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예술교육 경력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부분 “꽤 오래 하셨네요. 뭐, 이제 베테랑이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그때마다 ‘베테랑’이라는 말과 ‘예술교육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예술’에 담긴 의미처럼 ‘예술교육’ 또한 다양하고 늘 새롭기에 베테랑이기보다는 새로운 도전 앞에서 벌벌 떠는 새내기였던 기억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물론 수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데 15년 경력이 가진 힘은 언제나 나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지만 베테랑이 아닌 새내기의 위치에 있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성장과 배움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 자신을 새내기 예술교육가의 위치로 내몰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연극수업을 위한 여정
초등학생들에게 셰익스피어 문학을 수업한다고 하면 대부분 첫 번째 질문이 “초등학생이 어려운 셰익스피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긴 여정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주최한 ‘A-Round’ 사업에 참여하며 실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무모하리만큼 당찼던 도전 덕분에 동료들과 함께 영국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2017년 11월, 스트랫포드-어폰-에이본(Stratford-upon-Avon) 기차역에 내렸다. ‘로얄셰익스피어컴퍼니’(Royal Shakespeare Company, 이하 RSC)이라고 새겨진 빨간 벽돌 건물을 보자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이곳에서 셰익스피어 희곡을 쉽고 재미있게 탐구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교차했다. 그렇게 행복하고 불안한 떨림으로 시작한 첫 발자국은 나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RSC의 셰익스피어 지도자 양성과정(Certificate Teaching Shakespeare) 초급과정을 마친 후 ‘한국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셰익스피어 희곡을 아이들과 나누고 싶다’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단지 공연을 위해 대본을 외우는 연극 수업이 아니라 작품 안에 담긴 인간 군상들과 인간의 욕망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싶었다.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중급 과정을 이수했다.
초급과정은 ‘A-Round’ 사업에 지원받아 동료들과 함께 참여했지만, 중급 과정은 홀로 워크숍을 들어야 했다. 의지할 사람도 없고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불안했다. 중급 과정은 초급에 비해 더욱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워크숍 과정 전체를 세세히 이해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때론 선생님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나 혼자 엉뚱한 활동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런 순간마다 너무 부끄럽고 힘들어서 ‘왜 여기까지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그냥 그만두고 가버릴까?’ 생각하며 남몰래 눈물을 꾹 참기도 했다. 그때마다 미국에서 온 수강생 크리스티나가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주었다. 그리고 마리나 선생님은 워크숍 과정이 담긴 대본과 활동지를 수업 전에 나에게만 먼저 주시며 워크숍을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미리 받은 대본과 활동지를 밤새 한국어로 번역하고 작품 안에 담긴 어려운 고어를 하나하나 찾아가며 공부했다.
셰익스피어 지도자 양성과정을 이수한 후, RSC의 교육 방법론을 기반으로 초등학생들과 『맥베스』 수업 진행하고 그 과정을 논문에 담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2017년부터 시작된 여정이 2021년에 막을 내렸다. ‘과연 셰익스피어 작품을 초등학생과 수업할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으로 시작했던 그 발걸음에 마침표가 찍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문학은 어려워서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라는 토씨 하나 바뀌지 않는 사람들의 반응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와 지식도 갖추게 되었다. 만약 현실에 안주하고 그냥 <팥죽할멈과 호랑이>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만을 반복했다면 RSC의 워크숍도, 대학원 졸업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도전이 만드는 기회, 기회가 주는 도전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다양한 문학작품을 기반으로 예술교육을 시작한 것을 계기로 문화예술교육 ODA 베트남 사업 문학(연극) 분야 강사로 참여할 수 있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ODA 베트남 사업에 참여하며 셰익스피어의 『햄릿』부터 베트남 문학까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학작품을 다루었다. 베트남에서 현지 교사(매개자)와 소수민족 학생들을 만나 수업하며 한국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최근에는 동료들과 함께 한국의 ‘옛이야기’를 토대로 초등교사와 예술교육가가 수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이야기 극화’를 기반으로 구성된 책을 출판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새로운 도전이 나에게 예술교육의 고유한 색을 만들어주었고 ‘학교 예술강사’라는 범위에서 벗어나 다양한 작업을 할 기회와 폭넓은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부분 예술교육가는 한 해에 수많은 수업과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을 개발한 후 항상 ‘이 방향이 맞는가? 프로그램이 잘 구성되었는가?’ 하는 고민이 있기 마련이다.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안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방법은 늘 제자리걸음이었고, 누군가에게 프로그램에 대해 피드백을 구한다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TAT LAB’(Teaching Artist Training Lab)의 해외전문가 연계 연수가 2017, 2018년에 개설되었다. 해외연수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똑같은 연수에 두 해에 걸쳐 참여했다. 빅아이디어, 형성평가, 학습 체크포인트 등 처음에는 생소하게 느껴졌던 TAT Lab의 개념이 연수를 거듭해서 듣고 나니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2019년 아르떼 아카데미에 시애틀 TAT LAB 국외 연수 지원 과정이 개설되었다. 영국에서의 경험과 배짱을 믿고 도전해 시애틀에 있는 TAT LAB을 직접 방문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은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다시 가져다주는 ‘뫼비우스의 띠’ 같았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니 그동안 경험해보지 않았던 또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TAT LAB 연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튜닝 프로토콜’ 과정에서 미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장르의 TA와 함께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배울 수 있었다. 덕분에 10년 넘게 풀리지 않았던 고민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동료 연수생들과 함께 몇 개월에 걸쳐 후속 모임을 진행했고, 이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학교 현장에서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이 시간을 통해 TAT LAB의 개념과 튜닝 프로토콜 과정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아르떼 아카데미에서 예술교육가를 대상으로 <해외전문가 K-TAT LAB-튜닝 프로토콜 연수>를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나 개념이 있다 하더라도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고, 직접 현장에서 부딪치며 좌충우돌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연수에서 배운 좋은 프로그램, 개념, 책을 통해 알게 된 다양한 활동을 따로 정리하고 현장에 직접 적용해보며 체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러자 나만의 ‘문화예술교육 자산’이 점점 늘어났고, 활동 분야도 점차 확대되었다.
예술가? 교육가? 예술교육가!
RSC 워크숍과 TAT LAB 연수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동안 고민했던 나의 정체성 ‘나는 과연 예술가인가, 교육가인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해외에서 만난 TA, AT들은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예술가’가 대다수였다. RSC에서 만난 크리스티나는 당장이라도 무대에 올라가면 배우로 변신하여 무대를 장악할 것 같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자기 작품을 늘 고민하며 학생들과 ‘시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에 영감을 받는다는 TAT LAB 짝꿍 폴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예술가인가, 교육가인가 하는 이분법적 사고 대신 ‘예술교육가’라는 말 그대로 예술가와 교육가의 교집합에 있는 그 특별한 작은 공간이 나만의 정체성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관객을 만나며 배우로서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2009년부터 시작되어 진행형에 있는 나의 ‘예술교육의 길’을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도전, #뼈를 깎는 고통, #기회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안에서 나와 함께 도전하고 고통을 나누며 기회를 만들어 간 소중한 동료들(유은정, 안용세, 차화연, 한지혜)이 있다. 나 혼자 했다면 절대 할 수 없었을 힘든 시간을 함께 견뎌준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고 있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기대된다. 지금 당신 옆에 이 길을 함께 걸어갈 동료가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바로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당장 그 사람과 함께 새로운 도전을 해보길 권한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시간만 쌓인 경력이 아니라 새로운 도전 앞에 ‘새내기’로 돌아갈 ‘도전의 고통’을 즐길 용기가 있다면 수많은 기회의 문이 열리리라 생각한다.
- 이윤미_예술교육가(연극 분야)
- 연극이 가진 힘을 믿는다. 드라마와 씨어터를 통해 아동·청소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만나며 열정을 불태우는 예술교육가이다. 학부로 연극연기를 전공하고 석사로 교육연극을 공부하였다. 현재 학교 문화예술교육 15년 차이자 중부대학교 문화예술교육사 강사로 활동 중이다.
leiin@naver.com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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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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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이윤미 강사님과 비슷하게 10년전 영국 Leeds University에서 Theatre and Global Development 과정을 졸업하여
실어주신 여정을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졸업 후 배운 것을 다 쏟아내지 못한 저라
멋있게 도전하고 계신 모습에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가 됩니다.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문화예술교육가로 성장하기까지 궤적을 함께 살펴본 듯합니다.
새내기의 마음가짐으로 매번 새롭게 시작하려면 용기가 필요할 것 같아요.
좋은 경험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내기의 호기심으로 베테랑의 배짱으로
어쩌다 예술쌤⑱ 예술교육가의 배움과 성장
공감이 가네요
새내기의 호기심으로 베테랑의 배짱으로
어쩌다 예술쌤⑱ 예술교육가의 배움과 성장
기대만점입니다
이윤미 예술교육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멋진 여정을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고, 또 감동이었습니다. 이윤미 선생님의 앞으로의 시간들도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됩니다. 이윤미 선생님 힘내세요!!
나에게도 도전의 고통을 즐길 용기가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