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지천통(絶地天通)이라니. 초장부터 무슨 낯선 말일까 싶을 거다. 이건 지천통(地天通) 즉 “땅의 입장에서 하늘과 통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그 통해있는 상태가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끊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그게 무슨 뜻인가. 주변을 잘 보라. 예술가들은 넘쳐나는데 정작 예술 현장[scene]의 파노라마는 격동하지 않고 개별적인 예술 작업은 여전히 과거의 모더니즘 언저리를 다리 다친 물방개처럼 뱅글뱅글 돌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절지천통 상태에서는 이런 질문에 극히 취약해진다.
사실 아득한 태초의 낙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상한 회고주의 취향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신과 인간과 동물이 행복하게 교류했던 시절에 나타났던 징후를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이 됐건 『산해경』의 여러 고장이 됐건 모든 생명계의 구성원들이 서로 몸을 바꿔가며 서로 ‘인간’이라는 간이역에서 모이면서 대칭적인 동시에 순환적인 흐름 속에 있었다. 물론 이것은 지천통이라기보다 천지통(天地通)에 더 가깝다. 즉 하늘의 입장에서 땅과 통해 있는 상태이다. 하늘의 이법(理法)이 땅과 그 영역에서 사는 생명체들을 두루 건사하고 직접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낙원이다.
하지만 지천통 하려고 할 때는 양상이 다르다. 모세가 떨기나무의 빛다발이 가득한 산정에 올라 신의 말씀이 적힌 일종의 천부경을 가져온다거나 야곱이 신의 사자와 밤새 씨름하다가 하늘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동양에서는 무(巫)와 격(覡)이라는 샤먼들이 사다리를 타고 그와 같은 동일한 행위를 했다. 무산(巫山)의 구름은 사다리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좌우간 이러한 지천통의 지향은 동서가 고대에 동일했다. 그런데 왜 이런 지향성을 보여준 것일까. 거기에는 이미 절지천통(絶地天通)되어 있는 현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이 고대적 개념으로서 절지천통에 등장하는 천(天, 하늘)과 지(地, 땅)를 좀 더 현대적으로 번역할 필요를 느끼는데,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 천(天) = 하늘 = 기지류(氣之流) = 정보적 역동성
• 지(地) = 땅 = 기지행(氣之行) = 총체적 관계장
• 지(地) = 땅 = 기지행(氣之行) = 총체적 관계장
이렇게 번역했을 때,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의 계시적 관계가 과거 계몽주의 시기 칸트가 하늘의 별과 마음의 윤리 사이를 매듭지었던 일종의 성리학적 결합과 나란히 두고 생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이미 사라진 ‘하늘의 별’을 다시 검토할 여지를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예술의 관점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정표 비슷한 것을 어렴풋이 함께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근대란 르네상스라는 절지천통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과학의 발생과 더불어 인문주의를 표방한 문명이지만, 그 안에 여기서 말하는 ‘하늘’ 개념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근대와 태초 사이의 은밀한 계약에 관해서는 철학자 벤야민과 아감벤 등이 이미 환히 밝힌 바 있지만, 물론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중세 신관념 하에서의 하늘이라기보다 휴머니즘 안에서 발견된 하늘이다.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던은 이 ‘하늘’이 종말을 맞이하는 가운데 유희적이고 자폐적인 카니발을 벌인 것으로 그 후 극심한 허무주의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본래 천지통(天地通) 기반의 서양문명에서 주를 삼는 숭고미학조차 상실한 형태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서구의 시계(視界)가 끝난 이후부터 덩달아 절지천통의 깊은 만곡(彎曲) 속에서 새로운 만곡(灣谷, 물굽이 있는 계곡)을 만들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좀비-모던이다, 비근대다, 기타 등등 여전히 ‘근대’라는 나름의 지천통이 소멸한 것에 대한 향수[Nostalgia]와 불가능한 꿈을 얼싸안고 그 언저리에서 소일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 저 바닥에서는 이름 모를 예술의 움직임들이 스멀거리고 이글거리고 있다. 단지 여기에 어떤 타이틀을 붙여주고 어떤 지향점을 부여할 것인가를 우리 예술 현장[scene]의 사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지천통으로 생겨난 근대를 작금의 시대에 천지통, 즉 수직적 위계의 규제이념으로 다시 부르려고 하는 것은 허망한 짓임을 우리 스스로 확철히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깨어진 서구의 기독교 시간관과 그로부터 비롯한 역사주의적 패러다임이 이미 끝났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시계(들)’가 도입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연결된다.
지천통(地天通), 즉 땅의 입장에서 하늘과 통하기 위해서 꼬치꼬치 수개월을 캐물었던 수운 최제우 선생처럼 이제는 하늘과의 수직적 위계가 아닌 방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뢰(地籟)와 인성(人聲), 즉 땅의 퉁소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장애 예술, 커뮤니티 댄스, 일군의 여성적 연대-텔레파시 만발한 안무, 여신 신화를 신체적으로 접근해오는 미술의 움직임 같은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아직 특정한 비평적 조망도 본격화하지 않고, 무엇보다 어떤 비평적 판단의 준거가 없는 실정이다. 그래서 위와 같은 서론 비슷한 이야기를 깔게 된 것이다. 다음 기회에 본론을 이야기하겠다.
- 김남수
- 무용평론가. 미술기획자. 백남준아트센터, 국립극단,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에서 일했고, 제10회 서울미디어시티 비엔날레 콜렉티브 감독으로 활동했다. ‘확장된 안무’ 개념을 바탕으로 공연, 미술, 다원 등을 연결 짓고 있다.
kiapenu@gmail.com
(프로필 사진 ⓒ 양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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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지천통 시대-격동하는 예술을 위하여
예술의 본질에 관한 서론
정말 너무나도 기대만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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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너무나도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