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밝은방인데 되게 어둡네요.”
농담으로 던진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불을 켜러 간다. “너무 밝을까 봐요.”라고 나지막이 답하며 천장의 조명을 살피는 표정이 차분하고 진지하다. 어쩌다 밝게 웃는 얼굴은 너무나도 해맑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 장난을 걸게 된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 ‘편안하다’라는 형용사가 좋은 사람, 자기 얘기 좀 해달라고 하면 고개를 푹 숙이다가도 밝은방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거리는, 창작그룹 밝은방 공동대표 김인경을 만났다.
농담으로 던진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불을 켜러 간다. “너무 밝을까 봐요.”라고 나지막이 답하며 천장의 조명을 살피는 표정이 차분하고 진지하다. 어쩌다 밝게 웃는 얼굴은 너무나도 해맑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 장난을 걸게 된다. 떡볶이를 좋아하는 사람, ‘편안하다’라는 형용사가 좋은 사람, 자기 얘기 좀 해달라고 하면 고개를 푹 숙이다가도 밝은방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거리는, 창작그룹 밝은방 공동대표 김인경을 만났다.
발달장애 창작자의 편안한 아지트
밝은방은 은평구 연천초등학교 앞 빨간 벽돌 상가 2층에 자리하고 있다. 같은 건물 1층에는 수학교습소가, 옆집에는 분식집과 피아노 학원이 있어 어딘가 정겹고 안전한 기분이 든다. 비밀스러운 계단을 따라가니 층고가 제법 높고 창이 꽤 커다랗게 난 아지트가 나왔다. 용인, 하남, 파주 등 도처에 살고 있는 발달장애, 정신장애 창작자들이 매주 목요일 이곳으로 모인다. 벌써 5년이다. 구석구석 놓여있는 그림과 재료들, 책상 앞에 커다랗게 쓰인 이름들, 창밖에서 동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까지, 세월이 세월인 만큼 모든 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림이 쌓인 만큼 창작자들 사이에도 시간이 쌓였다. 이제는 만나면 서로 “형!”, “동생!”하고 반갑게 인사한다. 간식을 나누어 먹거나 서로의 그림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는 풍경도 낯설지 않다. 밝은방의 공동대표 김효나와 김인경도 항상 함께다. 모두 꽤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봐왔다. 이제는 제법 서로의 의견을 관철하며 티격태격하는 사이가 됐다. 어렴풋이 밝은방의 일상이 그려졌다. 다짜고짜 밝은방 자랑 좀 해달라고 졸랐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답변이 돌아왔다.
“여기는 그냥 약속한 시각에 그림을 그리러 와서 그림을 그리고 가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거창한 것이 아니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밝은방에서 모여서 자신의 그림을 그린다’는 건데요. 발달장애 창작자들에게 창작은 일정 부분 어떤 습관과도 같은 거예요. 그 습관이 지속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창작자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재료를 만나기도 하고, 그림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받기도 하고, 서로의 그림을 보고 영향을 받기도 해요. 깊고 좁고 내밀한 각자의 창작 세계에 몰두하다가도 조금씩 외부와 교차하는 경험을 하는 장소에요. 그래서 무엇보다 창작자들이 이곳을 편안하게 여겼으면 했어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마음 편히 그림 그리러 가는 곳. 편안한 창작 공간이요. (거듭 제대로 된 자랑을 내놓으라 보채자 어렵게 말을 이었다) … 이렇게 오랫동안 발달장애 창작자의 예술표현에 귀 기울이고 세심한 언어로 소개해온 단체는 드물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회적 목적이라든지 상품화를 위함이 아닌, 작품 자체를 조명하는 책이나 전시를 꾸준히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효나 언니를 비롯해 매 순간 함께해온 훌륭한 동료들이 있다는 것이 자랑이지요.”
– 밝은방 공동대표 김인경
우연과 인연, 낭만과 현실 사이에서
밝은방을 함께 꾸려온 김효나 소설가가 얼마나 멋지고 든든한 짝꿍인지 말하는 목소리가 씩씩하다. 은근히 어떤 질문을 해도 ‘효나 언니’ 이야기로 귀결되는 흐름을 꼬집었더니, “제가 효나 언니를 좀 좋아해요”라고 답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밝은방의 톰과 제리(누가 톰이고 누가 제리인지는 비밀이라고 한다) 김효나와 김인경은 거의 20년 전 각각 소설가와 시각 예술가로 창작을 시작하던 시기에 우연히 만났다. 당시엔 서로 제도권 밖의 미술에 관심이 있는지도 몰랐고 이렇게 길게 인연이 이어질지도 몰랐다.
“언니랑 저랑 인연은 인연인 것 같아요. 제가 전생을 알려주는 앱을 깔아봤는데요, 제가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였대요. 아마 효나 언니도 강아지였을 거예요. 저는 종종 저랑 언니랑 할머니 돼서 죽기 직전에 옆에 누워서 농담을 주고받는 상상을 해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일해요. 밝은방이 끝나도 서로의 곁에 남아서 같이 늙고 싶어요.”
잠시 머릿속에 ‘두 천재 예술가의 꿈과 우정! 우연과 인연이 겹쳐 만든 밝은방! 발달장애 창작자들과의 찬란한 협업! 진정한 예술을 찾는 모험!’과 같은 기승전결이 완벽한 만화영화의 내레이션이 깔리는 듯했지만, 현실은 그리 낭만적인 이야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밝은방 이전의 활동까지 더하면 둘 다 10년 이상 발달장애 창작자들과 함께 워크숍, 전시, 출판 기획 일을 해왔음에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불안정하다고 말한다. 코로나19로 매주 모였던 워크숍마저 중단되었던 최근에는 더욱 힘들었다. 언제 상황이 나아져 워크숍과 전시를 재개할 수 있을지 모르기에 선뜻 다른 일을 구할 수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위축되고 경제적으로도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시로 소개하던 작품을 출판으로 전환하거나 온라인 워크숍을 시도하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며 묵묵히 버텼다.
팬데믹 상황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운영 구조를 만드는 것은 여전한 숙제다. 대부분의 창작지원사업은 연 단위로 운영되어 사실상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보암직한 결론을 내야 한다. 창작자에 따라 자신에게 맞는 작업 재료를 찾는 데만 1년이 걸리기도 하고, 실패할 시간도 충분히 필요한 현실과는 부딪치는 지점이다. 무엇보다 밝은방의 운영자이기 전에 개인 창작자이기에, 몇 개월 단위로 경쟁하고 증명해야 하는 지원사업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창작을 위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의 헌신이나 열정, 책임감에 의존하지 않는 운영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된 나에게 “혼자는 못 한다”고 답하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효나 언니와 저의 관계가 더욱 끈끈해졌어요. 서로 끈질기게 대화하게 되었죠. 물론 싸우기도 많이 싸웁니다. 문제가 생기면 밤새도록 통화하기도 하고 말이 어려우면 메일도 주고받아요. 믿음이 있으니까 물러서지 않죠. 믿음은 긴 시간 함께 일하며 쌓였어요. 언니랑 저랑 일할 때 티키타카가 좋아요. 재미있어요. 오랜 시간 같이 일했기 때문에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알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게 됐죠. 일정 안에 일을 해내고 돌아봤을 때 함께 느끼는 기쁨도 큽니다. 그래서 계속해요. 관계 때문인가 싶어요.”
밝게 빛나는 몰입과 헌신
작년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에서 밝은방이 기획으로 참여한 전시 《길은 너무나 길고 종이는 조그맣기 때문에》를 관람하고 느낀 일종의 기죽음(?)에 대해 털어놨다. 전시를 보는 내내 압도되는 기분이 들었는데, 아마 같은 창작자로서 평생을 쫓아도 흉내조차 수 없는 집요함과 깊이에 눌린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요, 아마 결과만 봤기 때문에 그랬을 거예요. 수많은 시간이 쌓인 여러 점의 결과물을 한꺼번에 봤잖아요. 물론 관객이 그런 압도감을 느끼도록 의도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을 봤으면 달랐을 거예요. 그림은 사실 그냥 선 하나 긋는 것에서 시작하잖아요. 특별한 개념을 앞세우거나 남다른 기술을 보여주려는 게 아니라 정말 재료 하나하나의 질감을 느끼고 종이와의 마찰을 즐기면서 천천히 진행되죠. 아주 단순한 행동의 반복이 쌓이고 쌓여 무언가를 이룰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해요. 그래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우리로서는 가끔 이 작업이 얼마나 놀랍고 흥미로운지 잊기도 해요. 가끔은 거리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에요.”
문득 밝은방이 걸어온 시간 또한 무수한 선을 긋는 행위의 반복이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매너리즘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랫동안 같은 창작자들의 그림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들여다보다 보니 기쁨에 무뎌지는 날도 있었다. 강사, 기획자, 사회복지사, 상담가, 운영자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하는 일은 항상 벅찼고, 고갈된 힘이 다시 차오르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지난 전시를 준비하며 발달장애, 정신장애 창작자들이 활동하는 여러 단체에 방문했던 경험은 큰 환기가 됐다. 전국의 정신요양시설, 기관, 단체에 찾아가 새로운 창작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독창적인 작업 세계를 한꺼번에 발견했던 순간은 잊고 있던 여러 감각을 깨웠다.
“저는 창작에 대한 애증이 있어요. 예술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입시 미술을 공부했거든요. 그리는 게 즐겁지 않았어요. 발달장애 창작자들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 정말 놀랐어요. ‘경이로움’ 같은 거였어요. 지금도 매번 새롭게 사랑에 빠져요. 밝은방에서 창작자들이 작업에 몰입하는 모습을 가만히 볼 때면 마음이 편해져요. 제가 입시를 위해 그림을 그렸을 때 느낄 수 없었던 ‘그리는 즐거움’ 같은 게 전해지거든요.”
‘이 양반, 예술을 찾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며 눈을 흘겼다. 길고 질긴 세월의 한 바닥만 베어내 엿보는 것임에도 창작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간지럽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문득 밝은방을 계속하여 밝히는 이유가 창작자가 창작을 지속하는 이유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각 예술가 김인경과 밝은방 운영자 김인경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처음에는 분리해서 생각했어요. 창작하는 김인경과 밝은방을 운영하는 김인경을요. 지금은 밝은방 일 또한 창작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밝은방 창작자들과 저의 관계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예전에는 스스로 창작자를 돕는 역할, 창작자의 이름이 더욱 드러나도록 숨는 역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은 기획자로서 기획의 가치를 더욱 생각하고 의식적으로도 비중을 두고 있어요. 이 일이 생각보다 굉장히 섬세하고 아이디어가 많이 필요한 일이거든요. 창작과 같아요.”
누군가는 밝은방의 일을 ‘좋은 일’이라고 뭉뚱그려 볼지도 모르겠다. 글쎄다, ‘좋은 일’을 하겠다는 ‘좋은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 것은 확실하다. 작은 창작의 불씨를 발견하는 일, 시각 표현의 안팎을 자세히 비추는 일, 바람도 되고 장작도 되며 관계 맺는 일, 타오름이 멈추지 않도록 인내하는 일은 어쩌면 모두 예술을 사랑하는 일이다. 만약에 이 일을 누군가 굳이 ‘봉사’라고 한다면, 다름이 아닌 ‘예술’을 향한 봉사와 헌신일 것이라고 말하겠다. 밝은방은 예술을 사랑하는 두 창작자의 강한 믿음과 실천으로 빛나는 방이다. 앞으로 밝은방의 빛이 닿을 곳들이 궁금해졌다. 한껏 벅차오른 마음으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따뜻한 눈빛으로 천천히 내어놓은 그의 답변은 다시 마음을 겸허하게 만들었다.
“목표를 묻는 것이라면 글쎄요. 없어요. 그저 해오던 대로 워크숍하고, 전시하고, 책 만들면서 발달장애 창작자를 소개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더 하고 싶어요. 더 하고 싶은 일이에요. 지금처럼 만요.”
- 이려진
- 궁금한 게 많은 시각예술 작가, 기획자. 그림 그리고 이것저것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yriojin@gmail.com
인스타그램 @yriojin
사진 제공_밝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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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그룹 밝은방
잘 보고 갑니다
하고 싶은 일 계속 이어나가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밝은 방이네요~
그리는 즐거움을 간직한 깊고 좁고 내밀한 장소
창작그룹 밝은방
기대됩니다
그리는 즐거움을 간직한 깊고 좁고 내밀한 장소
창작그룹 밝은방
공감이 가네요
그리는 즐거움을 간직한 깊고 좁고 내밀한 장소
창작그룹 밝은방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