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절 시작한 영화동아리가 청년이 되어서도 ‘지역에 평등을 녹이자’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꿈을 펼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예술 활동을 기반으로 함께 기획하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세손가락 협동조합이 바로 그곳이다. 세손가락 협동조합은 2010년 강릉시영상미디어센터 프로그램 참여자로 만난 중고등학생들이 모여 ‘겨울협의회’를 결성하면서 싹을 틔웠다. 동아리 활동과 함께 자란 청년과 청소년들이 영화 말고도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의미로, 미술, 음악, 연극팀을 만들고, 자신들이 오르고 싶은 무대를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는 ‘세손가락 페스티벌’(2013~2015)을 열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함께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2022년 협동조합으로 발전하게 된다. ‘손가락집’이라는 공간을 운영하며 서로 느슨하지만 깊은 연대를 이어가면서 함께 즐겁게 놀고 존중하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안전함’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제힘으로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온 여정을 들어보고자 김준기 세손가락 협동조합 이사장을 만났다.
서로가 만들어가는 존중과 평등
‘세손가락 페스티벌’을 직접 만들고 성취한 경험은 2022년 청소년이 직접 기획한 ‘자라나라 무대무대’로 이어졌다. 소비성 무대가 아닌 스스로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프로젝트는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라난 기획자들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물이 아닐까. 이들은 청소년과 관계를 쌓고 서로를 존중하기 위한 방법으로 평어를 사용한다. 서로가 평등하다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기를 바라서다. 나이 차이가 있는데도 서로 반말을 하는 것으로 보여 주변에서 적지 않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도 했지만, 세손가락 안에서는 긍정적인 효과로 남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평어를 사용하면서, 나보다 나이가 어리더라도 의견을 주체적으로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좋았던 것 같아요. 물론 외부에서 이상하게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경험을 하는 것도 다양성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파악하고 문제나 의미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 김준기 세손가락 협동조합 이사장
누군가는 해야 할 공간 청소도 재미있게 풀어갔다. 분기마다 청소를 담당할 약속 날짜를 잡아보기도 하고, 약속한 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못 오는 사람을 생각해서, 자기가 청소한 날짜를 직접 체크하고 갈 수 있도록 문 앞에 종이를 붙여놓는 등 느슨하지만 자유로운 규칙들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와 원하는 것들을 말로 풀어나가기 힘들어진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을 위해서 이 공간에서만큼은 권리가 공정하게 나눠진 공간이 되었으면 했다. 누구나 비밀번호도 직접 바꿀 수 있고, 서랍을 마음대로 열어볼 수 있다. 말로 하지 않아도 행동으로 끌어내는 그 무엇인가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경험의 다양성을 위해 기관과 행사를 할 때 청소년이 직접 일하고 보수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다. 배우고 가르치는 청소년과 성인의 역할을 바꿔보기도 했다. 청소년이 춤과 그림 같은 자신의 재능을 성인에게 알려주는 모임을 소소하게 이어가며 자존감과 경험을 키우고 있다. 세손가락 청년들이 청소년 시절부터 쌓아온 이야기와 경험이 고스란히 지금의 청소년에게 흘러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각자가 생각하는 행복을 추구하고 즐거울 수 있는 공간. 우리가 인간성을 잃지 않고, 어떻게 다 같이 살아갈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는 공간. 이 공간 안에서는 이러한 제안들이 받아들여지고 함께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소년에서부터 청년까지 세손가락이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공간에 있었다. 눈에 보이는 공간,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공간, 서로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공간이 이들의 가치관과 개념으로 확장되고 넓혀져 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예전에 강릉에는 문화공간이 거의 없었어요. (청소년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했을 때, 지인들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었고, 일차적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환경이었죠.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간 페인트칠, 조명, 책상, 싱크대도 우리가 직접 만들었어요.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지금 제 목표는 외할머니께 김치 담그는 방법을 배워서 직접 해보는 거예요. 이 공간은 그걸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죠.”
이들은 환경이 부족하고 뒷받침되지 않는다는 것에 절망하거나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것들을 직시했고 실행했으며, 현실을 마주 보는 과정에서 세손가락은 함께 자라나고 성장했다. 한편으로 과연 이들이 이렇게 자랄 수 있었던 과정과 계기가 궁금해졌다.
“청소년 미디어 교육을 처음 받을 때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주셨어요. 불법 건축물에 관한 내용을 촬영한 적이 있어요. 시위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야 해서 어려움에 부닥쳤는데, 시위하는 분들이 도움도 많이 주고, 밥도 챙겨주셨죠.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로 상을 받아서 도움을 주신 분들께 모자를 선물한 적이 있어요. ‘미디어’라는 매개가 긍정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이들이 막연하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해야 했기에 계속하며 의미는 명확해지고 평등과 다양성에 대해 절실하게 느꼈다. 하고 싶었던 영화동아리를 할 때는 용돈을 모아서 찍는 것도 좋았지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수입을 만들지 않으면 유지하기 어려워 취업하거나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었다.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하면서 이곳을 떠났다가 돌아온 사람도 있어요. 우리가 만든 안전한 공간을 벗어나면서 서로 간에 당연하게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경험을 하고 상처를 입기도 했죠. 그래서 이 공간에서만큼은 행복하고 즐겁고 안전했으면 좋겠어요. 현실과 크게 부딪치더라도, 그 현실의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도 지금도 즐겁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나이가 들고 경험이 늘고 성장하는 한편으로 책임감도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세손가락은 앞으로 ‘사람을 남기는 일’을 목표로 활동하려고 한다. 청소년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역이 싫어져서 떠나는 것이 안타깝다. 이곳에 좋은 공동체, 좋은 친구들이 많으면 이들이 떠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다음 세대가 접할 불평등과 기후 위기, 여러 가지 문제를 어떻게 이야기하고 남겨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스스로 만드는 삶의 무대
세손가락 안에서는 완벽하지 않지만, 완전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발전하고, 없어진다.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들이 경험했던 모든 순간을 청년이 되어서도 잊지 않고 하나하나 반영하면서 자신들만의 문화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지역의 고령화 문제를 살피다가 산골 마을에 방문하여 장수사진을 찍어주는 활동을 하기도 했고, 그러면서 마을 분들에게 부모와 자녀 간 소통 방법을 배웠다. 청년 1인 가구 문제를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상품이나 식품이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포장되어있다는 점을 깨닫고 함께 농사하고 키운 농작물을 나눠 먹기도 했다. 나중에는 세손가락 마을을 만들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꿈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세손가락은 자신들만의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고 서로 나누고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의 이야기로, 누군가는 해야 할 일과 역할로 발전시키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만들어가고 있었다.
세손가락은 사회에서 막연히 일어나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과 ‘우리’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곱씹어보았다.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누군가는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절실함’에서 비롯되었다. 지금까지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절실함’을 연료 삼아 이어가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의 삶을 담는 그릇을 직접 만들어가는 노력이 이들만의 주체성을 찾아가는 방식인 것 같다. 빠르게 변하고, 완벽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누군가 해야 하는 이 ‘절실함’에 다시 한번 매료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안윤진
- 강릉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팀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꿈꾸는 사임당 예술터’에서 모두가 즐겁게 문화예술교육을 접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과 함께 노력 중이다.
painglee7@gncaf.or.kr -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 제공_세손가락 협동조합 페이스북 @3songar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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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어를 쓰는 공동체의 에피소드가 궁금해지네요
청소년에서 청년으로, 제힘으로 다양하고 평등하게 자라나다
세손가락 협동조합이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방식
기대만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