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탐험이 끝나는 때는
시작이 어딘지 알아내는 순간이다.”
– T.S. 엘리엇 –
예술의 본질에 대한 원고청탁을 호기롭게 받았으나,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자판을 두드릴 수 없는 실어증에 빠져버렸다. 허세 한 번 부려봤다가 된통 독박 쓰게 생긴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이 참담함, 이 생소한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비루한 정신머리는 자꾸만 도망치려고 한다. 형광등 불빛이 닿지 않는 책상 밑 그늘막으로, 두꺼운 이불 속으로, 어둠으로, 자궁으로 기어들어 가려고 한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내 안의 옹졸함과 편협함 그리고 비겁함이기 때문에 나는 웅크려 숨어보려 하지만, 빛이 부재하는 곳이 없다.
멀리 더 멀리
1608년 어두운 하늘을 관찰하는 망원경이 발명되었다. 이 ‘새로운 눈’은 우리의 동화적 상상력과 맹목적인 믿음을 저버리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거울처럼 매끈할 줄 알았던 달은 울퉁불퉁한 돌덩이였고, 완전무결하다고 믿었던 태양에도 검은 점들이 있었으며, 목성과 토성도 지구처럼 달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멀리 볼수록 진실에 다가간다는 생각에 더 크고 더 정밀한 망원경을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급기야 하늘 너머 저 캄캄하고 컴컴한 어둠에까지 ‘새로운 눈’을 올려보냈다. 그중 보이저 2호는 탐험을 떠나기 전 뒤 돌아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작고 외로운 알갱이 하나에 지나지 않은지를 알려주었고, 허블은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으로 눈을 돌려 시간 낭비만 할 뿐이라고 조롱하던 목소리들에 놀라우리만치 다양하고 광활한 은하가 펼쳐져 있음을 보여주며 무지함에 일침을 날렸다. 지난 크리스마스 날에 쏘아 올린 제임스 웹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눈’을 달고서 따가운 태양 빛을 가려줄 지구의 그늘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보려고 하는 것은 가스와 먼지구름을 뚫고 넘어오는 미약하고 희미한 파장을 더듬어 올라가 우리가 알던 것을 뛰어넘고, 우리의 시간까지도 뛰어넘어서 ‘최초로 빛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밝음을 보기 위해서 어둠을 찾아가 우리의 근원 ‘우주의 새벽’을 보려고 한다. 오늘날의 과학은 동시대 예술에게 묻는다. 궤도 밖을 벗어나 다르게 본 적이 있는지, 멀고 깊은 어둠을 인내하며 바라본 적은 있는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를 수행할 용기가 있는지….
가까이 더 가까이
요즘 출시되는 TV의 해상도를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어쩜 이리도 선명할 수가 있단 말인가. 머리카락 한 올, 땀 한 방울까지도 보여준다. 노안이 오기 시작해 초점 조절 장애를 겪고 있는 내 두 눈이 보는 것은 환상 그 자체가 되었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세계와 모니터 앞의 가상세계는 완전히 다른 무엇이다. 나는 생각한다. 기술의 해상도와 인식의 해상도가 손을 맞잡고 함께 올라갔을까? 시대의 언어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존잘’ 또는 ‘존멋’. 오늘날의 언어는 속도 경쟁의 리듬을 타고 토막 살해당하고 있다. 눈에 들어온 정보를 번역하지 못하는 언어는 문맹으로 퇴보한다. 우리의 눈에 비치는 입체감은 뇌가 만드는 착시현상으로 개개인의 세상은 신경세포의 연결 정도에 따라 다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유전성과 경험치 그리고 우연적 요인이 뒤섞여 수많은 인식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과 문자는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고 공표하며 암시를 건다. 예술의 언어는 죽었다. 다만, 예술 자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는 사이언스 픽션의 세계에 살고 있다. 하이퍼리얼리티는 현상 자체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간다. 실재의 반영은 이미 오래전에 넘어섰고,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더니 실재와 관계없이 독자성을 갖게 되었다.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 시대를 생존한다. 민낯이 가짜가 된 시대다. 리얼 버라이어티 쇼 <우리 결혼했어요>처럼 진짜 부부보다 더 진짜로 보여야만 살아남는다. 실재의 삶보다 가상공간에서의 존재감이 더 중요해진 시대를 누가 만들어 냈는가. 미디어는 오염되었다. 사생활을 엿보는 관음증을 프로그램화하고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믿게 해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시청률과 타락의 내비게이션은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의 몸은 이상 반응이 없다. 마비가 만연한 세상이 되었다. 우리는 이미지의 정치술에 포획되어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우리를 묶어두기 위해 넌지시 백설공주의 사과를 건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머지않아 우리는 유리관 안에서 잠들고 백마 탄 왕자님의 키스를 기다리며 좀처럼 깨어나길 거부할지도 모르겠다. 왕자가 시체 애호가인 줄도 모르고.
문지기 넘어 문지기
축구는 닫혀있는 문에 구멍을 내는 게임으로 어느 순간 관중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면, 판타스틱한 득점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억눌린 감정들을 다 함께 뿜어내는 공동체 의식을 맛보게 된다. 골맛은 고삐 풀린 자유이고, 허용된 광기이며, 쾌변의 시원함을 비움의 미학으로 체감하도록 이끈다. 그런데,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이 환희의 순간들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한다면 어떻게 될까. 실상 팬데믹으로 온 세상이 움츠러들어 모든 스포츠가 멈춘 적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존재 가치를 느낀 유일한 순간이지 않았을까. 마치 무언가가 도려내진 것 같은 상실감을 맛봤기 때문이다. 각본과 컴퓨터 그래픽 없는 유일한 현실세계이자 순수한 신체성이 겨루는 공정한 게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날것의 몸이 한계까지 움직이는 문화적 볼거리가 기계처럼 멈춰 섰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하나의 힌트가 있다. 예술은 구멍을 땜빵해서 문제를 없던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멍의 주위를 맴돌면서 구멍을 더 잘 볼 수 있게끔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에겐 골대처럼 감정이 드나들 수 있는 신비한 문과 구멍을 내는 슈터가 필요하다. 슈우웅~ 감정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문 앞에는 힘세고 날렵한 문지기가 가로막고 있다. 슈터는 기민한 페이크 기술과 빠르고 정확한 타이밍을 조절할 수 있는 단련된 신체로 맞서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운 궤적을 그릴 줄 아는 심미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 ‘멋’은 하루아침에 갖출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다. 닮지 않으려고 유행과 거리를 두고 뻘짓과 삽질의 허무함을 묵묵히 견디며 인정욕구에 의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엿볼 수 있는 지고하고도 은밀한 영역이다. 왜냐하면, 이 문은 개별적이고 독립된 주체 말고는 아무에게도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임상빈
글·그림_임체스(임상빈)
체스의 상징과 행마법으로 미적 감각과 삶의 행동 패턴을 연결 짓는 체스점술 작업에 빠져 있으며, 혼이 담긴 구라의 경지를 꿈꾸고 있다. 2021년 활동으로는 전시 《최악의 교육자는 예술가가 아닌 교육자이며, 최악의 예술가는 교육자가 아닌 예술가이다》, 포럼 ‘강아지와 산책 중에 개똥봉투가 없을 때’, 워크숍 <말랑말랑하고 단단한 ⓁⒶⓂⓅ>를 기획했다. 최근 예술교육실천가로서 뜻을 세우며 활동의 지표로 삼고 있는 포지션은 낮은 곳에서부터 교육개혁을 일궈내고 싶은 아나키스트, 예술교육실천가가 존경받는 세상을 꿈꾸는 몽상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바우하우스 계승자,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운동 전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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