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막 시작된 5월 중순, 경기도 의왕시 왕송못(왕송호수) 주변은 새들의 천국이었다. 온갖 새소리가 매우 크고 방해 없이 들렸고, 형태와 색의 세부를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눈높이에서, 꽤 오래 하나의 개체들과 만날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가마우지는 생각보다 더 까맣고 윤이 나는 도톰한 깃털을 과시하며 밭은 하늘에서 우리 주변을 우아하게 맴돌다, 어느새 물속으로 쏜살같이 꽂히더니 수면 위로 나와 물을 털어내는 한바탕의 쇼를 보여줬다. 돌고래쇼를 하는 철새라니! 그런가 하면 인근 농로를 막고 갑자기 나타난 왜가리(로 보이는) 녀석은 우리 일행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객들을 이곳으로 들일지 말지 품평을 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 역시 스쳐 지나가지 않고 눈앞에 꽤 오래 머물렀다. 비인간 생명체들이 배경으로서가 아닌, 지역사회를 사는 하나의 존재로 성큼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에 보내는 감탄사와는 또 다른 어떤 감흥과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 왕송못 둠벙과 왜가리
정착에서 표류로, 임시거처 비닐하우스에서 부른 〈월암별곡〉
의왕시를 대표하는 정체성은 아마도 ‘철도’일 것 같다. 흔히들 의왕역에 있는 철도박물관 정도를 떠올리겠지만, 역이 있는 부곡동 일대는 동양 최대 내륙물류기지로, 컨테이너터미널, 철도차량 제조공장, 철도대학 등 각종 인프라가 모여있는 국내 유일의 철도특구이다. 철도와 화물류의 산업 경관이 지배하는 철길 건너편 서남쪽에 바로 이 왕송호수가 자리한다. 원래는 농업용 저수지인데 낚시터로 유명해지면서 심한 오염에 시달렸다가 10년여 노력 끝에 130여 종의 생물이 사는 수도권 대표 생태호수로 자리 잡았다. 이 대조적인 풍경이 박찬응 르바(LBAR) 대표를 공공미술 프로젝트 〈월암별곡〉을 거쳐 문화예술교육 실험연구인 순환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왕송못 시즌 1, 2〉를 하도록 이끌었다.
“이사를 왔는데 뭐 이렇게 부조화한 동네가 있나 했어요. 한쪽으로는 화물 컨테이너, 창고들이 즐비하고 화물차들이 수시로 지나다니는데, 반대편으로는 자연이에요. 왕송못이 있고 철새가 날고요. 아홉 개의 연못이 자연 순환을 해요. 지금 가마우지들이 날고 있는데, 벌써 돌아갔어야 할 철새가 여기 정착을 해버렸어요. 저도 정년퇴직을 하면서 이제 뿌리를 내리겠다고 여기로 이사를 온 거죠.”
– 박찬응 르바 대표
그는 안양에서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를 운영하며 10년 동안 석수시장 프로젝트를 진행해오다,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군포문화재단에서 본부장으로 약 7년간 일했다. 청년 시절부터 40년 넘게 지역문화운동을 붙잡고,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연속성을 가진 공공미술, 공동체 예술 작업을 해온 작가 박찬응은 이 ‘부조화’에 감응했다. 그리고 안양, 군포, 의왕 지역 안에서 이루어졌던 십여 차례의 이주를 마감하는 최후의 정착지로 왕송못과 화물기지에 접해있는 자연부락 월암마을을 선택했다. 일제강점기 100동 규모의 철도관사마을이 있던 곳이고 지금도 원형을 간직한 집들이 몇 채 남아 있는 매력이 가득한 동네였다. 하지만 정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대에 대규모 택지개발 계획이 발표되었다.
“여기는 절대로 개발이 안 될 동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국 수용이 돼서 이사 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죠. 석수시장에서도 개발 때문에 프로젝트를 바꾸고 떠나게 됐는데 여기서도…. 80년대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하면서 사명감 비슷한 것으로 쭉 살아왔었어요. 당연히 정주를 지향했었죠. 지금은 정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코로나 이후에는 명확하게 제 작업을 ‘표류’라는 개념으로 바꾸었어요.”
이런 변화를 맞이한 상황에서 그에게 의왕 공공미술 프로젝트 감독 제안이 왔다. 철도로 분리되고 흩어진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고, 왕송못의 생태성을 확산하는 사건이 될 만했다. 철도관사마을의 흔적도 복원할 기회였다. 관사마을을 지속해서 조사해온 지역 향토연구회 활동가들과도 만나며 프로젝트의 방향과 윤곽이 잡혀갔다. 그러나 선정과정에서 보존이니 재개발이니 민감한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관사마을 이야기는 다른 장소를 찾아 경쾌하게 주민들을 만나는 쪽으로 선회해야만 했다. 2020년 하반기 그렇게 공공미술〈월암별곡〉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접근이 새로운 형식어를 발굴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차피 복원할 수 없는 장소성을 부여잡는 대신 임시거처로 비닐하우스를 세워 프로젝트의 거점이자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철도역과 왕송호수 사이에 놓인 비닐하우스는 정주하지도 못하고 지속되지 못하는 도시민의 삶의 상징이자, 이 현실을 자각하고 관심을 모으고 소문을 내는 공적 장소로서 역할을 했다. 상투화되어 기피 대상이 된 벽화는 시민적 참여가 참신한 시각적 솔루션-페인팅이 아니라 벽을 긁어내는 방식 등과 만나 반구대 암각화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을 창출해냈다.
언뜻 정치공학에 적당히 타협한 듯 보였던〈월암별곡〉은 자본과 욕망의 단단한 결합체인 개발 이슈를 함부로 낭만화하지 않는 지독한 현실주의를 드러냈다. 40여 년을 유사한 주제와 싸워온 기획자의 새로운 출구전략이자, 시대정신을 민감하게 감각하는 노련한 예술가의 깨달음의 산물로 읽힌다.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삶은 계속해서 부유하는 시대에 〈월암별곡〉이라는 노래 한편 즐겁게 불러보는 것이, 소박하지만 예술의 갈 길이고 살 길이 아닐까.
  • ‘순환랩 왕송못 시즌1: 부들 이야기’ 연구활동
하나의 세계이자 생명축으로서 ‘둠벙’
그런 방향 전환이 물리적인 장소성에 대한 부담감으로부터 시선을 거두면서 오히려 프로젝트는 보편적인 풍부함을 담고 있는 ‘왕송못’에, 그리고 탐사-관찰-채집-제작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탐색에 집중했다. 그것이 2021년, 2022년에 이루어진 순환랩 〈왕송못 시즌 1, 2〉이다. 순환랩은 아르떼가 공모한 기후위기를 다루는 문화예술교육 연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왕송못〉은 ‘시즌1 부들 이야기’와 ‘시즌2 둠벙 이야기’로 구성되어 〈월암별곡〉에서 발견된 가능성들을 실험하였다.
시즌1이 왕송못 생태습지 주변에 자라는 부들을 중심으로 자연계의 물성에 대한 탐구기반 생활기술 연구였다면, 시즌2는 전통기술인 ‘둠벙’이 논 생태계를 되살리는 원리를 도시문화 생태계에 어떻게 적용하고 구조화할지를 고민하는 형태로 진화했다.
“둠벙은 개념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예요. 어릴 적 둠벙에서 놀던 기억이죠. 논가에 조그만 웅덩이들이 있는데 그게 둠벙이었어요. 학교 갔다 오다가 둠벙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으면 맑은 하늘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너무 맑아서 그 안에 흙이며 이끼까지 다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죠. 거기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봤는데 돌 틈에서 자라 한 마리가 툭 나오더니 손을 꽉 무는 거예요. 자라가 대롱대롱 매달려 손가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죠.”
  • ‘왕송못 시즌2: 둠벙 이야기’ 답사 및 드로잉
둠벙은 가뭄에 대비해 웅덩이를 파고 돌담을 쌓아 만든 전통적인 로우-테크(low-tech) 관개시설이다. 둠벙은 돌로 쌓아 반드시 틈이 있었고, 그 틈새들이 있었기에 둠벙과 둠벙이 연결되고 생명이 살 수 있었다. 일종의 녹지축이자 생명축이었던 셈이다. 또한 둠벙은 땅 아무 데가 아니라 샘이 나는 곳에 파서 자체적인 물 공급이 이루어지게 만들었다.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는 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가을에 농부들이 둠벙에서 물을 퍼내면 장어를 닮은 ‘드렁허리’들이 우글우글했다. 상위 포식자의 존재는 둠벙의 생태적 풍부함을 상징한다. 하지만 과거에 사람들은 드렁허리가 논두렁을 다 뚫어버려서 내 논을 위해 확보한 물을 남들에게 나눠줘 버리는 괘씸한 놈으로 여겼다. 그래서 잡아먹지도 않고 패 죽였단다. 드렁허리는 허리를 들고 (물 밖으로) 허파 호흡을 하며, 뒷걸음질을 치고, 암놈으로 태어났다가 40cm가 되면 수놈으로 변한다.
“장마철 논두렁에 물이 넘쳐 물고기를 잡을 때, 고기를 몰다 보면 뭔가 발을 한 바퀴 쭉 감고 지나가는 녀석이 있어요. 드렁허리지요. 섬뜩하고 예사롭지 않은 불편한 존재, 그러나 구멍을 뚫어서 경계를 허무는 존재, 그래서 예술가와 닮아있다고도 느껴요.”
새마을운동으로 콘크리트관이 둠벙을 대체하면서 논 생태계도 피폐해지고 가뭄도 심각해졌다. 2000년대 후반 둠벙에 대한 가치가 재인식되면서 남쪽 농촌 지역에서는 새로운 둠벙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논의 생태계가 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사라졌던 드렁허리까지 돌아왔다는 소식도 들린다.
박찬응은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 문화 다양성과 기후위기에 대비하는 문화둠벙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한다.
“문화둠벙의 개념을 세세하게 살펴보면, 한 사람이 하나의 둠벙이 되고, 그 사이를 도랑으로 연결하면 삶의 둠벙 생태계가 되는 거예요. 사람, 마을, 지역으로 삶과 생활과 세계가 연결된 촘촘한 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면 기후위기로부터 지구를 살리는 활동가들의 거점을 만들어내는 긍정적 움직임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드렁허리가 30년간 숨어 있다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굉장한 희망입니다.”

지역문화 생태계를 위한 문화둠벙

논 생태계 = 아파트단지, 주거단지, 공장단지 등 도시 공간의 특정 권역

둠벙 = 주민센터, 도서관, 박물관, 문화센터, 공원, 빈집, 빈터 등 문화적 거점공간들

드렁허리 = 예술활동가, 마을활동가, 그림책활동가 등

도랑 = 둠벙과 둠벙사이의 연결망, 쌍방향 교류와 소통 가능한 통로

[출처] 순환랩 2022 〈왕송못 시즌2: 둠벙 이야기〉계획서
문화둠벙의 샘물찾기와 드렁허리의 변신술
그렇다면 문화둠벙이라는 건 어떻게 조성하고, 드렁허리는 어떻게 육성‧조직할 수 있을까. 그는 시민과 예술가의 자발적이고 협력적인 연구모임의 형태를 제안했다. 왕송못 시즌1에서는 예술가가 이끌고 시민활동가가 참여자가 되는 방식으로 운영했다가, 시즌2에서는 아예 예술가와 시민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가 연구의 내용이나 수준에 상관없이 그 결과를 그림책으로 만들기로 했다.
연구는 탐사-관찰-채집-제작-공유의 프로세스를 지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강제가 없이 오롯이 연구자에게 맡겨졌다. 누군가는 개인연구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도 하고, 누군가는 또 다른 시민을 끌어들여 공동 작업의 기쁨과 풍부한 결과물을 만드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또 누군가는 공동연구를 고집하다 팀이 와해되는 진한 실패의 경험을 하기도 했다.
  • 그림책 「우리마을 생태드로잉」(을순)
“왕송못이라는 거대한 둠벙은 신천과 금천이 유입되는 9개의 이어진 연못을 통해 숨을 쉽니다. 서로 높낮이가 다른 일종의 둠벙이 물을 채웠다 뺐다 하면서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고 의지하지요. 왕송못 순환랩에서는 시민도 예술가도 따로 없습니다. 모두가 ‘시민예술연구활동가’로 서로 배우고 연결됩니다. ‘여택, 붕우강습(麗澤 朋友講習), 이어진 연못처럼 벗이 만나 공부하니 즐겁다,’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세 명이 모이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 이 원칙을 지키며 둠벙을 만들고 드렁허리를 찾아내고 키울 겁니다.“
박찬응의 표현을 빌면, 도시 인공의 상징인 아파트도 30~40년 넘게 생명체들과 함께 살며 ‘자연화되었다.’ 반대로 인공호수에 내려앉은 가마우지나, 사람이 다가와도 아무렇지 않게 농로를 거니는 왜가리는 ‘인공화’되고 있는 것일까. 드렁허리의 변신술은 보호색처럼 자기 자신과 종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보호술의 일종일 터. 예술가도 시민도 경계를 넘나들며 변신술을 터득한다면 자신을 지키고 종족 보전을 할 수 있을까. 더불어 자신과 종족을 지키는 일이 지구를 지키는 일임을 알아챌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백현주
백현주
교육기획 및 연구자. 현실문화연구, 안그라픽스 등에서 잡지와 책을 만들며 성인 초기를 보내다 시각문화교과서 작업을 계기로 예술교육 관련 연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희망제작소와 수원시평생학습관에서 일하면서 평생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과 만나 큰 배움을 얻었다. 자유인이 된 후로는 사람들의 대체불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놀고 쉬는 데 있어서 늘 비교우위에 있는 것에 힘쓰고 있다.
hi.hjoo@gmail.com
사진·영상 제공_박찬응 (페이스북 @chaneung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