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역에서 KTX 열차를 타고 비치된 잡지를 뒤적이다 보면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공주역에 도착한다. 고요함이 내려앉은 기차역 주차장 뒤편으로 걸어 나오면 운전이 서툰 외부인을 데리러 온 생산소 대표, 이화영 작가가 기다리고 있다. 탁 트인 도로에서 완연한 계절감과 정취를 느끼며 삼십 여분을 달리다 보면 커다란 나무와 고즈넉한 건물이 나란히 교차하는 부여 읍내로 진입하고 로터리를 두어 번 돌아 백마강(금강의 다른 이름)을 건너는 동안 굵직한 글씨의 현수막을 통해 부여의 크고 작은 소식을 접한다. 규암면 마을 어귀로 들어서 문화공간으로 개조한 농협창고 옆에 차를 댄 뒤, 서각으로 공간 이름을 새긴 나무 간판과 화단을 지나 투박한 철제 계단을 내려오면 마당에는 철물과 연장, 산소탱크, 지난 전시 현수막, 목재 구조물들이 흩어져 있다. 자물쇠가 없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나무문을 끼익 열면 비로소 ‘부여 1호 대안예술공간-생산소’에 도착한다.
조용한 마을에 홀연히 나타난 소란한 예술 실험실
2021년 7월 문을 연 대안예술공간 생산소는 대표 이화영 작가를 포함하여 뉴미디어 아티스트, 청년 대장장이, 농부, 기술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20~60대의 운영자 6명-김영민(숫돌), 김정기(마스터), 이상철(캡틴), 이헌철(좋은길), 이화영(들판), 정강현(까레이)-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신생 공간’이라 부르기에는 수상할 만큼 가득 찬 내공과 활발한 교류를 기반으로 하는 밀도 높은 활동으로 부여군, 그리고 충남 일대에서 특히 눈길을 끌고 있다. 연식(?)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에 많은 이들에게는 아직 낯선 이름일 터이다. 하지만 실제 공간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에는 ‘여정’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긴 시간의 축적이 있다.
“이화영과 정강현으로 이루어진 뉴미디어 아티스트 팀 노드 트리(NODE TREE)가 서울을 탈출하면서 지역 이주를 결심했고(2019년), 여러 정착지 후보군 중 마지막으로 발견한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의 집터 이름을 ‘생산소’라고 지은 게 출발이었어요. (2020년 5월) 정착 이후 지역주민 그리고 외부 예술가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규암면에 함께 뭔가를 실험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제2의 생산소를 만들게 되었고(2021년 5월~7월), 함께 공간을 만든 사람들의 해석이 더해져 생산소의 정체성이 ‘대안예술공간’까지 확장된 것 같습니다.(2021년 8월~현재)”
– 이화영 생산소 대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폐가를 무상임대 받아 운영자들이 손수 지붕을 올리고 고친 생산소 공간 곳곳에서 빼곡하게 쌓인 기억과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옛 가정집이었던 오래된 타일의 흔적, 사람들이 둘러앉는 테이블이 된 교회 의자가 그렇다. 생산소 천장을 채운 나무 구조물은 재건축 현장에서 나온 폐목재를 다시 사용했다. 그렇다고 생산소가 ‘옛것’을 소중히 모아두는 박물관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생산소 한편을 채운 서적과 음반은 생산소와 인연을 맺은 청년 예술가들이 작년 여름부터 하나둘 두고 간 것이다. 또 서울에서부터 공수한 최신 디제잉 장비와 부스, 매주 금요일 저녁 생산소에 모여 수상한 미션을 수행하는 어린이들이 벽에 남긴 그림, 그리고 아지트처럼 놀이터처럼 생산소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서로 다른 사람의 발걸음이 ‘오늘’의 생산소를 함께 채우고 있다.
만들기보다는 덜어내는, 수상한 생산(省算)의 현장
인터뷰 날은 마침 부여 보태니컬 그림 동호회의 전시 첫날이었다. 회원들이 준비한 따뜻한 차와 정갈한 다과, 사람의 온기와 섬세한 그림으로 공간에는 화색이 돌았다. 가지런히 놓인 리플릿을 읽다 보니 ‘평가는 사양합니다. 그저 예쁘다 수고했다 말해주세요’라는 솔직한 코멘트와 회원들이 해석한 전시 장소의 이름 ‘갤러리 생산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생산소에서는 시각예술 작가나 기획자가 전시를 열거나(김영민 개인전 <생산도시>, 낭만히힛 개인전 <어떤 20대의 조각수집>), 생산소의 소개로 인근 스튜디오에서 전시를 했고(김소라 개인전 <복순투어>), 지역 문화재와 공예를 현대 감각으로 재해석한 전시 기획(<부여객사 로그-온>)으로 연결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생산소는 갤러리인가? 작은 미술관? 아니면 말 그대로 대안예술공간-스러운(왜인지 대부분 조도가 낮고, 설치와 미디어 작품이 많은) ‘미술미술’한 곳일까?
2021년 7월, 생산소에서는 운영자들의 전시 오프닝 협연을 하러 온 뮤지션(단편선)과 그를 따라 그냥 놀러 온 뮤지션(이권형) 두 명의 즉흥 공연이 열렸다. 두 달 뒤에는 생산소 뒷마당에서 청년지역교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또 한명의 뮤지션(전유동)을 초대해 옥수수를 가지고 요리를 해 먹고 노래를 부르는 <옥수수파티>가 열렸다. 2022년 5월, 생산소는 부여 특산물 방울토마토를 콘셉트로 전문 뮤지션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록 밴드, 생산소에서 디제잉 입문 과정을 밟은 초보 디제이들이 부여 객사 앞에서 연달아 공연을 하는 <나는 너를 방울방울해! 춤! 노래! 토마토!> 축제를 열었다. 그렇다면 생산소는 미술이 아니라 음악과 공연을 주로 하는 곳인가?
2021년 여름, 부여에서 2주간 지역살이를 하는 청년과 마을 어르신이 생산소 마당에 뒤섞여 전통주 기법으로 술을 빚었고(<술술술(酒術述)>), 2021년 9월, 생산소 앞 넝쿨 더미에서 열린 호박으로 호박죽을 한 솥 끓여 할로윈 분장을 한 마을 주민들과 나누어 먹었다. (<호박줄기 사건>) 2022년 11월, 시민뮤지컬을 만드는 부여 청년문화예술공동체 ‘부여안다’에 생산소가 후원을 하고 운영자 중 두 명은 직접 시민 배우로 참여하기도 했다.(시민뮤지컬 <부여비트>) 아하, 지역 문화 활성화, 그런 건가?
또 생산소에서는 마을학교 운동회를 열거나, 부여에서 강경까지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겨울에 꽁꽁 언 손으로 함께 연을 만들어 날렸다. 마을 장터에 커피차(브리샤)를 끌고 나가 차를 팔기도 했다. 아무래도 생활체육 동호회인가? 관광 프로그램 개발 중? 최근에는 문화다양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직원, 서산 다문화가족, 서천 국립생태원 직원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기도 하고, 부여 도심을 걸으며 부여의 미래를 상상하는 가족 단위 프로그램을 운영하였으며 어린이와 함께 미디어 장치로 소리와 이미지를 수집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앗, 문화예술교육이다!) 하지만 특별히 행사나 이벤트가 없는 날에도 독서회, 공부 모임, 시 모임, 또 목적 없이 차를 한 잔 (셀프로) 마시러 생산소를 드나드는 이는 수없이 많다. 이쯤 되면 생산소는 많은 사람과 잔치를 벌이기를 좋아하는 곳인가? ‘생산-소’라는 이름처럼 만남을 끊임없이 생산(生産)하려는 걸까? 쉽게 정체성을 부여하기 어려운 이곳의 이름을 이화영 대표가 다시 설명해주었다.
“생산소의 이름을 한자로 쓰면 덜 생(省), 셈 산(算), 바 소(所)로 뜻풀이를 하자면 ‘덜어내면 만들어지는 공간’이라는 뜻인데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예술가의 활동이 생산적인 활동으로 잘 읽히지 않는 지점이 흥미로웠고, 이런 상황을 중의적인 의미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생산소(省算所)는 뭔가를 계속 만들어내는(生産) 장소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덜어내면(省) 뭔가 더해질(算) 수 있는 장소(所)인거죠.”
본인은 그저 행정상의 이유로 대표를 맡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는 이화영 작가는 그의 닉네임 ‘들판’(우리‘들’의 ‘판’을 벌리는 사람)처럼 모든 생산소 활동의 가장 앞에서 때로는 가장 뒤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능력과 진심을 아낌없이 이곳에 덜어내고 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또 할 수 있는 이유는 ‘공간을 만들겠다’ ‘지역 리서치 작업을 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이 아닌 예술가로 살아온 그의 경험으로부터 떠오른 ‘이런 장소가 주변에 하나쯤 있다면 좋겠다’는 작은 마음으로부터였다.
다 언급하기도 어려운 다채로운 생산소 프로젝트 중 그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무엇이었는지 묻자 아련한 표정으로 2022년 2월에 있었던 ‘쥐불놀이’를 회상했다. (<생산소 계절상품 시리즈 – 비밀결사대>)평화 통일을 사랑하는 모임, 농민회, 부여에 머물고 있는 청년들, 하교를 마치고 온 초등학생들, 다른 지역에서 온 예술가와 기획자들, 풍물패, 소방대원이 꽁꽁 언 겨울 논밭에 모여 포크레인과 지게차, 트럭, 소방차 앞에서 곤포 사일리지(a.k.a. 농촌의 마쉬멜로우, 공룡알)에 락카로 메시지를 그리고 불이 붙은 깡통을 빙빙 돌리고 들녘에 불을 놓았던 기묘한 날.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잠시 하나의 풍경이 되었고 그런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 이화영 작가에게는 마치 불길 같은 강렬한 동력이 되는 듯하다. 사람들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즐기고 나누는 일을 ‘협업’이라고 부른다면, 생산소가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협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동력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화영 작가는 그것을 누군가의 노력이나 공으로 돌리기보다, ‘우연히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 만날 사람이 만났기 때문’이라 말한다.
“지역주민들로 이루어진 생산소 운영진만이 공간을 움직이는 건 절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생산소가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이 공간의 의미를 발견하고 함께 해보자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관계 인구’라는 단어로 불리는 외부의 예술가와 기획자가 생산소를 때로는 자의적으로, 때로는 같이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운영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화영 작가의 ‘하나쯤은 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에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여기에 더 머물고 싶어서’ ‘해볼 만해서’라는 운영진 각자의 마음이 더해지고, 관계 인구라고 표현된 외부 예술가들의 ‘누가 가보자고 해서’ ‘정이 들어서’ ‘즐거워서’라는 사사로운 마음들이 더해져 대안예술공간 생산소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기 위해 마음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가 있다. 실질적으로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보다는 손발이, 그리고 비용이 필요하다. 누군가는 서류를 정리하고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등 귀찮고 고된 일 또한 해야만 공간이 유지된다. 그렇다면 생산소는 어떤 규칙과 약속으로 이 마음을 지켜내고 있을까?
“저희도 안 해보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규칙을 세워보기도 하고 고민했던 지점은 있는데 ‘규칙 없는 규칙’이 저희의 약속이었어요. 자발성에 기댄다기보다는 서로가 함께 돌보는 공간이라고 해석하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좀 어려운 일이기도 해요.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무상임대 공간이라는 것이 그냥 무료로 쓴다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지는데 저는 무상과 무료는 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책임감과 도덕성을 갖추고 있는지, 이 공간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계속 되물어야 해요. 그 마음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관리가 되는 거고요. 시공업체를 부르지 않고 지역주민과 직접 공간을 고친 것도 완성도나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수익사업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함께 결합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으려고 했어요.”
예술가의 업(業)을 다하며, 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대관계약서나 규칙을 만들지 않고, 장르나 활동의 경계를 두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생산소. ‘마을에서 마음을 나눕니다’라는 생산소의 캐치프레이즈처럼 원하는 사람에게 “해보세요”라며 흔쾌히 공간을 내어주는 이화영 작가의 운영방식이 자칫하면 희생적인 일방향 서비스처럼 보일 수 있다. 또 예술 공간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생활감 가득하고 때로는 단순한, 소위 말해 충분히 ‘(전문)예술적’이지 않은 일상적 활동으로 채워져 있는 생산소가 어째서 공유공간이나 마을창작소가 아닌 ‘대안예술공간’으로 정체성을 갖게 되었는지는 그 안을 들여다볼수록 명확해진다. 그것은 공간을 해석하는 방식이 ‘예술가의 작업 태도’와 꼭 닮아 있기 때문이다.
“생산소에서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은 너무 많아요. 농사를 해보고 싶었는데 실제 정착해서 시도해보니 도저히 할 수가 없었고, 뭐든 만드는 걸 좋아하지만 베이킹은 못 하겠어요. 전문 장비로 영상을 촬영하지만 작업의 일환일 뿐 영상회사를 만들 생각은 없어요. 저는 사회에서 ‘예술가’라는 직업군을 선택했고, 예술가는 단편적인 상(像)을 그리는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사회를 조금 더 유연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제빵사는 빵을 굽고, 미용사는 미용실을 만드는 것처럼 예술가니까 예술 공간을 만든 거죠.”
모두가 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시대, 쉽게 가려지고 지워지는 개인의 개별적인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대안적’인 삶을 추구해 온 운영자들의 삶이 생산소라는 공간에 자연스레 묻어난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지만 스스로에게 철저하게 냉철하고 치열한, 그럼에도 끝내 자기답게 살아가려는 예술가의 태도를 갖춘 사람들이 모인 곳. 생산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교류와 네트워킹도 불특정 다수에게 무한정 열려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사람을 구태여 하나의 덩어리로 묶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협업은 2인 구조(나-타인)만이 가능하고 그것이 우선시 되어야 그다음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지극히 확고한(또한 예술가다운) 기준을 내세우고 있다.
때로는 한발 물러서서, 때로는 함께 섞여서 사람들이 꺼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자기 방식대로 조용하게 또는 요란하게 호응한다. 그럼으로써 운영자-이용자, 강의자-학습자, 예술가-주민이 아닌 나-타인의 동등한 일대일 관계 맺음, 진심의 교환이 일어나며 그것이 예술의 방식으로 기록되는 곳이 대안예술공간 생산소다. ‘서울’로 대표되는 ‘정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연이 맞닿은 곳이 마침 이곳 부여인 것이다.
때로는 한발 물러서서, 때로는 함께 섞여서 사람들이 꺼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자기 방식대로 조용하게 또는 요란하게 호응한다. 그럼으로써 운영자-이용자, 강의자-학습자, 예술가-주민이 아닌 나-타인의 동등한 일대일 관계 맺음, 진심의 교환이 일어나며 그것이 예술의 방식으로 기록되는 곳이 대안예술공간 생산소다. ‘서울’로 대표되는 ‘정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마음과 인연이 맞닿은 곳이 마침 이곳 부여인 것이다.
다양한 연령과 경험, 인생 곡선을 가진 한 사람 한 사람의 개별성을 저마다의 반짝임으로 여기는 생산소. 그렇다면 사람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특히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곳에서 쉽게 발생하는 사람 사이의 갈등을 생산소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옆집의 젓가락 개수까지 셀 수 있는 작은 마을에서는 지나치게 ‘훅’ 들어오는 관계나 솔직함을 내세운 강한 표현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거나 다치기 쉬울 수도 있지 않을까. 이화영 작가는 자신이 갈등을 다루는 방식으로 ‘말하기’와 ‘듣기’, 그리고 ‘다시 말하기’를 꼽았다.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는 그 나이의 나는 어떤 걸 필요로 했는지 떠올려 보면서 조금 더 친절하게 말을 걸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표현을 곧이곧대로 듣기보다 그가 어떤 삶의 궤적 안에서 살아왔는지 살펴보며 그 안에 숨겨진 ‘진심’을 듣기. 그리고 말하기와 듣기를 충분히 한 후에는 ‘내가 전하고 싶은 얘기도 꼭 전달하기.’
역시 그는 기획과 실행을 모두 잘하는 문화예술계의 올라운더(all-rounder)라고 끄덕이다가 문득, 저마다의 이유로 생겨났지만 비슷한 이유로 조용히 하나둘 문을 닫았던 대안예술공간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공간이 사라지면서 의미 있는 활동 또한 희미해지고 끝내 잊혀진다는 것은 늘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대안예술공간 생산소의 다음을 물었다. 5년의 무상임대가 끝난 후의 생산소는 어떻게 될까? 소위 말하는 경제적 자립이나 확고한 정체성의 확보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무상임대가 끝나는 시기가 오면 생산소가 없어질 것이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생산소와 관계 맺은 분들이 함께 또 개별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거든요. 운영자들이 개인의 공간(농장, 목공방, 작업실 등)을 따로 가지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가 함께 생산소 지붕을 올렸던 ‘찐한 기억’만으로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확고한 생각이 듭니다. 특히 노드 트리는 부여에 정착했기 때문에 만약 공간이 사라지더라도 당연하게 ‘서로가 이웃으로 남는다’는 문장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소함이 선명해지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
생산, 규칙, 효율, 성과를 중요시하는 오늘날의 시스템 안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쉽게 감춰진다. ‘공공의 예산’을 지원받지 않으면 유지하기 어려운 문화예술 프로젝트일수록 그렇다. 연말이 되면 다들 일 년 동안 무엇을 해냈는지를 묻는다. 정신없이 일을 쳐내다가 잊어버린 영수증, 밀린 서류 사이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몇 명이 왔더라? 회의는 몇 번을 했더라? 낯간지럽게 거창한 말로 의미를 포장해보기도 하고 양심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숫자도 부풀려보지만 ‘지역주민의 문화예술 향유’를 위한 공간에서 어쩌다 놀러 온 손님은 카운트되지 않고, 두 명의 ‘찐한 우정’은 백 명의 관객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무엇을 이루어냈고 무엇을 남겼는지 되돌아보는 이때, 대안예술공간 생산소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어쩌다 생산소와 만나게 되었던가. 벌써 삼 년 전쯤, 마침 한가하던 날에 누군가 부여에 같이 가자고 했고, 겨울인데도 햇볕이 너무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던 기억. 딱히 이유를 찾지 못한 채로 지역을 오가다 마침 마을에 정착한 예술가를 만났던 기억.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기에 동료를 모아 손을 보태러 왔던 기억. 작은 우연에 기뻐하고 예상치 못한 이별에는 함께 슬퍼했던 기억. 온통 그런 사적인, 작은 이야기뿐이다. 하지만 그 사소함이 나의 손발을 그리고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생산소와의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서 여러 ‘큰 사업’-청년지역교류, 지역문화 활성화, 주민관광, 공공예술 등–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사업의 미션 달성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사심 가득하게도 따로 있다. 몰랐던 서로를 알아가고 무언가를 함께 시도해보는 과정이 주는 생생한 즐거움이었다. 생산소가 말하는 ‘덜어낸다’의 의미는 남을 위해 나의 일부를 떼어 내어 희생하거나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사소함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위한 스스로의 덜어냄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상대방을 믿고 서로에 기대어 균형을 맞춘 두 선(∧)을 협업의 모양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단단하게 받쳐주는 기반(_)이 있어야만 하나의 삼각형(△)이 완성된다. 사적인 감정과 사소한 이야기가 무너지지 않고 선명히 떠오를 수 있도록 지지하는 장소, 비로소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곳. 이화영 작가는 서로의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는 두 명이 있다면 꼭 서울 아니더라도, 또 부여일 필요도 없는 그 어디에선가 제2, 제3의 움직임이 생겨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 사람이 또 한 명의 사람을 만나면서부터 움트기 시작한 예술은 대안예술공간 생산소에서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양분 삼아 쑥쑥 자라나고 있다. 높이 솟아오르는 거대한 나무보다는 마치 호박 넝쿨처럼, 지역과 경계를 훌훌 넘어 다시 사람을 향해 오늘도 힘차게 뻗어나간다.
- 황바롬
- 말하기보다 듣기를, 쓰기보다 읽기를 좋아하는 수렴형 인간. 서양화를 전공하고 다수의 문화예술기관에서 근무하며 행정 언어와 예술 현장 사이의 간극을 몸소 체험하고 이를 통역할 수 있는 매개자의 필요를 느꼈다. 2020년부터 시각예술 작가와 협업할 수 있는 창구로 바인드(baind)를 설립하고, 독립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예술 활동 영역을 오가며 전시, 워크숍, 아트마켓, 출판 등의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운영했다. 예술가의 내밀하고 사적인 언어를 들여다보고 매만지며 참견하기를 좋아한다.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예술을 나름의 방식대로 이해해나가며, 정진하기를 꿈꾼다.
b_a_ind@daum.net
인스타그램 @b_a_ind - 영상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사진 제공_생산소 인스타그램 @saengsan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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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처럼 놀이터처럼 생산소를 자유로이 드나드는 서로 다른 사람의 발걸음이 ‘오늘’의 생산소를 함께 채울 수 있다는게 너무 좋은거 같아요.
덜어내고 더해가는.. 그렇게 또 예술로서 어울러진다는게 너무 따뜻하고 좋습니다.
덜어내고 더해가며 호응하는, 예술-이웃
대안예술공간 생산소
정말 잘 보고 갑니다
덜어내고 더해가며 호응하는, 예술-이웃
대안예술공간 생산소
기대만점으로 다가 오네요
덜어내고 더해가며 호응하는, 예술-이웃
대안예술공간 생산소
멋집니다. 기대가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