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몸담은 단체에서는 해마다 ‘야생동물 탐사단(야탐단)’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깊은 산을 사람들과 꼬박 일주일 넘게 걸으며 야생동물 흔적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이다. 코로나19 이후 잠정 휴업상태로 들어가 좀처럼 참여할 기회가 없었는데 작년 11월, 행사를 기획하던 동료 활동가의 제안으로 함께하게 되었다.
1박 2일이라는 짧은 일정, 동료 활동가는 평소와 다르게 둘째 날에 ‘딥타임워크(Deep Time Walk, 지구 시간 걷기)’를 넣어보고 싶다고 했다. 딥타임워크는 46억 년 지구의 역사를 4.6km의 거리로 환산하여 지구의 탄생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사건들을 설명하는 프로그램이다.
  • 녹색연합 야생동물 탐사단
“글쎄. 두 프로그램이 서로 어울릴까?” “나도 그걸 잘 모르겠어. 근데 꼭 같이해보고 싶어.” 이유를 물었더니 동료 활동가는 그동안 비슷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오며 느꼈던 답답함을 이야기했다. 그가 시민들에게 안내해온 현장들은 주로 기후 위기로 죽어가고 있는 고산지대의 침엽수나 대형 산불로 새카맣게 타들어 간 숲, 산불과 개발로 인해 살 곳을 잃어가고 있는 야생동물의 서식지였다. 활동가로서 이런 현장에 가서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지 설명할 때마다 ‘이게 다 인간 때문이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게 항상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그러면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잖아. ‘인간이 문제니까 다 사라져야 해!’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 이번 야탐단의 거창한 목표였다.
토요일 오후, 15명의 참가자와 4명의 스태프가 둥그렇게 원으로 모였다. 첫날은 4시간 정도 근처 계곡을 따라 산행하며 야생동물의 흔적을 찾고 야장에 기록했다. 폭이 좁은 산길에 바로 옆은 깎아지른 경사, 쉽지 않은 코스지만 중간중간 마주치는 야생동물의 흔적에 사람들은 경탄하며 멈추어 섰다. 동물들이 바로 이곳에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양, 노루, 고라니, 삵, 담비, 멧돼지의 똥. 똥을 발견할 때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을 귀히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야생동물로 꽉 찬 첫째 날을 보내고, 둘째 날이 밝았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사람들과 함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부터 지구의 시간을 두 발로 직접 걸어보려고 해요. 46억 년을 4.6km로 환산했으니, 우리의 한 걸음은 대략 50만 년쯤 될 거예요. 100m는 1억 년이고요. 100년을 채 살지 못하는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시간이죠”
  •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무인카메라
지구의 탄생과 변화를 걷다
4.6km 여정의 시작점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구의 탄생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행성 지구가 46억 년 전, 초신성의 잔해로부터 태양과 함께 만들어졌다. 초신성 폭발의 엄청난 온도와 압력이 철과 같은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어냈다. 그 잔해가 뭉쳐져 만들어진 게 바로 지구와 우리의 몸이다. 생명은 별의 원료로 만들어졌다.
‘대체 이게 뭔 소리람?’ 어제까지 야생동물에 빠져있다가 갑자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시작하니 모드 전환이 쉽지 않다. 그래도 일단 길을 떠난다. 오순도순 수다 떨며 걷다 중간중간 멈춰 서면 설명이 이어진다. 100m를 걸었을 때 달이 탄생하고, 200m를 걸으면 땅(지각)이 생겨나며, 300m 지점에선 하늘(대기)과 바다가 생겨난다. 뜨거운 마그마의 바다 상태였던 지구가 천천히 식어간다.
생명이 탄생한 건 1km를 채 걷지 못하고다. 38억 년 전, 여러 원소가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며 만들어진 RNA라는 복잡한 구조의 유전물질이 작은 기름 거품에 들어가 최초의 원형 세포를 만든다. 우연의 산물이라고 보기엔 복잡하고, 생명이라 부르기에는 단순한 유기체. 살아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세포로부터 나왔다. 여기에서부터 생명은 분화하여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갔다.
생명이 탄생하였으나 우리가 친숙히 여기는 형태가 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생명은 지구 대부분의 시간 동안 단세포 형태로 존재했다. 동물이 출현하려면 3km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수십억 년의 시간 동안 지구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다. 소위 세균이라 불리는 이 단세포 생물들은 기나긴 시간 동안 광합성, 산소호흡과 같은 여러 가지 기술을 개발해낸다. 위기의 순간을 넘기기 위해 여러 세포가 함께 공생하여 복잡한 구조의 생명 형태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탁 트인 풍경의 산길을 지나 수북이 낙엽이 쌓인 숲속에 들어섰다. 마지막 500m는 일어난 사건이 많아 자주 멈추어 서야 한다. 앞의 세균들이 축적해온 지혜를 통해 생명은 다채로운 모습으로 창발하기 시작한다. 동물, 식물, 균류의 분화,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가 순서대로 펼쳐진다. 삼엽충이 번성했던 어류의 시대라 불리는 고생대를 지나, 공룡의 시대인 중생대, 포유류와 속씨식물의 시대인 신생대에 이른다. 다섯 번의 대량 멸종 사건이 발생하고, 그때마다 생명은 위기의 순간을 맞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명은 더욱 다양해지고 복잡해진다.
여정이 거의 마지막에 다다랐다. 도착지를 7m 앞에 두고 숨죽이며 두 발로 걷는다. 700만 년 전, 인류가 침팬지로부터 갈라져 나온 시점이다. 인류의 조상은 숲에서 나와, 두 발로 초원을 걷기 시작한다. 마지막 100만 년을 설명하기 위해 1m짜리 자를 꺼내어 든다. 자의 눈금을 가리키며, 가장 최근에서야 지구에 나타나게 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 신석기 시대와 농업혁명, 그리고 산업혁명이라는 사건이 모두 1m 자 안에 들어있다.
두 시간 동안 걸었던 거리가 무색할 만큼 산업혁명 이후의 시대는 0.2mm 길이로 찰나와 같이 짧지만 우리는 그동안 지구의 많은 것들을 변화시켜 놓았다. 6차 대멸종, 인류세, 기후위기… 여러 수식어로 불리는 시대다. 전 생물종을 위기에 빠뜨린 주범으로 ‘인간’이 지목된다. 하지만 이런 비관적인 이야기를 또 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에겐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지구에서 인간의 위치(역할)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 야생동물의 흔적 (왼쪽) 산양 똥, (오른쪽) 산양 뿔질 흔적
생명의 중심이 아닌 일부분으로
“4.6km의 여정이 인간으로 끝났지만, 그렇다고 오해하시면 안 돼요. 인간은 결코 만물의 영장이나 생명의 중심이 아니고, 생명이라는 유서 깊은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해요. 지금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생물 종이동등하게 진화해왔어요. 인간이 가장 고등한 생명체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그렇다고 우리 존재가 갖는 경이로움이 결코 줄어드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의 우리가 있기 위해 얼마나 장구한 역사가 있었는지 떠올려 보세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신성하고, 축하해야 마땅한 존재인지 생각해보세요. 우리 앞에 존재했던 수많은 생명의 모험과 시도, 용기의 산물로써 선사 받은 삶이라는 선물을,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까요? 선물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해요. 하나의 생물종으로서, 지구 안에서 우리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질문은 열려 있다. 답은 각자 찾아야 한다. 내가 어렴풋이 떠올린 대답은 더이상 죽이는 것이 아닌 살리는 역할이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인간이 앉아 있던 시대는 끝났다. 인간이 중심이 아닌 생명이 중심이 되는 시대로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비가 그쳤다.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한 묘한 기분을 간직하고 둘러앉아 소감을 나눈다. 한 이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지구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지난 이틀 동안은 지구 안에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평소에는 인간만 사는 세상 같지만, 어제 본 것처럼 지구에는 고라니, 산양, 담비도 살아가고 있다. 산양의 존재에 기뻐했듯, 우리의 존재에도 기뻐할 줄 알아야 한다. 산양도 우리도 모두 지구가 만들어낸 신성한 존재이니 말이다. 존재에 깃든 신성을 회복하는 길이 바로 멸종을 막는 길이지 않을까.
  • 무인카메라에 기록된 야생동물
이다예
이다예
녹색연합 활동가. 천문학을 공부하다가 기후 위기를 알고 나서 활동가가 되었다. 빅 히스토리, 우주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고 있다.
nightsky@greenkorea.org
사진제공_녹색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