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의 시대를 살아간다. 이건 단지 매체 간 융합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 경제, 기술, 관념 사이에도 일어난다. 지식기반의 사회로 전환되기 전에는 굳이 융합을 지향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인간이 단순한 필요에 대응하면서 살아도 충분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지식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인간의 호기심은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냈다. 이런 다형식적 태도는 온갖 문명과 시스템을 개발했다. 조금 과장을 보태 말하자면 예술은 이런 융합을 주도했다. 예술가는 가능한 모든 조건을 비틀고 왜곡하는 실험적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주시하는 노력을 해왔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제안한 발상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재편되고 있는 문화적 열쇠를 제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복합성과 다형식성의 구현은 이미 예술의 모든 장르에서 일어나고 있다.
2022년 VR 드로잉 워크숍 ‘허허벌판 표류기’는 서울예술교육센터 아트포틴즈 겨울방학 시즌 프로그램 중 하나다. 임지영 작가와 올리버그림 작가를 문화예술교육의 장에 처음 초대했던 것은 2011년 창의예술캠프 ‘우락부락 시즌2’에서다. 이미 올리버그림 작가는 폐쇄회로 카메라를 다중연결하여 비주얼 프리젠테이션하는 실험과 작업을 이어가고 있었고, 카메라를 개조(또는 해킹)하거나 한가지 피사체를 360도로 촬영하고 스캐닝하여 오브제로 전사(轉寫)하는 등 다양한 형식으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임지영 작가 역시 디지털 페인팅부터 영상 작업까지 매체를 가볍게 넘나들며 작업하고 퍼포먼스화 했다. 두 작가는 자신의 작업에서 자연스러운 융합과 크로스오버를 구현하고 있지만 본격적으로 문화예술교육에 참여하고 있지는 않았다. 작업이 교육 콘텐트로 전환되는 기회가 예술가를 초대하는 방식이 아닌 지원사업 참여만 있었다면 ‘허허벌판 표류기’ 같은 프로젝트가 시도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매체 활용과 창작, 그 경계 위에서
시작은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1년 서울예술교육센터에서 VR 드로잉 워크숍을 열었을 때부터다. 대면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이 워크숍은 청소년에게 꽤 많은 응원과 관심을 받았다. VR을 경험할 수 있는 디바이스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설계된 세계 안에서의 사용자에 만족하지 않고 창작 의지를 가지고 예술 경험을 원했을 때 딱 들어맞는 워크숍이었다. 가상현실 속에 들어가서 평면에 그려지는 드로잉(한 예로 최근 출시한 도구인 페인팅VR은 직접 붓으로 캔버스에 그리는 느낌)이라기 보다는 3차원 입체 공간 안에 물질을 채워 넣는 듯한 구조를 설계해야 하는 3D 드로잉을 시도했다.
워크숍은 비교적 쉽고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운영했다. 2D로 구상안을 작업하고 VR의 조작방법을 익힌 후, 3D로 구현하는 작업이다. 어찌 보면 허허벌판 표류기의 기초워크숍 같았다. 드로잉은 틸트 브러시(구글 3D페인팅 툴)를 주로 사용했다. 참여한 청소년마다 가지고 있는 조건에 따라 디바이스 접근에 차이가 생기기도 했다. 디지털 네이티브답게 거부감은 거의 없다지만 VR멀미(VR sickness)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는가에 따라 가상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다르다. 또한 동일한 공간에서 여러 명이 3D 드로잉을 시도하기 때문에, 설계한 디자인을 구조화하는 과정에서 규모에 대한 기초감각에 따라 공간감을 구현하는 방식에서도 차이가 나타난다.
워크숍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아쉬운 점이 드러났다. 수많은 VR 체험 워크숍이 그러하듯 한번 해보는 것에 만족도는 높다. 하지만 창작 과정의 일부로 새로운 매체를 적극 수용하는 방식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생긴 아쉬움에 가깝다. 워크숍이 VR 체험관 같은 콘텐트는 아니었지만, 매체 활용과 창작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서 끝을 맺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때 메타코리아(meta, 이전 페이스북)에서 찾아왔다. 오큘러스(VR 관련 기기)를 제작‧판매하고 콘텐트를 만들어가는 기업이니 VR기기 워크숍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으나, 그들의 이야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이미 큰 비용을 들여 새로 출시를 기다리고 있는 VR 콘텐트와 기기를 개발 중이지만 딱히 의미 있는 ‘예술교육’으로 VR 워크숍이 기획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즐거운 예술창작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그들의 생각과 가장 가까운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교육기획자인 내가 느끼는 매체 활용과 창작 교육 사이에서 느끼던 그 모호함에 대한 숙제 같았다.
워크숍에 참여한 청소년은 메타버스를 만났을 때, 즉 벌판에서 무엇을 창조(또는 창작)하려 했을까. 처음에 청소년들은 무엇을 창조하려 들기보다 어떤 과업이나 과제 없이 놀고 싶어 했다. 특히 함께 놀 때 그 즐거움이 배가되었다. 오히려 실제 공간에서보다 활발하다. 함께 참여한 청소년들과 오프라인에서 어색해하던 모습은 가상의 상황에서 상호 의사소통하려 노력하거나 원활한 표현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신선하다. 추정하건대, 오프라인에서는 특정한 의사소통 규칙이나 매너가 요구되는 암묵적 통제에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은 아닐까. 이 경험은 무엇을 창조하기에 앞서 그런 놀이를 통과하면 창작 의지가 발현하는 경로가 된다. 더구나 메타버스에서는 이미 경험하거나 소프트웨어가 제공하는 놀이 말고 자신이 선택한 모험의 방향으로 향한다. 엄청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불 속에 뛰어들고, 같이 하늘을 날아가면서 현실에서 불가능한 아이디어로 창작 과정에 몰입한다. 신기하게도 이런 사건(공동경험)을 함께 경험한 후에 친밀감이 진전된다. 창작 동기 역시 이 놀이 경험으로부터 촉발된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허허벌판 3차원 공간에 표류하기
현재 우리는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AR, XR), 가상공간(metaverse)이라는 용어들을 자주 쓰며 때로 익숙하게 현실에서 사용한다. 더구나 청소년은 디지털화(digitalized)한 콘텐트에 매우 익숙하다. 의사소통이나 상거래방식까지도 자연스럽다는 것이 디지털 네이티브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주도권이 사용자에게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 아마 ‘콘텐트 이용자’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이 이 사이에 창작을 제안하면서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시작한 작업이 허허벌판 표류기다. 우선 2021년 VR 드로잉 워크숍으로 저작도구와 기기사용에 대한 지도는 가지고 출발했다. 그리고 가상공간에 대한 설정을 허허벌판으로 정의했다. 세계관을 설정하기 위한 안내 역시 디지털 네이티브에게는 익숙한 방식이기에 큰 어려움은 없다. 이미 공간은 있지만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던 곳에 무엇을 건설하고, 어떻게 살아가며, 누구와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진다. 작가(예술교육자)는 안내와 조언의 역할을 맡지만 공간 안에서의 창작에 관한 모든 권한은 개별 참여자에게 넘겨준다.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창작자 개인의 생각, 관념, 사상 그리고 세계관이 가상공간으로 구현된다. 예술가가 자신이 경험한 세계와 상상력을 작품으로 구현하려는 것과 같이 말이다.
어떤 참여자는 꽃을 심고 밭을 가꾸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꽃다발을 만들어 책상을 꾸민다. 꽃이라는 오브제는 같지만 꽃으로 만들어가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는 오브제를 스캔하여 가상공간에 배치하거나, 인형의 크기를 변형하여 현실 공간에서 느낄 수 없는 감각적 경험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소리를 배치하기도 하고, 걷거나 날아다니면서 개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3D로 상상해야 하기 때문에 기존 평면 드로잉으로만 상상하면 불가능하던 표현이 가능하다. 핸들을 잡고 움직이는 드로잉은 현실에서는 그저 몸짓으로 끝나지만, 그 몸짓의 결과로 공간이 채워지면서 참여했던 청소년들과 작가들 사이의 작품 설명이 오간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서로 다른 곳을 향해 앉아 있지만 바라보는 곳이 같다는 점은 재미있는 작업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워크숍이 진행되는 동안은 이 가상공간을 스크린으로 함께 볼 수 있기 때문에 참여자 간에 일어나는 소통방식도 오프라인으로 실시간 중계되면서 즐거움을 더했다. 허허벌판에서 가상공간에 조형성을 가진 설치작품과 사람이 사는 마을 혹은 도시를 만들어가면서 표류하는 프로젝트다.
혁명이 아닌, 일상적 예술교육으로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었다. 혁명은 단숨에 권력, 제도, 경제 등 근본적인 것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꽤 무거운 어감을 가진 어휘이기도 하고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수시로 혁명이고 혁신을 말한다. 쉽게 무너진다면 이미 근본적인 것일 리 없다. 시대(era)를 말할 만큼 경험이 누적되지 않았음에도 대중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의도를 가지고 접합하는 것을 경계하자. 문화예술교육에서 4차 산업혁명이 근거 없는 괴담처럼 번지지 않기를 바란다. 아동과 청소년에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세계에 신앙심을 갖고 따르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장르 간 컨버전스가 굳이 요구되지 않는 순수예술이 있지만, 이미 융합 없는 예술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예술은 매체의 속성을 종단(전수되는)하고 테크놀로지의 범용적 가능성을 횡단(수평성)한다. 한마디로 종횡무진하는 사람이 예술가다. 자칫 문화예술교육에서 공산품을 조립하는 것이 아트인 것으로 포장되는 상황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수많은 예술가는 테크놀로지와 지식과 정보를 순환시켜가며 자연스럽고 적극적으로 크로스오버를 실행하고 있지만 대량생산(이를 확산이라고들 표현하더라)을 목적으로 하면서 생기는 폐해가 만만치 않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회로도 읽고, 코딩하고, 센서와 와이어리스 컨트롤러를 보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융합교육”이라고 외칠 준비를 하면 곤란하다.
기술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인식의 태도를 바꿔놓기 때문에 또 다른 형식과 내용을 가진 창작의 기반이 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창작은 어떤 주체를 상정하기 때문에 앞으로 새로운 기술 출현이 앞으로의 예술, 또는 창작의 의미를 어찌 바꿔놓을 것이라고 정의할 순 없다. 하지만 예술가가 새로운 기술을 만나면, 새로운 작업을 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허허벌판 표류기는 매우 특별한 프로젝트가 아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이 자연스럽고 익숙하고 즐거운 매체 경험을 쌓아가며, 예술가와 가상공간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일상행동에 가까워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문화예술교육이 마치 평생 한 번의 기회인 것처럼 특별함을 강조하려 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디지털 네이티브에게 디지털이 일상이라는 그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을 저해하지 않는 교육기획의 태도가 더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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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츠포틴즈] 2022 겨울시즌 프로젝트_VR 드로잉 워크숍 허허벌판 표류기
- 김탕
- 사진찍고/드로잉하고/잡지 만들고/전시기획하면서 삽니다.
페이퍼컴퍼니어반 큐레이터
사)유스보이스 수퍼바이저
전 아트포틴즈 디렉터
2021, 2022 순환랩 디렉터
www.zoinno.com
사진제공_서울문화재단 서울예술교육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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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종횡무진하는 예술가! 앞으로도 그 동력을 잃지않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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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과 청소년에게 기술과 과학과 예술이 공존하는 세계에 신앙심을 갖고 따르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AR, VR을 활용하여 일상적인 예술교육을 추구한다는 점이 넘 인상적이었어요! 하이테크 시대에서 중심을 잘 잡고 예술교육을 실행하는 노력에 감동입니다~
가상공간을 예술로 종횡무진하는 일상은 가능할까
‘허허벌판 표류기’와 디지털 네이티브를 위한 예술교육의 태도
공감이 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