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단 한 순간도 침묵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파랑을 만들어 내며 부서지고 높이 튀어 올라 출렁이는 흐름을 자아낸다.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바다가 스스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허공을 휘젓는 바람, 땅 아래 깊은 곳에서부터 생동하는 울림, 우리는 흔들리는 바다의 표면부를 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힘을 짐작할 뿐이다. 단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 그럼에도 인간은 디딜 곳 하나 없는 이 바다를 동경했다. 저 너머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란 확신, 그 과정에서 틀림없이 성취해 나갈 목표들. 바다는 육지완 달라 지나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저마다의 길을 개척한 항해자들은 종이 위에 스스로가 일궈낸 길을 기록하였고 몇몇 활자는 물리적인 시간을 넘어 현재에 도달하였다. 문제는 그들이 기록한 발자취를 어디에서 볼 수 있느냐이다. 우리가 전달받은 이야기가 과연 전부일까. 우리에게 도달하기 이전, 유실된 수많은 이야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아카이빙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수많은 창작물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무엇을 어떻게’란 질문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제는 무분별한 수취가 아닌 목적성 있는 채집이 중요한 시기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유의미한 파랑을 모아가는 새로운 움직임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청년의 이야기가 침몰하지 않도록
인천 중구에 위치한 ‘시작공간 일부’는 문화예술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과 실제로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청년 창작자 및 기획자를 위해 운영되는 공유 공간이다. 인천시와 인천문화재단 그리고 매년 공동 운영단을 선정하여 거버넌스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데, 만 19세부터 39세 사이 청년이라면 누구나 ‘일부’의 공간을 이용할 수 있으며 관련 사업에 지원할 수 있다.
올해 3회차를 맞이한 <항해일지>는 시작공간 일부에서 주관하는 아카이빙 사업으로 단순히 문화재단의 활동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청년 창작자의 문화예술 출판 기록물을 모으는 프로젝트이다. 프로젝트를 통해 수집된 기록물은 시작공간 일부 내의 아카이브 공간인 ‘나침판’에 소장되며 청년들의 창작활동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서 모두에게 제공된다.
우리는 모두 수많은 파랑의 수면 위에 선 이들이다. 파도를 온몸으로 맞아 서서히 부식되어가기도, 바다가 직조한 흐름을 가르며 새로운 물길을 개척하기도 한다. 부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는 항해자들이다. 앞서 말했듯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바다는 수많은 이야기를 물속에 침몰시킨다. 지금도 발화 중인 수많은 이야기와 그것에서 파생된, 말 그대로 개인의 <항해일지>들이 단순히 일회적 발언으로 떠내려가지 않게 그들의 이야기를 붙잡아 두고 모아 공간에 아카이브 하는 것이다.
더 많은 만남으로 이어지도록
<항해일지>의 특별한 점은, ‘청년이 만든 책’을 단순히 수집만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이미 발간된 ‘책’이란 결과물을 모으는 것이지만 이를 매개로 새로운 과정을 도출해 내려는 데서 유의미하다. 지면 너머의 창작자들과 좌담회를 통해 직접적인 만남을 도모하고 인터뷰 영상을 제작하여 단순히 기록만이 아닌 창작자에게도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인터뷰에 사용된 질문 역시 천편일률적 물음이 아닌 선정된 출판물의 원고를 공동운영단이 읽고, 동시대에 창작을 함께하는 창작자로서, 혹은 독자로서의 궁금증을 적어내어 선정기록에 더욱더 면밀히 다가가고자 하였다.
또한 ‘수봉도서관’ ‘한국근대문학관’ 인천아트플랫폼에 위치한 북카페 ‘인천서점’ 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항해일지 전(展)》을 진행하여 내부에서 마감되는 것이 아닌 외부로 나아가 시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도록 프로젝트를 확장하였다. 좀 더 많은 이에게 <항해일지> 프로젝트를 통해 창작자들 그리고 그들의 작업물을 보여주고 싶은 바람이었다. 특히 시작공간 일부에서뿐만 아니라 수봉도서관에 도서 등록이 되어 좀 더 많은 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단순한 소장이 아닌 그들의 손에 확성기를 쥐여준 것이다.
선정된 창작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좌담회에서의 만남은 창작자 간의 유의미한 네트워킹으로 연결되었고 새로운 창작의 발화점이 되기도 하였다. 지역 내에 이토록 많은 창작물이 있고 여러 창작자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었다는 의견도 지배적이었다. 촬영한 인터뷰 영상은 창작자 개개인이 본인과 기록물을 홍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도서전을 통해 선정기록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많았다는 후문도 들려왔다.
발전하는 아카이브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이렇게 적극적인 형태였던 것은 아니다. 사업 초기에는 인천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출판 기록물 들을 모으는 데에만 그쳤다. 물론 소정의 자료 구입 사례비와 청년 창작자의 굿즈, 홈페이지와 SNS를 통한 홍보 등 리워드가 있기는 하였지만, 지금의 형태에 비해서는 그 움직임이 다소 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올 연초부터 많은 회의를 거치며 기획 단계에서부터 사업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좀 더 의미 있고 다양성을 위해서 사업의 확대는 불가피했으며 단순히 아카이빙하는 것을 넘어서 작가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혜택이 필요했다. 자신의 콘텐츠를 좀 더 알리고 창작자들의 네트워킹을 도모할 기회도 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오갔다. 지난해 ‘인천, 청년, 문화, 창작, 시작, 공간, 일부’로 흩어져 있던 키워드들도 ‘인천/공간, 청년/시작, 문화/창작, 일부’ 이 네 가지로 함축하여 정리하고 선정 건수도 7건에서 12건으로 지난 사업보다 확대되었다. 장르에서도 만화, 프로젝트 도록, 독립 출판물, 잡지, 에세이 등 다양한 형태가 눈에 띄었다.
‘인천/공간’에는 책을 하나의 장소로 상정하고 김제원 작가의 장소 특정적 작업을 지면 위에 재가설한 프로젝트 북 『The Thride Space』와, ‘행궁동’이라는 동네 이야기를 수집하고 참여자 개개인의 장소 사용 방법론을 담아 도시 놀이로 제안한 조은하 작가의 시민참여형 공공미술 프로젝트 아카이브 북 『행궁, 경』, 한번 쓰이고 버림받는 사회에서 일회용이 다회용이 되기 위한 시도와 서로 살리고 상생하는 한아름 작가의 친환경 연극의 시도가 담긴 과정 기록집 『플라스틱 파라다이스』가 선정되었다. ‘청년/시작’에는 환경에 관심은 있으나 선뜻 시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여섯 명의 작가(김한솔이·히조·요니킴·고양이다방·고센·메르시온)가 각자의 그림과 일상 속 습관을 기록한 『적당히 불편하게』, 미숙했던 사랑, 처음 겪은 쓴 사회생활, 커갈수록 담담해지는 고백 등 10년이 넘는 손소정 작가의 기록을 모은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책을 사랑한 나머지 납작한 책갈피가 되어버린 북 에디터 김먼지 작가의 하소연 에세이 『책갈피의 기분』이 뽑혔다.
‘문화/창작’에는 요리의 레시피처럼 네 작가(이유림·이유진·조유정·김명지)의 미술 작품 제작 방법을 정리한 책 『작가의 레시피』와, 기술의 발전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산업을 매개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원동력과 마음에 관해 질문하는 박범수·박성희 작가의 잡지 『Baton 1호』, 심심한 평화로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마음을 만화 형태로 재치 있게 시도한 김수진 작가의 『녹색마음 녹구』가 들어왔다. 마지막 ‘일부’는 위 키워드에 속하지 않는 다양한 책을 지칭하는데, 한 여성에게 일어난 성폭력의 일상성과 그 치유기를 기록한 리퍼와 가시눈 작가의 만화 『At last 이제야 흉터가 말했다』, 직장동료로 만나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미미 작가의 그래픽 노블 『궁전원룸 1층 주인세대』, 교육이 좋아서 모인 ‘틈페이지’ 청년 교육자 6인(주디·하니·소피아·슈·조이·베티)의 성장 과정을 담은 에세이 『교육은 좋지만 가르치긴 싫어서,』가 선정되었다.
새로운 좌표의 지정
물론 아쉬움도 있었다. 프로젝트를 통해 선정기록에 관심 갖는 이들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하였다. 독립출판물이 주를 이뤘고 비매품도 있었기에 구매를 원하는 이들에게 적절한 유통망을 안내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기한 내 도서를 대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도 아쉬움이 컸다. 기록물의 특성상 읽어 나가는 데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한데 단순히 전시 방문만으로는 그 물리적 시간을 채워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차후 사업이 더욱더 확대되어 적절한 유통망 안내와 더 많은 도서관에 소장된다면 창작자에겐 자신의 콘텐츠로 이익을 창출할 기회가, 시민에겐 더 가까운 장소에서 기록물을 접하고 종이 위에 아로새겨진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
그래도 긍정적인 점은 프로젝트의 실행이 아직은 초기라는 것과 그럼에도 유의미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아쉬운 점은 채워가면 된다. 일부의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지면 위로 아로새긴 그들의 이야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단순히 지역을 넘어서 지금 세대의 시선과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시간은 바다와 같아 침묵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흐름을 만들어 시대를 자아낸다. 그 속에서 동시대를 유영하는 수많은 청년이 개척하는 항해 길은 방향을 가로막는 물결을 과감하게 가르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뱃머리에서 갈라진 물살은 새로운 파도를 만들어 낼 것이며 그 파도는 기점에서 멀어질수록 더욱더 거대해질 것이다. 청년은 인생의 주기이다. 우리 모두 청년이 되고 청년을 지나 나이를 들어간다. 그들의 생동하는 발화점의 열기를 느낀 청소년들도 작은 종이를 접어 스스로의 이야기를 적어가길, 많은 공감대를 이끌어가길, 소외되는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길 소원한다. 아직은 ‘나침판’ 공간의 빈 책장이 기대되는 이유일 것이다. 언젠가는 시작공간 일부 서가에 기록되는 수많은 목소리가 다양성을 넘어 모두의 길잡이가 되는,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
- 공지선
- 시작공간 일부 3기 공동운영단. 파이프챔버 대표. 회화를 비롯해 다양한 소재와 도구를 활용한다. 굳어진 숭고함에서 벗어나 사회의 도구로 소모되고 소멸하는 동시대 사람들의 저항을 표정에 담거나 도구로 만들어 표현하고 있다. 지역에서 다양한 문화예술 기획을 하고 있으며 출판과 다큐멘터리 등 그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gongjiseon@outlook.com
개인 인스타그램 @gongjiseon시작공간 일부 space1bu.ifac.or.kr
사진 제공_필자,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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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문화재단 아카이빙 프로젝트 ‘항해일지’
기대만점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