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과 예술이 만나 지역 문화를 꽃피우고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며 나아가 농촌 관광이나 경제까지 기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송인현 대표가 일구고 있는 민들레연극마을 사례는 문화예술 분야나 농업농촌 분야 모두에서 늘 탁월한 모델로 평가받아왔다. 그 성과는 고향을 사랑하는 한 연극인의 헌신에 기인한다. 얼마 전 경기도 화성에 있는 민들레연극마을에 방문하여 송인현 대표를 만났다. 공간과 프로그램 그리고 마을을 직접 체험하는 일은 물 흐르듯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만큼이나 신나고 감동이 느껴졌다.
대표님과 처음 만난 게 1989년인가, 제가 김덕수 사물놀이 일하던 때니까 한 30년 넘은 것 같다.
1986년 초에 일본 삿포로부터 규슈까지 두 달 동안 ‘문화 카라반’을 했다. 김덕수 사물놀이와 함께한 재일민단 청년회 행사였는데, 본 행사 전에 한 공원에서 합동 공연을 했다. 내가 봉산탈춤을 끝내고 짐을 정리하는데, 이어서 김덕수 사물놀이가 시작되니까 멀리 떨어져 있던 부랑인들까지 다들 가까이 오는 걸 보며 선생님에게 엄청 반했었다. 그러다 다이코(일본 전통북) 치는 일본인을 만났는데, 자기 연주에는 혼이 들어있다고 자랑을 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고 하니 손을 내밀며 자기 손 밑에 묻어있는 흙을 보여주었다. 농사를 지으며 북을 친다는 거다. 귀국 후에도 그 얘기가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어느 순간 잊어버렸었다.
사실 민들레연극마을(이하 연극마을)을 처음 만들 때 이 시골로 내려올까 말까 갈등이 많았다. 그때 일본에서의 만남이 떠올랐고, 흙을 떠나서 탈춤을 추는 게 기능적인 것만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려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실제로 어린이들과 같이 흙을 만지고 그것을 연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엮어내고 다시 전통적인 몸짓으로 표현할 때 흔쾌히 내 작업을 여기다가 쏟아부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사실 민들레연극마을(이하 연극마을)을 처음 만들 때 이 시골로 내려올까 말까 갈등이 많았다. 그때 일본에서의 만남이 떠올랐고, 흙을 떠나서 탈춤을 추는 게 기능적인 것만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려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실제로 어린이들과 같이 흙을 만지고 그것을 연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엮어내고 다시 전통적인 몸짓으로 표현할 때 흔쾌히 내 작업을 여기다가 쏟아부을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틀에 갇힌 프로그램이 아니라, 여기서만 할 수 있는, 생태적인 방식을 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 전통, 풍물 하는 친구들도 ‘기 싸움’이 뭔지 모른다. 옛날에 두레를 놀고 가다가 논두렁에서 두 두레패가 만나면 누군가 비켜줘야 하는데, 앞에 있는 기들끼리 싸움을 해서 지는 쪽이 밑으로 내려가고 이긴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다. 여기(연극마을)에 오면 그런 전통에 바탕을 두고 구호를 만들어 장단에다 맞춰 놀며 기 싸움을 하는데 다들 너무 좋아한다. 구호(말)로 장단 만드는 건 장단이 말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팍팍 밀어붙여 밀어붙여 밀어붙여” 한다든지 “들어간다 들어간다 들배지기 들어간다” 하면서 말을 만들면 그게 장단이 된다. “도깨비 깨비 도깨비 깨비 도깨비 깨비” 이렇게 말로 장단 놀이하면서 연극하고 기싸움하고 놀이하는 프로그램들이 많다.
이런 게 진짜 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하는 게 다 예술교육인데, 예술교육을 어떤 틀에 가두려고 하는 것 같아 최근에는 지원사업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교실에서도 할 수 있는 연극놀이를 여기서 할 필요가 있을까? 어설프더라도 애들하고 뛰어놀면서 여기서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앉아 풀을 뽑을 필요가 있을까. 어린이들이 맨발로 뛰어놀게 하려고 잔디에 약을 뿌리지 않고 손으로 풀을 뽑는다. 물론 풀 뽑기는 나한테 수련이기도 하다.
이런 게 진짜 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들이 하는 게 다 예술교육인데, 예술교육을 어떤 틀에 가두려고 하는 것 같아 최근에는 지원사업을 하지 않았다. 서울에서도, 교실에서도 할 수 있는 연극놀이를 여기서 할 필요가 있을까? 어설프더라도 애들하고 뛰어놀면서 여기서만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마당에 앉아 풀을 뽑을 필요가 있을까. 어린이들이 맨발로 뛰어놀게 하려고 잔디에 약을 뿌리지 않고 손으로 풀을 뽑는다. 물론 풀 뽑기는 나한테 수련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문화예술교육 철학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그런데 원래 어린이를 좋아하셨나? 극단 민들레는 어린이 연극에 독보적인 팀 중 하나다.
1995년도에 ‘스폴레토’라는 이탈리아에 있는 작은 도시에 가서 석 달 동안 워크숍을 했다. 90년대 초에 ‘라마마’라는 오프브로드웨이에 있는 극단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는데, 연극사적으로도 의미 있고 제3세계 문화를 미국 사회에 알리는 엄청 중요한 역할을 하던 극단이 어려움에 처했다니 전 세계에서 성금이 모였다. 라마마 대표인 엘런 스튜어트가 그 자금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자 스폴레토에 성(작은 농가 주택)을 하나 사서 그곳을 레지던스 공간으로 만들었는데, 그 오픈 행사에 참가했다. 거기서 <예라누스>라는 작품을 연습하면서 한 동작 때문에 연출에게 자주 혼났다. 그 동작의 의미를 “하늘의 신이 어쩌고 땅의 신이 저쩌고”라고 얘기하는데, 우리 한국무용에선 ‘대지여, 하늘이여…’하는 것들이다. 나는 한국무용에서 사용하는 전형적인 틀로 시범을 보였더니 연출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본 적은 있지만, “과연 하늘의 신, 땅의 신이 뭐지?” “내가 나인 것은 뭐지?”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제일 중요한 게 뭘까 계속 고민했다. 그러던 중에 『어린이마을』이라는 책을 봤고, 뭔가 여기에 답이 있을 것 같았다. 한 5년만 어린이 연극을 하면 답이 찾아질 것 같았다. 그래서 어린이 연극을 시작했다.
뜻밖의 계기다. 연극을 하면서 탈춤을 시작했고, 또 다른 계기로 어린이에 천착했고, 그 기반을 마을로 옮겨가면서 이제는 커뮤니티 기반 어린이 문화예술교육 전문가로 포지셔닝이 된 것 같다.
내가 어린이라는 주제를 추구했다기보다 예술의 길을 찾아 어린이라는 세계에 들어와 보니 이것이 너무 위대했고 내가 여태까지 해왔던 연극보다 더 재밌었다. 95년도까지 연극에서 비교적 엘리트 코스를 달려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이 연극을 한다고 하니까 선배들은 “왜 연극을 안 하냐?”고 묻기도 했다. 어린이 연극을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린이를 좋아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욕심’이다. 독창적인 나의 예술 세계에 만들고 싶은.
여기(경기 화성)는 대표님 고향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활발히 활동하다가 어떻게 마을 기반 문화예술 활동을 하게 되셨는지 소개해 달라.
어린이 연극이 계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이 연극은 공연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린이 문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어린이문화연대’에서 활동했다. 친환경, 농촌, 전통과 맞물려 여러 프로그램을 하려다 보니 농사지을 땅이 필요했다. 그래서 양평의 한 친환경 농부의 땅을 빌려 1년을 해봤다. 하지만 서울 목동에서 양평까지 너무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그다음 해에 ‘내가 시골에 자주 내려와서 농사도 짓고 한 달에 적어도 두 번씩은 내려올 테니까 이 땅을 좀 빌려주십시오’라며 아버님께 말씀드렸다. 매월 넷째 주 토요일에 장애‧비장애 어린이들이 서울에서 내려와서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그것으로 연극놀이를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느닷없이 전화 한 통이 왔다. “당신 하는 일 참 재미있으니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신청해보라”는 것이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농림부에서 2억을 준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동네에 얘길 했더니 “야, 그거 (마을로서는) 잘 돼도 망하고 안 돼도 망하는 거야”라며 반대했다. “그럼 극단 민들레 중심으로 마을이 함께 하는 것으로 신청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신청했으나 추천서도 못 갖춘 상태였다. 일단 신청서를 내고는
잊어버렸는데, 한 1년쯤 있다가 2006년 사업에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잊어버렸는데, 한 1년쯤 있다가 2006년 사업에 선정됐다는 연락이 왔다.
이곳이 고향이기도 하지만, 굳이 마을 기반 활동을 하는 의의나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지금도 일주일에 3일 이상 여기 머무는데, 일도 일이지만 책을 쓰거나 대본을 쓰는 것도 서울에 있을 때보다 집중이 잘 된다. 그러니까 예술가들에게는 도시의 삶에서 뚝 떨어져서 있는 시간이 필요 한 것 같다. 삶 속에 묻혀 지내다가도 좀 떠나 있는 게 되게 중요하다. 내가 남보다 잘하고 싶었으면 아마 계속 서울에서 경쟁했을 거다. 그런데 내 마음 어디엔가 뭔가 다른 나의 세계를 갖고 싶다는 예술가로서의 이기적인 욕망이 크게 자리 잡으며 아무래도 나에게 익숙한 고향 마을이 떠올랐다. 그로 인해 갈등이 생길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없으면 추진할 힘도 없지 않을까.
예술가로서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
추구하고 싶은 자기 세계가 있어야 하고, 그게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타적인 목적보다 ‘나의 예술’을 찾는 과정이 어렵다. 예술가에게는 뭔가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마음과 도전이 필요하다. 아직 내가 거기에 도달하지 못해서 지금도 새로운 걸 찾고 있다고 생각 한다.
어린이와 놀이, 문화예술교육에서 마을 기반 연극 활동, 가을걷이박축제와 품앗이공연예술축제라는 농촌 축제의 성공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극단 민들레는 우리나라 커뮤니티 씨어터에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생활문화공동체 시범 사업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마포 할머니들과 커뮤니티 연극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모범사례라며 시범 사업에 들어오라고 해서 몇 년 했더니 어느 순간 어떤 틀에 맞추라는 거다. 예술 프로그램이 어떤 틀에 갇히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틀 없는 틀을 줘야지 틀에 들어가려면 예술을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 사업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했다.
사실 좀 우기기도 한다. 기존의 이론보다 현장에서 느낀 바를 이론화시키려고 한다. 가령 ‘길놀이’는 논에서 일하는 사람, 빨래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연을 알리고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연극 공연 전에 로비 활동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그냥 객석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로비에서 공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다. 공연 전에 로비에서 충분히 놀며 작품에 대한 느낌을 갖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그것을 반추할 수 있게 하는 거지. 공연 보고 뒤풀이 없이 맹숭맹숭 그냥 가라는 탈 판이 말이 되나. 그런데 지금은 서양 연극 양식이 중심이라 공연 딱 하고 그냥 끝나버리는 게 안타깝다. 연극마을 별극장은 호박 넝쿨, 인동초 넝쿨을 쭉 지나서 들어간다. 이 묘한 분위기를 통해서 극장으로 들어가면 관객들은 이미 무장해제하고 공연 볼 준비를 한다. 아니 공연을 무조건 받아들인다. 이런 게 탈춤의 전통을 현대극으로 갖고 온 것이다. 요즘 다른 극장에 가면 숨 막힌다. 들어가자마자 “뭐 하지 마세요” “뭐 하세요”… 여기(연극마을)는 그런 게 없다. 핸드폰 이 터지면 할 수 없는 거지.
사실 좀 우기기도 한다. 기존의 이론보다 현장에서 느낀 바를 이론화시키려고 한다. 가령 ‘길놀이’는 논에서 일하는 사람, 빨래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연을 알리고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연극 공연 전에 로비 활동을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그냥 객석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로비에서 공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다. 공연 전에 로비에서 충분히 놀며 작품에 대한 느낌을 갖고, 공연이 끝난 다음에는 그것을 반추할 수 있게 하는 거지. 공연 보고 뒤풀이 없이 맹숭맹숭 그냥 가라는 탈 판이 말이 되나. 그런데 지금은 서양 연극 양식이 중심이라 공연 딱 하고 그냥 끝나버리는 게 안타깝다. 연극마을 별극장은 호박 넝쿨, 인동초 넝쿨을 쭉 지나서 들어간다. 이 묘한 분위기를 통해서 극장으로 들어가면 관객들은 이미 무장해제하고 공연 볼 준비를 한다. 아니 공연을 무조건 받아들인다. 이런 게 탈춤의 전통을 현대극으로 갖고 온 것이다. 요즘 다른 극장에 가면 숨 막힌다. 들어가자마자 “뭐 하지 마세요” “뭐 하세요”… 여기(연극마을)는 그런 게 없다. 핸드폰 이 터지면 할 수 없는 거지.
품앗이공연예술축제는 화성의 대표적인 축제인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 2~3년간 개최하기 어려웠을것 같다. 가장 아날로그적일 것 같은 농촌의 공연예술 축제가 팬데믹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궁금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거리두기를 해야 할 때는 논 한가운데에서 퍼포먼스하고 관객들은 논두렁에서 봤다. 소리꾼을 나무 위에다 앉혀놓고 판소리를 했다. 기관에서는 그들의 상식과 안목으로 예술가들을 통제한다. 거리두기를 해야 하니 공연을 하지 말라고. 예술가는 그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답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논에서 나무 위에서 공연한 것이다. 사회에 “자, 거리두기 확실히 했지? 우리(예술가)는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말라고 하나” 하고 시위를 한 것이다. 자꾸 뭘 하지 말라고 할 때 예술가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는 게 예술가의 사회적인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건 할 수 있어, 없어’를 사회가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틀에서 빠져나와 뭔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다. 그걸 보여줘야 예술이 사회에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규율대로 하려면 예술을 왜 하고, 예술가들이 왜 이 사회에 존재하나. 그게 지금 제일 큰 고민이다.
예술가로서 기존 제도권에 대해서 비판 정신을 가졌으면서도 녹색농촌체험마을이나 사회적기업 지원사업 등에 계속 도전하신다. 완전히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난 활동이 아니라 다양한 지원사업을 활용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현란한 수식어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마을을 위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떤 내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과정이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이것이 극단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 지속 가능성과도 연결되지 않을까.
과연 나만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가, 어떻게 가야 할까 계속 도전하는 것뿐이다. 후배들한테도 그런 얘기를 한다. 어느 나이가 되면 뭔가 일가를 이루었어야만 할 것 같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오는 안타까움으로 좌절하는 후배들이 많다. 나도 그 시간을 거쳤다.
그동안 경연대회에 할 수 없이 참가한 적도 있지만 평소엔 잘 하지 않았다. 스스로 평가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 올해부터는 여기저기 경연대회에 출품하고 있다. 후배들하고 같은 선상에서 경쟁해보고 싶어서 출품했는데 다 떨어졌다. (웃음)
그동안 경연대회에 할 수 없이 참가한 적도 있지만 평소엔 잘 하지 않았다. 스스로 평가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요즘은, 아니 올해부터는 여기저기 경연대회에 출품하고 있다. 후배들하고 같은 선상에서 경쟁해보고 싶어서 출품했는데 다 떨어졌다. (웃음)
민들레예술마을에서 하는 다양한 프로젝트 중에 좀 더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진짜 하고 싶은 건 레지던시 공간이다. 올해까지 10년째 아시아 레지던시를 했다. 한 달 동안 열다섯명 정도의 예술가들이 먹고 자고 작업을 한다. 레지던시를 통해 예술가들과 좀 더 창의적인 작업을 하며 내 작업에 코멘트도 해주고, 그들이 뭔가 떨어뜨리고 간 것으로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요즈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환갑 넘은 사람에게 무슨 창의력이 있겠나. 근데 (레지던시를 하면서) 젊은 예술가들이 떨어뜨려 놓고 간 것은 줍기만 하면 된다. 다행인 것은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떨어뜨렸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작업하면서 아이디어를 내고 신경질 내고 싸우고 그러는데 너무 좋다. 그것만 주워도 나는 평생을 예술하고도 다 못할 것 같다. 그게 너무 신난다.
공감한다. 감자꽃스튜디오도 공간 우선순위가 첫째 레지던시, 둘째 문화예술교육, 셋째 농촌 관광 공간이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정체성이 달라진다. 농촌 관광 공간으로 포지셔닝하면 사람을 많이 모아야 하고, 문화예술교육을 중심에 두면 문화센터처럼 되어야 한다. 감자꽃스튜디오에서도 16개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레지던시를 했었다. 서로 다른 장르 예술가가 콜라보하고 즐겁게 지내다가 나중에 다시 다른 지원금을 받아서 오더라. 문제는 역시 현실적인 얘기, 비용 문제다.
처음 몇 년은 그냥 어떻게 해오다가 아르코에서 지원을 받았다. 1천만 원씩 받다가 작년 재작년에는 2천만 원을 받았다. 솔직히 열다섯 명이 한 달 동안 먹고 자는 데만 천만 원이 든다. 근데 먹는 비용으로는 못 쓴다. 어쨌든 올해는 지원금을 못 받았다. 그렇다고 10년 차인데 안 할 수가 없지 않나. 그래서 그냥 했다. 저녁은 직접 해 먹는다. 특히 아시아 작가들은 자기 나라 음식 안 먹으면 힘을 못 쓰고 채식주의자가 많다. 청소도 농사일도 한다. 어떤 때는 매실도 따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밭에 나가 풀도 뽑고.
레지던시에 와서 작품을 안 해도 된다는 조건인데도 두 개씩 만들어가는 친구들도 많다. 한번은 일본 작가 하나가 계속 작품 안 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거다. 미안했는지 나중에 탈을 가지고 워크숍 하나를 해줬는데 나한테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또 방글라데시 작가는 아무것도 안 하다가 보름쯤 지나서 여기 있는 연못과 산소에서 영상 틀어놓고 삶과 죽음에 관한 퍼포먼스를 했다. 그 작품이 지금까지 레지던스로 만난 작품 중에서 제일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예술가들한테는 ‘안 해도 됨’이라는 게 이렇게 좋다.
레지던시에 와서 작품을 안 해도 된다는 조건인데도 두 개씩 만들어가는 친구들도 많다. 한번은 일본 작가 하나가 계속 작품 안 해도 되냐고 물어보는 거다. 미안했는지 나중에 탈을 가지고 워크숍 하나를 해줬는데 나한테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고 재미있었다. 또 방글라데시 작가는 아무것도 안 하다가 보름쯤 지나서 여기 있는 연못과 산소에서 영상 틀어놓고 삶과 죽음에 관한 퍼포먼스를 했다. 그 작품이 지금까지 레지던스로 만난 작품 중에서 제일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러니까 예술가들한테는 ‘안 해도 됨’이라는 게 이렇게 좋다.
올해 10월이면 제가 느닷없이 평창으로 간 지 만 20년이다. 건강하게 살아보겠다는 개인적인 이유로 시작한 일인데, 이제 전국에서 폐교를 활용하겠다는 곳은 거의 다 제게 문의한다. 사실 작년 위탁 운영 재계약 시점에 공간 운영은 그만뒀다. 엉뚱하게 들릴지 몰라도 바이칼 호수를 좋아해서 왔다 갔다 하다가 재작년부터 러시아 모 대학교 교수를 하게 된 게 큰 이유다.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은, 이제 새로운 20년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다. ‘뭉침과 흩어짐’이 새로운 활력이 되기 위해 어떤 태도의 노력이 필요한지?
개인적으로는 연극마을이 그냥 어린이들 놀다 가는 곳이 되면 좋겠다. 그런데 그냥 놀다가는 공간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마을종합개발사업(농림부)을 준비하고 있다. 연극마을 아래로는 농촌다움이 보이지만, 대부분의 농촌엔 논 옆에 공장도 있고, 논 한가운데 아파트 단지가 있다. 농촌 마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이화1, 2, 3리 이장님들을 설득하고 있다. 가을에는 이화1, 2, 3리에 연결되는 지네산이 없어진 이야기로 세 마을 주민들과 퍼포먼스를 한다. 서너 번만 모이면 공연이 가능하게끔 꾀를 내어 만들고 있다. 미리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곳이 어린이들이 와서 마음대로 노는 ‘원아 없는 유치원’ 같은 곳이 되면 좋겠다. 이게 바로 숲 유치원이 되는 거다. 이 사업을 하려면 100억 원은 들어갈 거 같은데, 정부에서 안 해주면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따로 ‘100억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혼자 카메라 3대 놓고 영상으로 연극을 하는 거다. 이게 어떤 순간에 100억에 팔릴 수도 있겠다.
이곳이 어린이들이 와서 마음대로 노는 ‘원아 없는 유치원’ 같은 곳이 되면 좋겠다. 이게 바로 숲 유치원이 되는 거다. 이 사업을 하려면 100억 원은 들어갈 거 같은데, 정부에서 안 해주면 내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따로 ‘100억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혼자 카메라 3대 놓고 영상으로 연극을 하는 거다. 이게 어떤 순간에 100억에 팔릴 수도 있겠다.
마을과 예술에 관한 철학을 바탕으로 보조사업 개발부터 노무관리, 경영관리까지 예술경영 기법을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단체가 성장하고 규모가 커지면 경영을 감당하기 어려워지기도 한다.
사실 코로나 때문에 무너질 뻔했는데, 문화마을사업으로 인건비 지원도 받고, 시설 개선비로 카페와 도서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지금까지 극단을 유지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배우들과 훈련하면서 계속 뭔가 만들었던 것이다. 그냥 쏟아붓고 말 것 같다가도 이상하게 그게 또 유지되더라.
몇 년 전인가, 아마 세월호 이후였던 것 같다. 봄에 공연을 못해서 연말에 갑자기 ‘100만 원 공연단’이라는 프로젝트가 생겼다. 100만 원에 어떻게 공연을 다니나. 지원받기로 한 팀들이 반납하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난 이때 작은 작품을 미리 만들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조금 힘들다. 노무관리가 안되는구나 싶다. 전통에 기반한 공연을 주로 하는 만큼 훈련이 꼭 필요해서 겨울에 1~2년 차 배우를 모아 한두 달 정도 하드 트레이닝한다. 그리고 5월 정도 시작해서 가을까지 공연 일정을 잡고 가는데, 재작년 상반기에 단원들이 다 그만두는 일이 있었고, 작년부터는 이 프로젝트도 할 수 없어졌다. 그래서 올해는 솔로 퍼포먼스를 주로 했고, 지금 준비하는 영상 연극을 내년 겨울에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아마 세월호 이후였던 것 같다. 봄에 공연을 못해서 연말에 갑자기 ‘100만 원 공연단’이라는 프로젝트가 생겼다. 100만 원에 어떻게 공연을 다니나. 지원받기로 한 팀들이 반납하는 일이 생겼다. 그런데 난 이때 작은 작품을 미리 만들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조금 힘들다. 노무관리가 안되는구나 싶다. 전통에 기반한 공연을 주로 하는 만큼 훈련이 꼭 필요해서 겨울에 1~2년 차 배우를 모아 한두 달 정도 하드 트레이닝한다. 그리고 5월 정도 시작해서 가을까지 공연 일정을 잡고 가는데, 재작년 상반기에 단원들이 다 그만두는 일이 있었고, 작년부터는 이 프로젝트도 할 수 없어졌다. 그래서 올해는 솔로 퍼포먼스를 주로 했고, 지금 준비하는 영상 연극을 내년 겨울에 선보일 수 있을 것 같다.
요즘 방역 규칙이 완화되면서 문화예술 분야도 다시 대면 활동이 중심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간의 경험이 쌓여 있는 상태에서 완벽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단체 운영 역시 구성원들의 경험치가 달라지고 성장하는 만큼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연극마을에서 몇 년 활동했던 친구가 그동안 익힌 노하우로 친구들과 협동조합을 만들어 지금은 화성에서 나보다 더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역이 젊은 예술가들을 유치하고, 그들이 좋은 예술가로 발전하도록 끊임없이 미션을 주고 같이 성장해야 한다. 이번 품앗이공연예술축제에도 화성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함께 했다.
그전에는 나 스스로 예술가라는 말을 잘 안 썼는데 요즘에 와서는 예술가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예술작품을 내놔서가 아니라 지금의 이 기질,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뭔가 목말라 하는 거, 죽을 때까지 그걸 찾아가는 게 예술가 아닐까. 젊은 예술가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들한테서 뭔가 배우려고 하고, 그들이 떨어뜨려 놓고 간 걸 갖고 막 좋아서 잠 못 자고.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아직 쓰러지지 않고 계속 하는 것 같다.
조만간 뭔가 다른 게 올 거라는 생각, 기존의 예술과 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걸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기질상 옛날로 돌아가는 형태는 아닐 것 같다. 뭔가 다른 것이 될 거다. 영상 연극이라는 것도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관객도 있고 영상도 틀고 하는 이런 형태의 새로운 공연을 한번 해볼까.
그전에는 나 스스로 예술가라는 말을 잘 안 썼는데 요즘에 와서는 예술가라는 말을 많이 쓴다. 예술작품을 내놔서가 아니라 지금의 이 기질,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뭔가 목말라 하는 거, 죽을 때까지 그걸 찾아가는 게 예술가 아닐까. 젊은 예술가의 얘기를 귀 기울여 듣고, 그들한테서 뭔가 배우려고 하고, 그들이 떨어뜨려 놓고 간 걸 갖고 막 좋아서 잠 못 자고. 아마 이런 생각 때문에 몸은 지치고 힘들지만 아직 쓰러지지 않고 계속 하는 것 같다.
조만간 뭔가 다른 게 올 거라는 생각, 기존의 예술과 같은 방법이 아닌 다른 걸 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 기질상 옛날로 돌아가는 형태는 아닐 것 같다. 뭔가 다른 것이 될 거다. 영상 연극이라는 것도 두 사람 세 사람이 함께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관객도 있고 영상도 틀고 하는 이런 형태의 새로운 공연을 한번 해볼까.
송인현
극단 민들레 대표, 스쿨씨어터(SchoolTheater) 협동조합 이사장.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 이수자. 극단을 중심으로 민들레놀이극연구소와 민들레연극마을을 운영하며 품앗이공연예술축제를 열고, 자연과 생태가 중심이 되는 연극 운동을 하고 있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 이사장, 아시테지페스티벌(AssiFe) 예술감독을 역임하면서 쌓은 다양한 국제교류 경험을 토대로 새롭고 열린 문화 공연을 만들어 가는 데 앞장서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연극 <깨비깨비 도깨비> <백두 호랑이> <놀보, 도깨비 만나다!> 등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 자전거를 타고 직접 교실로 찾아가는 생태극 <까만 닭>, 어린이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 <똥벼락> 등을 공연하고 있다. 제8회 아시테지 연극상, 2000년 서울어린이연극상 최우수작품상, 연출상을 받았다.
▸극단 민들레 홈페이지 www.md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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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선철
- 예술경영인이자 문화기획자. 감자꽃스튜디오의 대표이며 연세대, 국민대, 경희사이버대, 야쿠츠크 북동연방대 겸임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6기 이사, 2기 문화예술교육종합 계획수립 추진위원, [아르떼365] 편집위원이기도 하다.
potatostudio@naver.com
인스타그램 @potato_sancho
페이스북 @potato_sancho - 정리_프로젝트 궁리 주소진, 남은정
- 사진_박영균 미술작가 infebruary14@naver.com
프로그램 사진제공_극단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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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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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잇고 틀을 깨며 끝없이 추구한다.
정말 예술가 스럽다.
돈 없이도, 남들이 떨어뜨린지도 모르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대표님의 모습을 떠올려보니 저절로 행복해진다.
전통을 잇고 틀을 깨며 끝없이 추구한다
송인현 민들레연극마을‧극단 민들레 대표
공감이 갑니다
전통을 잇고 틀을 깨며 끝없이 추구한다
송인현 민들레연극마을‧극단 민들레 대표
기대만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