하시는 분, 당 떨어지는 시대를 과자와 함께 헤쳐 오신 분, 내가 먹는 과자에 관해 탐구해 보고 싶으신 분, 그리고 과자와 과자 봉지의 뗄 수 없는 사이에 관해 이야기 나누실 분들을 동료 연구자로 모집하여 과자를 언제 어디서 왜 찾고 어떻게 함께 존재하는지 기록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 신현진 작가
<비닐스런 프로젝트>에서는 참여자를 어떠한 활동에 ‘참가’하는 주체이기보다는 함께 하는 ‘동료’로서 관계 설정을 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어떠한 대상에 집중할지 고민하였다. 프로젝트 초기 기획 단계에는 환경운동가, 어린이, 과자 산업 종사자 등 여러 대상을 후보로 고민하였다. 여러 가능성을 두고 이야기 나누다 무작정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 비닐에 관심 있는 사람,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설정해 보기로 했다. 연령대, 직업군 등 특정한 분류를 떠나서 호기심, 관심사, 흥미를 느끼는 공감대 중심으로 워크숍을 알리고, 관심을 가지는 이들을 동료로 만나고자 했다. 우리가 참여자를 ‘동료 연구원’이라고 이름 지어 붙인다고 해서 당장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게 호명하고자 했다.
개인의 과자 소비 기록을 돕는 도구로 키트를 활용했다.특별한 프로그램 없이도 키트만 있다면 자신만의 기록 혹은 소규모 공동체와 함께하는 기록 프로젝트를 꾸릴 수 있도록 상품화해 보고자 하였다. 자신의 기록을 다른 동료의 기록과 함께 분석하는 활동이 또 다른 중심이어서 참여자가 일상에서 ‘7일 이상’ ‘기꺼이’ 기록해야만 하므로 즐겁게 기록하고 싶어지는 키트를 만들고자 했다. 기록에 용이한 과자 전용 기록 노트를 개발하고, 키트 구성품도 재활용 비닐과 폐비닐을 사용하여 제작했다. 키트의 모든 도구를 구매하여 조합된 세트로 전달하는 것보다, 동료 연구원이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이미 갖고 있는,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을 발견하고 추가하여 키트가 갖춰지도록 시도했다.
“사용자의 개성과 취향, 필요나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으로 완성될 수 있는 키트를 연구해 보고자 했지요. 사용자가 자신만의 맞춤 키트를 완성할 수 있게 구성하였습니다.”
– 신현진 작가
알맹이와 껍데기, 그리고 비닐스런 추측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를 진행하면서 사람들이 과자라는 내용물 이외의 것을 잘 인식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봉지의 크기, 재질, 디자인을 들여다보면서 과자를 먹는 것만큼 과자봉지에도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하는 작은 개입을 ‘비닐스런 기록 수첩’에 적용하였다. 동료 연구원은 과자봉지 속 알맹이에 집중되었던 관심을 겉 포장 비닐로 돌려 밀착 탐색하며 제품 홍보 등 과자 포장이 가진 본래의 목적 외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부분을 발견하고 기록했다. 일주일 동안 내가 먹은 과자 비닐을 씻어 말리고, 오리고, 기록하는 귀찮고 번거로울 수 있는 과정을 의도적으로 넣은 이유는 과자봉지를 대하는 시간이 길어지며 새로운 감각과 경험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알맹이와 껍데기는 비닐스런 프로젝트에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물건을 받거나 구매할 때 알맹이를 주로 ‘의식’합니다. 슈퍼마켓에서 우유를 구매했지 우유 팩도 함께 샀다고 생각하거나 의식하지 않지요. 비닐스런 프로젝트는 이 두 요소를 함께 의식하기 위해 ‘기록’과 ‘관찰’이라는 방법을 선택했고, 꽤나 효과적이었습니다. 반복적인 기록은 비닐을 ‘배경’에서 ‘전경’으로 의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껍데기인 ‘과자봉지’는 알맹이인 ‘과자’와 늘 함께하지만, 의식되지 않는 존재입니다. 과자봉지는 과자를 보호하는 포장이며, 소비를 촉진하는 마케팅 도구,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안내지이며, 처리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쓰레기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많고 중요한 역할을 맡은 과자봉지이지만 우리는 주로 알맹이인 과자만 보고 과자봉지는 대부분 주의 깊게 의식하지 않지요.”
– 엄선 작가
연구원 각자가 먹은 과자 비닐 기록은 소비 기록이 되어 개인의 생활패턴을 엿볼 수도 있었다. 까만 비닐봉투에 담겨 동네에 무단투기 된 쓰레기를 확인하고 재분류했던 <분리분리 프로젝트>와 <폭탄해체반> 활동을 통해 버려진 쓰레기에서 버린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가 기록한 노트만을 보며 그것을 기록했을 사람을 상상해 보는 ‘비닐스런 추측’을 진행했다. 작은 비닐 표본과 짧은 기록 내용을 통해 어떤 취향이나 기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일지 유추해 보는 과정에서 생각보다 알게 되는 정보가 많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부분과 새로운 질문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영역들과 발전시켜야 할 영역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먼저, 환경문제와 맞닿은 주제를 다룬 프로그램이지만, ‘문제’를 ‘현상’으로 탐구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이다. 환경적인 부분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문제에 대한 뚜렷한 개선방안을 제시하지 않아도 되는가. 목표 설정에 대한 고민이 있다. 플라스틱에 대한 주제를 어떻게 함께 탐구하고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 모르는 상태에서 무조건 ‘쓰지 말자’가 아니라 어떻게 자신의 일상에서 존재하는지를 함께 탐구하면서 단계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지향점이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기록하고, 인식하고, 그리고 선택하는 것. 조금은 어려운 프로젝트였던 것 같다.
2021년 <비닐스런 프로젝트>와 2022년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의 가장 큰 차이점은 사용하는 비닐 전반의 기록에서 과자 비닐만을 중점적으로 수집하고 기록하는 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과자를 필요로 하는 공통적인 이유나 패턴 등을 찾을 수는 있었지만 보다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과 소비 기록을 확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내용물과 포장, 알맹이와 껍데기를 따로 떼어 놓고 비닐 포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제품 보호는 물론 마케팅과 홍보 역할, 중요 정보 제공, 편리함까지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하지만 결국 줄여나가고 싶은 포장에 대해서.
또 하나는, 과자 비닐을 기록하는 기간 설정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길게 했을 때 좀 더 유의미한 활동과 결과로 이어지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자발적인 일상의 기록이 중요해서 길게만 설정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 정도가 참여할 만하면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기간일까? 그리고 프로젝트를 함께한 동료라고 느낄 수 있을까? 환경단체나 기관과 연계한다면 좀 더 적극적인 동료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프로그램을 크게 ‘기록-아카이빙’과 ‘탐구-워크숍’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기록의 경우 소비력이 있는 성인이 효과가 좋았고, 탐구의 경우 아이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 되었다. 기록과 탐구를 모두 하는 것도 좋지만, 나누어서 독립적인 프로그램으로 시도해 볼 수 있는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상정한 동료 연구원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 어려웠다. 미리 구축된 대상 네트워크가 존재하지 않고, 홍보 플랫폼이나 SNS도 없었다. 오프라인 홍보를 위해 과자 상점에 전단지를 드리기도 하고, ‘아이들은 당연히 과자를 좋아하지’라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학교나 지역아동센터에서 기다려야 하나 고민했다. 환경, 과자, 플라스틱 등 다양한 키워드로 프로젝트를 연결 지어 홍보를 실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뜻밖의 지점에서 다양한 동료를 만났다. 기록을 좋아해서 과자를 기록해 보는 것에 흥미를 느껴 합류하게 된 동료나, 퇴사해서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찾아 나선 동료나, 아이들에게 새로운 환경 교육과 경험을 주고 싶은 동료, 아무도 모르게 과자를 미래의 슈퍼푸드와 같이 생각하며 이미 과자봉지를 수집해 온 동료도 만났다. 크게는 대부분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참여를 하였고, 그래서인지 놀랍게도 참여자 대부분 각자의 방식대로 일주일 동안 충실히 실천한 기록을 가지고 워크숍을 진행할 수 있었다.
기록 활동을 함께 진행하면서 기록하기 위해 과자를 의도적으로 더 소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일상에서의 소비 습관, 과자가 일상에 어떻게 존재하는지 들여다보고자 했던 의도에서 벗어난 부분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 고민할 부분이다.
일상의 작고 사소한 비닐. 편리하지만 너무 많이, 또 빨리 사용되어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비닐을 의식하기 위한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는 우리에게 결론이 있는 프로젝트라기보다 같이 질문을 던지고 같이 이야기하는 것을 교육의 형태로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시도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보다는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인식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자기 결정에 이르는 과정의 프로젝트를 계속 시도할 기회가 더 많아지면 좋겠다.
-
[2022 사회를 마주하는 N개의 문화예술교육]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 (꼬샤샤)
[출처] 유튜브 아르떼 서브채널
- 비닐스런 프로젝트 (@vinyl_s_run_project)
- 방영경 버려진 비닐을 주우며 비닐로 그림 그리고 있다. 집 앞의 쓰레기 배출 문제를 개선하고자 기획했던 <분리분리 프로젝트>를 기점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쓰레기 문제 개선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동네 활동과 창작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인스타그램 @vinylbebag - 신현진 커뮤니티 아트, 공동체 예술이라는 협업 구조, 실천 중심의 활동을 통해 ‘함께하기’를 발현하는 행위, 환경, 의식체계에 관심을 두고 이를 기반한 작업을 한다. 시각예술 기반의 협업체 ‘라이스브루잉시스터즈클럽’ 안에서 ‘사회적 발효’라는 키워드로 따로 또 같이 여러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ai3htela - 엄선 디자이너로 시작해 지금은 예술기획과 책을 기반으로 이미지와 텍스트, 물성을 함께 다루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독립서점x대안공간 ‘터무니책방’을 운영한다. 주변적인 사물과 이야기가 의미의 중심으로 오는 예술을 좋아한다.
인스타그램 @uhm_seon
사진제공_비닐스런 프로젝트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604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엄청난 과자 덕후인데요, 그동안 과자 봉지를 들여다볼 생각을 못했네요.. ㅋㅋ 예술은 이런 사소한 순간에서 상상력을 싹 틔우나 봅니다!
1234
무심코 뜯은 과자봉지에서 소비의 태도를 인식하기
아주 사소하고 비밀스러운 기록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
공감이 갑니다
무심코 뜯은 과자봉지에서 소비의 태도를 인식하기
아주 사소하고 비밀스러운 기록 〈비닐스런 과자 팩토리〉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