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가을 한국전쟁과 기지촌을 주제로 한 작업을 지속해오던 당시 나는 고심 끝에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기지촌 여성의 몸을 소환하여 망자의 고통을 현재의 ‘나’ – 퍼포머가 입음으로써 기억해내는 영상작업 <몸, 부름, 말> 그리고 연결된 주제의 사진, 텍스트드로잉들을 조심스레 전시에 내놓았던 적이 있다.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 단 한 사람의 특별한 서사가 아닌 한국 땅에 수많은 여성의 삶이라는 점, 그 고통이 현재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제대로 문제해결이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리서치와 현장 답사를 통해 인식해가면서 예술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거듭 고민하던 시간이 있었다. 어둡고 좁은 긴 터널을 혼자 걷고 있는 것만 같은 막막함 속에서 내가 하는 예술 행위를 ‘애도’이자 지속해야 할 수행적 의미의 ‘연습’이라는 의미를 담아 프로젝트의 전체 과정을 ‘애도 연습’이라 칭했다.
타자가 될 수는 없지만 타자의 고통을 기억해내기 위한 애도 연습의 여정이었음을 전시로 풀어낸 날 동료들의 발걸음이 반가워 분주했던 기억이 난다. 늘 그렇지만 삶을 살아가는 것이나 예술을 한다는 것이 기대와 달리 순조롭지만은 않다. 특히 예술은 아무리 공을 들여도 전시를 통해 관객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에는 내 손을 빠져나가 내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서 제멋대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버린다.
작품을 본 동료가 조심스레 다가와 물었다. “만약에 이 작품을 기지촌 여성분들이 보신다면 어떨까요?” 피로감에 짓눌려져 있던 몸이 화들짝 놀라면서 멍해지는 순간이었다. 동료의 질문은 그 이후로 계속 뇌리에 남아 마음을 할퀴는 듯했고 동료에게 미처 답하지 못한 채 몸 안에서 웅크린 나의 대답은 애도가 아닌 상처였다. 망자들과 더불어 살아계신 분들께 이 작품이 위안보다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것을 더 이상 변명하지 않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해 겨울 갖은 노동과 고민의 여정으로 버무려진 작업 <애도 연습>은 노란 폴더 안에 오므려 두꺼운 외장하드 안에 깊숙이 넣어 두었다. 억울함과 수치스러움, 다시 또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번민이 뒤범벅되던 그즈음 예술가로서 선택할 수 있었던 건 다시, 제대로, 처음부터 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난 후 경기도 의정부시에 위치한 작은 기지촌 마을 빼뻘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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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가는 아침>
(황재영, 종이 위에 디지털 프린트, 60x86cm, 2021)
매일 아침 유치원 차를 타러 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일곱 살 딸아이와 마을 초입의 풍경 -
<내 친구네 집>
(고중주, 종이 위에 디지털 프린트, 60x42cm, 2021)
나이 들어 아픈 곳이 많아진 동네 친구의 집을 방문한 날
친구 집 뒤뜰 마당에 핀 꽃과 우연히 찍힌 그림자
빼뻘마을 주민 사진전 《친애하는 나의 오늘》 전시 작품. ‘당신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순간)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주민들이 일회용 필름 카메라로 2주간 여행하듯 자기 삶을 사진을 통해 새로이 마주하는 예술 활동.
능동적인 휘말림, 전이되는 세계
나는 가끔 내가 잘 모르는 어떤 확고한 ‘인생’이라는 것에 휘말려져 있다고 느낀다. 탄생과 죽음의 여정에서도 그러하듯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매우 불충분하고 복잡한 세계에 휘말려 ‘나’라는 것에 갇혀 산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예술만은 삶의 과정 속에서 나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 선택과 자유를 끊임없이 허락해 준다. 그래서 예술을 통한 모르는 삶과의 휘말림은 늘 수동이 아닌 능동인 것이다.
다시,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선택한 작업 방법은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전하게 주민을 만날 수 있는 장소, 또 관계의 여정을 시각화하여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당장 작품을 만들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닌 삶의 주름으로 가득한 지역 곳곳을 시시때때로 산책하는 ‘걷는 행위’와 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행위’를 충분히 하고자 했다. 그렇게 내 삶을 빼뻘이라는 마을 안으로 옮겨 놓으며 행했던 걷기와 듣기는 환대받지 못하는 예술, 낯선 이물질과 같은 예술가라는 존재를 지역과 연결해 주었고 모르는 삶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이야기란 살아있는 어떤 세계였다. 듣는 행위를 통해 모르는 이의 세계가 나의 세계로 전이되면서 다른 이의 삶이 나의 삶으로, 나의 서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빼뻘에서 만난 이들의 삶의 서사는 순조로운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전쟁과 함께 부모를 잃고 황해도 고향을 떠나 떠돌이처럼 전국 팔도를 돌다 마을에 정착하게 된 한 노인은 나를 만난 3년 동안 내내 소양강을 건너고 싶다고 말했다. 클럽 지배인을 하기도 했고 미군 부대 세탁일 등을 하며 살아온 노인은 평생 호된 고생으로 살아왔지만 땅 주인에게 쫓겨나 60년간 가족을 돌보며 살아온 집을 떠나야 했다. 내가 마을에 온 해 노인의 오래된 집이 허물어졌고 그의 집으로 가기 위해 걷던 굽은 골목도 사라졌다. 노인은 다 버리고 숟가락과 냄비 세 개, 이불 하나만을 들고나와 몸이 아프지 않은 날이면 망부석처럼 마을 초입 낡은 의자에 앉아 건너편 재개발이 한창인 시멘트 바람을 맞으며 태양 볕 아래 몸을 말린다. 노인이 살던 사라진 집터에서 발견된 부스러진 비닐조각과 슬리퍼 고무 조각, 자갈처럼 갈리어진 플라스틱은 사람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점들이었다. 여전히 모르는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점들이 내게 말을 걸고 있었고 흙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터와 집이 하나인 기지촌 여성을 엄마로 두었던 아이는 곁에서 폭력적 삶을 경험하며 ‘내가 떠나면 엄마가 지금보다 고생을 덜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입양을 선택했다. 지금은 기지촌 여성의 아이들이 살던 빼뻘마을에서 제소자인 아버지와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억하며 조부모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미군 부대의 평택 이전과 함께 더 이상 짜장면을 팔지 못하게 된 한 부부는 높아진 토지 임대료에 10년째 H마트 점원으로 일하며 누굴 위해서 일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싸울 힘도 없다며 살아온 이야기를 더듬었다. 미군으로 가득했던 식당은 러시아 인부들의 숙소로 사용되어왔는데 이제는 코로나로 인부들마저 돌아오지 못한 채 빈 공간이 되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하얀 천과 좁은 방에 쌓여있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신었을 흙 묻은 신발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이주 노동자들의 남은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다. 닭 농장을 했던 한 주민은 조류 인플루엔자로 키우던 닭을 모두 살처분하고 빚을 진 채 살 곳을 찾아 8년 전 마을에 들어와 지인과 친인척 등 모든 연을 끊고 살아오다가 이제 노인이 되었다.
빼뻘 주민의 삶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개인의 삶이 아닌 개인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 사회구조 안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빼뻘에는 이미 우리 삶 가까이에 존재하면서도 숨겨 놓지 않았지만 보지 않아서 ‘바깥’이라는 저편의 삶이 되어버린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 한국전쟁, 기지촌의 역사와 여성의 삶과 제대로 소통하고자 멈춘 발걸음은 내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저편, ‘우리’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로 바꿔놓기 시작했다. 세계 속에 수많은 ‘그것’들은 그것이 아닌 ‘나’이자 ‘너’로 연결된 존재이면서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며 예술이란 사람 넘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질문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마음을 흔들고 변화를 갈망하는
주민과의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빼뻘에서만 3년간 이사를 세 번 다녔다. 첫 번째 공간은 70평이 넘는 3층의 커다란 미군 전용 클럽이었고 두 번째는 문 닫은 구제 옷 가게, 세 번째는 전당포, 양복점을 거쳐 2017년까지 미군 전용 바(bar)로 운영됐던 작은 공간이다. 주민의 배려로 적은 비용에 공간을 운영할 수 있었지만 6개월, 1년을 살다 나가는 일이 되풀이되면서 3년 차에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더 머물기 위해서는 제대로 세를 얻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어떻게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2021년 여러 기관의 도움을 받아 마을에 예술공간을 열었다.
빼뻘에서 진행할 수 있는 프로젝트라면 뭐든 보태어 지속해볼 마음으로 갖가지 공모에 지원했고 늘 더 많은 것을 해야겠기에 가난했지만 마을에서의 예술 활동을 지속하며 예술이 삶을 변화해 나갈 수 있음을 나는 몸소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화장실 없는 공간에서 머물며 작업하는 것이 불편하지만 가능한 것이 되었고, 주민과의 워크숍 도중 천장에 빗물이 새어도 웃음이 났다. 얼마 전엔 한겨울이라 수도가 얼면 어쩌나 잠시 걱정하던 중 “작가님, 수도 얼지 말라고 똑 똑 똑 물 흐르게 해놨어요.”라고 말하는 반가운 주민의 목소리에 또 웃음이 난다.
70년간 드나들 수 없었던 미군 부대 장벽만큼이나 마을 사람들의 삶 안으로 진입하기 어려웠던 지난 3년. 그 짧은 시간을 더듬으며 삶이 어떻게 예술과 더해져 공동체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지, 어떻게 예술이 개인의 마음을 흔들고 뜻하지 않았던 변화를 갈망하게 되는지를 지역에서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빼뻘보관소’라 이름 붙여진 작은 예술공간은 장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예술을 통해 경계 없음을 이야기하며 누구나 예술을 통해 환대받음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의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고 보관하려고 한다. 예술 그리고 삶은 지금 여기에도 있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저기, 바깥과 언저리에서 더 큰 울림으로 생생하다.
- 김현주
- 시각예술가. 아티스트커뮤니티 클리나멘 대표. 독일 카셀국립대학교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했다. 지금 만나는 사람, 내일 만나는 사람, 일 년 후 만날 누군가가 되기 위해 ‘아무도 아닌 나’가 되려고 애쓴다. 누군가가 되고 또 누군가와 대화하기 위해 질문을 만든다. 예술이 보이지 않는 ‘우리’를 위한 것, 그 보이지 않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 믿으며 예술의 공공성에 대해 고민한다. <빼뻘-주름 프로젝트 2019> <손손수수:108명의 시민이 참여하여 만드는 손의 대화법 2019> <빼뻘-시공을 몽타쥬하다> 작업과 빼뻘마을의 일상을 담은 주민 전시 《친애하는 나의 오늘》(2021)을 공동기획했다.
www.facebook.com/dalohyunjoo.kim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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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어떻게 삶을 흔들고 갈망하게 하는가 정말 너무나도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