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을 쌓고 규칙을 비틀면 틈이 생긴다

[대담] 함께 만드는 사이 공간

대담개요
일 시 : 2024.9.26.(목) 오후 4시
장 소 :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참석자 : 지정우 건축가·이유에스플러스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가, 최도인 메타기획컨설팅 본부장(본지 편집위원)
  • (왼쪽부터) 지정우 건축가, 최도인 편집위원
최도인  문화예술교육 안에서도 문화와 예술, 예술과 교육이 역동적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축하기도 하고, 서로 간 교류하고 융합되기도 하고, 사용자들에 의해 재해석되기도 한다. ‘사이 공간’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그 역동성을 다뤄보고자 한다. 특히 ‘사이 공간’에서 ‘공간’의 의미를 짚어보고자 오늘 대담 자리를 마련했다. 대담 장소로 건축가님이 리모델링 설계를 한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를 선택했다. 특별히 이 공간을 추천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지정우  짧은 시간이지만 앞서 공간을 둘러보신 것처럼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이하 공터)는 공공 공간임에도 이용률이 높다. 통계상으로 이용률이 높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실질적으로 청소년, 주민의 일상생활과 아주 밀접하다. 심지어는 이 지역의 어떤 커뮤니티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어서 더 애정이 가는 프로젝트이다. 예술교육 관련한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면서 어린이·청소년, 지역 주민에게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고 또 퍼져나가는 공간이어서 오늘 주제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공터는 건축가의 역할이 10~20%라면 나머지는 이곳을 운영하고 콘텐츠를 생산하고 소통하며 사용하는 사용자에게서 그 힘이 나오는 공간이다. 사실 공공기관 중에 아무리 멋지게 디자인해서 만들어도 조금 쓰이다 그냥 사그라들거나 버려지는 공간도 많다. 디자인을 요청하는 분들은 완성되면 그게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공간이 완성된 시점부터 공간의 생명력은 시작되는 거다. 그런 점에서 공터는 그 생명력이 정말 풍부하게 살아나고 있는 공간인 것 같다.
최도인  어린이·청소년만을 위한 공간이라면 약간의 편견을 가지기도 하는데 공터 공간을 둘러보다가 흥미로웠던 점은 도서관이나 다른 층에도 청년, 장년 등 어른들도 이 공간에 같이 있더라. 어떻게 보면 세대와 세대 사이로 어우러진(mingling) 특별한 공간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지정우  어린이·청소년은 주된 유권자가 아니다 보니 요구 조건이 잘 반영되지 않고 밀려나게 되는 공간적 소외계층 중 하나이다. 단순히 모든 세대가 쓰는 곳과 청소년 전용 공간이 붙어만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시너지를 낸다. 리모델링이 되기 전에는 병렬적으로 공간이 단절되어 있어 소통하기 어려웠다. 리모델링으로 공간이 개선되면서 주민의 관심과 청소년 지원 활동이 더욱 시너지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공터에는 청소년, 주민 자치 등 약 100개의 동아리가 활동하고 있는데 주민 자치 동아리에서 청소년들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과 행사를 기획한다. 그런 걸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됐다는 점이 뿌듯하기도 하고 여타의 공공기관과는 다른 점이 아닐까 싶다.
최도인  이 공간에서 정말 여러 사이 공간을 발견했는데, 특히 계단실을 포함해서 벽마다 여러 가지 안내 대자보도 있고, 도서관 북토크 참여 후기도 있더라. 벽면 하나하나 이용자가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설계가 아닌, 이미 여러 커뮤니티가 사용하는 공간을 설계하면서 사용자를 위해 공간의 질을 높이기 위한 도전이 있었을 것 같다. 지금껏 이렇게 사용해왔는데 왜 바뀌어야 하는지 이용자의 생각이나 주장도 있지 않나.
지정우  공터는 일반적인 공공기관과는 다르게 공공(구청)과 민간(스페이스 T 추진단: 책읽는 사회문화재단+도서문화재단 씨앗+씨프로그램) 예산이 절반씩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민간재단에서 펀드를 조성해서 도서관을 바꾸는 사업을 진행했는데 청소년 도서관 프로젝트의 두 번째 장소로 공터가 참여하게 되었다. 설계비가 구청이나 시청에서 나온 게 아니라 민간재단에서 나오니까 우리가 훨씬 자유로웠다. 우선 설계 과정에서 형식적인(?) 보고 과정이 없었다. 그런 자유로움에 더해서 책임이 있었는데, 우리가 계속 해왔던 ‘사용자 참여 설계’를 하는 것과 추진단과의 월례회의를 통해 서로 조율하며 마음을 합쳐가는 과정이 중요했다. 우선 청소년들과 세 번의 워크숍을 통해 사용자 참여 단계를 거쳤다. 그 사이 사이에 공간 운영진과의 워크숍을 두 번 진행했다.
최도인  그럼 운영자, 사용자 모두 다 클라이언트가 되는 건가?
지정우  좋게 얘기하면 주민과 한마음 한뜻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간인데, 사실 공간 만들기에서 가장 어려운 프로젝트가 지역 재생, 마을 만들기, 교회나 학교처럼 사용자가 많은 프로젝트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 모두가 클라이언트라면 목소리가 하나로 통일되기 어렵다. 당연히 통일될 수도 없는 거고. 사용자 참여 설계 워크숍 과정은 통일된 목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생각과 의견을 설계자로서 공감하고 이해하는 단계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 어쨌든 ‘설계’라는 영역은 전문적이다. 물론 배치를 이렇게 저렇게 해볼까 하는 연구를 일반 시민이나 어린이·청소년과 해볼 수 있지만, 기술적인 부분이나 재료, 예산 등 현실적이고 전문적인 고민은 건축가의 몫이기 때문에 건축가가 설계를 주도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용자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하고 설계하는 것과 서류나 통계 자료만 보고 설계하는 것은 천양지차인 것 같다.
워크숍은 사용자, 운영자의 의견이 계속 붙는 작업이다. 기존에 있던 공간을 청소년들은 이런 점에서 아쉬워하고 운영자들은 그건 그렇게밖에 쓸 수가 없었던, 그동안 서로 말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워크숍을 통해서 공유되었다. 공터 사용자 의견 중에 재밌던 것은 많은 방을 요구했던 거다. 노래방, 만화방, DVD방. 그런데 방을 만들려면 벽을 치고 문을 달아야 한다. 일반적인 상가 건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방’을 요청한 거라고 인식했다. 상업 공간의 문법이 아닌, 트여 있지만 만화도 DVD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설득했다. 공간을 그렇게 써본 적이 없으니 처음에는 저항감이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하면서는 만족도가 훨씬 좋아졌다. 용도를 정한 방은 그 용도로만 쓸 수밖에 없다. 느슨한, 그야말로 ‘사이 공간’이 되면 훨씬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만화책 보러 왔다가도 저쪽에서 영화 보는 게 눈에 보여야 ‘오늘 저 친구랑 같이 영화를 볼까’ 하는 자발적인 욕구, 단서를 촉진할 수 있는 거다. 우리도 재미있었지만, 워크숍에 참여한 청소년들도 몰랐던 점을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최도인  그간 사용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 설계, 사용자 참여 설계를 중요하게 말씀해오셨다. 특히 어린이·청소년은 의사결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의 사용자 참여 설계에 관한 원칙이 있을 것 같다.
지정우  사용자 참여 설계로 다음 세대를 만나게 되면서 시작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까 저의 어린 시절과도 닿아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기성세대는 70, 80년대 우리나라가 한창 발전하던 시기에 성장했고, 그냥 문화센터나 체육관이 생기면 이용자로서 수동적으로 사용했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된 공간이 만들어지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어서 민주주의도 참여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도 참여가 활성화된 것처럼 교육도 마찬가지다. 교육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마지막 텍스트는 공간인 것 같다. 참여를 통해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를 만들거나 하는데, 최종적으로는 공간 사용자로서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공간에 대한 자주적인 의견이 들어가는 단계까지가 가는 게 가장 큰 목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지금의 아이들이 우리가 성장했을 때와 똑같은 과정으로 성장하면 미래가 별로 달라질 게 없지 않나. 아이들이 기성세대, 어른이 되었을 때 더 나은 시민사회와 환경이 되려면 이들이 성장하는 공간이 달라져야 한다. 사용자 참여 설계에서 가장 큰 원칙은 그들의 목소리가 가장 중심이 되는 것,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자주적으로 자기의 고유함을 드러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 공릉청소년문화정보센터 워크숍(2020)
  • 용암초등학교 꿈담놀이터 어린이 워크숍(2020)
최도인  예전에는 공간을 ‘주어진 조건’으로 인식해왔다면, 능동적으로 그 공간을 만들고 이용하는 적극적인 과정으로서 사용자 참여 설계와 그 안에서도 특히 미래 세대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사실 ‘공간’이라는 말이 한국 사회에서 조금 잘못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하거나 소프트웨어에서도 콘텐츠를 구분한다. 그러면서 소프트웨어와 운영 콘텐츠는 굉장히 자기화하는데 하드웨어는 타자화하는 것 같다. 소장님이 생각하시는 공간의 개념은 무엇인가? 공간을 어떻게 정의 내리고 있나?
지정우  말씀하신 것처럼 너무 구별되어 있기도 하고, 특히 프로그램이나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많이 얘기하는데, 사실 공간이 콘텐츠(프로그램)과 잘 붙어 있어야 한다. 공간이 서포트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없던 프로그램도 생길 수 있을 정도로 촉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공간이 현실 제도 속에서 만들어질 때는 그냥 하드웨어에 그쳐 버린다. 이를테면, 애들은 공터에 축구공 하나만 던져주면 알아서 잘 논다는 생각과 비슷한 거다. 물론 그렇게 해도 잘 놀지만, 기성세대와 다음 세대가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공간을 연구한다면 훨씬 다양하고 창조적인 생각이나 자주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공간이 만들어질 수 있다. 지금까지는 ‘뭘 그렇게까지 하냐’라는, 어른들로 하여금 지레 포기하게끔 하는 어떤 수준(level)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단계를 조금 넘어가면 공간 자체가 사람을 환대할 수 있는 장치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사람이 적극성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곳이 공간이기도 하다. 학교가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 명의 교사에 의해서 전체가 활동하고, 학교 끝나고 가는 무수히 많은 학원에서는 정말로 피동적인 소비자의 역할만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방식과 공간에서 성장한 아이들이 커서 뭔가를 결정하고 바꿔나가는 입장이 됐을 때 다른 여지, 사이나 틈이 있을까. 그런 것들을 조금 더 경험을 해보고 자기가 주도성을 더 가질 수도 있는 자치적인 활동이 가능한 공간이 필요하다. 그 경험들이 몸속에 근육처럼 남아있으면 커서 그것이 힘이 되기도 하고, 연구도 할 수 있다. 그렇게 돼야 우리 사회가 한 발짝 더 나아가지 않을까.
최도인  주제인 ‘사이 공간’은 ‘제3의 장소’라고 생각했다. 제3의 장소는 나의 의지가 반영되기도 하고 여러 커뮤니티가 섞이기도 하는 공간으로 해석한다. 말씀하신 ‘공간’이 대상이 아니라 내가 능동적으로 같이 가는 하나의 존재, 동반자 같은 공간, 성장의 동반자로도 해석된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EBS가 함께한 전시 《예술가의 물건》 인터뷰 에서 “생각의 겹, 소통의 겹”, 겹(layer)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지정우  어린이들과 활동하다 보면 많은 어른이 잘못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어린이·청소년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거라고 생각한다. ‘뭐 좋아해? 이걸 원해? 그럼 그걸 만들어 줄게’. 이런 식의 관계가 되면 뭔가 정답을 요구하는 것이거나 반대로 뭐든지 이야기하면 다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는(spoil) 거다. 원하는 걸 이야기했더니 뚝딱하고 다 만들어졌다고 아이들이 판단하게 되면 직업에 대한 진지함이나 다양성, 앞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단계 단계가 중요하다. 한 번에 변하는 게 아니라 그라데이션(gradation)처럼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마치 여러 장의 트레이싱지(tracing紙)를 겹치듯이, 오늘은 이렇게 생각을 해봤는데 옆 사람과 얘기하다 보면 자기 생각에 더해서 내일은 조금 더 발전시킬 수 있고, 모레는 조금 더 발전하는, 그렇게 소통이 겹겹이 쌓여나가는 거다.
최도인  생각이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 생각의 레이어(layer)인가.
지정우  맞다. 그런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거다. 자기 방, 자기 집을 꾸미는 거라면 혼자의 생각과 결정으로도 된다. 공공 공간은 어린이·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공간을 공유하고 활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조정이나 약간의 양보, 서로 맞춰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은 시민사회 활동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공공 공간을 만들 때는 한 명의 의견만 중요한 게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겹쳐 보면서 서로의 영향, 영감을 주고받아서 발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겹’이라고 표현했다. 그럴 때 ‘겹’은 각자의 의견을 각기 담는 것만이 아니다. 그건 설문 조사처럼 각자의 의견 제시일 뿐이다. 우리가 하는 워크숍에서도 활동을 기반으로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발전을 위한 과정을 단계별로 거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견이 백퍼센트 다 들어갈 수 없더라도 수긍하게 되는 거다. 내 생각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 우리가 고민했던 점을 건축가는 이런 식으로 풀어냈구나 하는 조정과 합의의 과정이 내포되는 거다. 그런 점에서 레이어, 겹이 중요하다.
최도인  생각과 소통의 겹이라는 게 내 생각이 발전하는 과정도 있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 위에 겹치는 ‘과정’이다. 우리 사회가 프로세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면서 개선된 점도 많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 레이어를 쌓아가며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아직 많이 부족한 것 같다. 효율성이 중요한 건축 프로세스에서는 어려움이 더 많을 것 같다. 저도 현업을 하면서 많이 느끼는데, 예를 들면 지금의 많은 계획은 설계를 위한 지침을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설계와 공사가 이루어진다. 어떻게 보면 건물이 ‘결과물’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올바른 공공 건축, 특히 문화예술교육 공간도 조성을 위한 시작 지점에서 사용자가 참여할 수 있는 계획과 지침, 설계 과정에서의 피드백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학교뿐 아니라 여기 공터 같은 커뮤니티형 공간, 또 놀이터 설계도 많이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배움의 공간’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있지만, ‘창작 공간’처럼 조금 더 주도적인 공간으로 계획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러 공간 설계에서 어느 쪽이 주도하느냐에 따라 공간을 구상하고 계획하는 데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선호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지정우  저는 제3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미술관, 박물관 같은 문화공간이나 어린이·청소년 센터, 도서관, 놀이풍경(playscape, 일반 놀이기구 배치 중심의 놀이터가 아닌 어린이의 활동이 중심인 ‘놀이풍경’이라는 단어를 선호한다)을 주로 설계한다. 학교도 어린이·청소년에게는 제2의 공간이지만 제3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오는 곳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주도적인 활동이 벌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하는 게 목표이다. 과정 안에서 사용자와 계속 소통할 수 있는 구조가 조금이라도 담보되는 프로젝트일 때 더 흥미롭게 만들어볼 수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꽤 오랫동안 다른 나라에서 생활할 때 아이와 놀며 성장하는 공간을 많이 경험했다. 거의 모든 놀이터와 도서관을 탐험하고 써봤던 것 같다. 아무리 작은 도시, 작은 동네여도 이런 공간들이 가지는 잠재성이나 아이들한테 필요한 어떤 것을 채워 주는 강력함을 느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됐지만, 아이의 성장 단계에 따라서 저의 관심사도 같이 옮겨가는 부분도 있었고 이해의 폭도 넓어졌다.
최도인  소장님의 건축의 성장사가 아이의 성장과 같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지정우  그렇게 된 것 같다. 건축가의 역할은 거장들이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하는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시대는 아니다. 이미 굵직한 문화 공간이 다 들어서 있다. 그런데 정작 내 동네, 내 학교에서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사이 공간은 여전히 비어 있거나 방치되는 상황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저한테도 보람되고 건축가의 새로운 역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었다.
  • 명지초등학교 놀이가구(2021)
  • 치현초등학교 꾸담놀이터(2021)
최도인  특히 놀이터 설계를 많이 하시고 관심도 많으신 거로 알고 있다. 사실 놀이터를 설계하는 건축가는 많지 않다. ‘놀이터’라는 공간이 갖는 성격에 특별히 호기심이 있으신 것 같다.
지정우  예전에 놀이터는 시설의 영역이었다. 처음 프로젝트를 하나둘씩 의뢰받아서 하기 전에는 잘 몰랐다. 어린이 건축 책을 쓰면서 아이와 미국의 여러 동네 놀이터를 다니기도 했고, 8년 전쯤 건축가협회에서 지원(funding)을 받아서 몇 나라의 놀이터를 보고 디자인한 건축가나 디자이너와 인터뷰를 했다. 국가의 이런 기관, 이런 놀이터를 설계한 사람들의 마인드를 느끼면서 우리의 건축가 상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런 부분이 저와 결이 맞기도 했다.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의 놀이 공간과 문화는 많이 뒤처져 있다는 걸 느꼈다. 뒤처져 있는 걸 하다 보면 왠지 선구자적인 마음이 자꾸 생기잖나. 그래서 바뀌어야 한다고 계속 얘기하고 다녔다. 실제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전혀 다른 관점으로 아이들의 놀이, 활동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설계하려는 노력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 같다.
최도인  어린이·청소년 공간과 건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 같다. 놀이터뿐만 아니라, 지금 어른 세대하고는 다를 수 있지만 가장 경직된 곳이 ‘학교’라는 공간이다. 제2의 공간인 학교를 제3의 공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숨은 의도가 있다고 하셨는데, 표준적인 학교 공간에서 새로운 시도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
지정우  학교의 공간 구조가 사실은 군대 연병장을 세우는 것과 같은 마음에서 온 거다. 그래서 가장 기능적으로 복도 하나에 교실들이 붙어있고, 복도는 통행 공간이니 절대로 뛰면 안 되고, 운동장에 나가서야 마음껏 뛰어놀라는 아주 단순한 공간 구조이다. 거기서 오는 경직성과 편협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서울의 정수초등학교 저학년 교실 리모델링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설계를 하면서 되도록 정해져 있는 모듈, 크기와 각도 같은 것을 조금씩이라도 비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각도를 트는 순간 그 사이사이에 어떤 틈이 생기게 된다. 그 틈이 숨어서 만화책이라도 볼 수 있는 공간이나 친구와 보드게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기도 한다. 또는 수업도 칠판이 있는 한 곳에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닌 선생님이 옮겨 다니면서 다른 면에서도 수업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학교나 학교 놀이터도 기성화 된 틀을 개념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조금이라도 틀어보는 시도를 한다.
최도인  그런 면에서 공간 기획은 무척 매력적인 것 같다. 정해진 법규나 제시된 표준을 반영하면서도 그걸 틀어서 생기는 어떤 틈을 건축가나 사용자가 발견하면서 채워지는 과정이 재미있다. 초등학교 설계 이후에 교사나 학생들의 사용 후기가 있었나?
지정우  우리와 과정을 주도적으로 진행하신 프로젝트 담당 선생님이 학생들의 의견, 공간을 쓰면서 아이들이 보이는 반응 등을 그때그때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건축가와는 이런 관계가 단절되는 경우가 많지만 강원도 횡성의 공근초등학교는 달랐다. 공근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새로운 공간을 쓰면서 우리 학교를 ‘호텔 학교’라고 부른다고 하더라. 그도 그럴 것이 공근초등학교 인근에 문화 기관도 심지어 도서관도 없다. 유일한 문화공간이 학교인데, 학생들이 생각하기에 가장 고급 공간은 ‘호텔’인 거다. 학교 선생님 몇 분이 변화된 공간에 맞춰서 교육과정을 짜기도 했다. 새로 만들어진 공간의 이 창문을 통해서는 아이들과 시장(市場)에 대한 활동처럼 놀이와 배움에 같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학습 방법을 계발해서 교육청에 제안하셨다. 콘텐츠와 프로그램에 맞춰서 공간을 설계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완성된 새로운 공간을 보고 새로운 교육과정을 생각하신 거다.
최도인  ‘호텔 학교’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비슷한 생각을 했는데,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공간이나 공공 건축은 이를테면, 일정 수준 이하여도 된다는 잘못된 사고가 있는 것 같다. 실제로 공간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인테리어를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아마 그 정점을 아이들은 ‘호텔 학교’라는 이름으로 불러준 것 같다.
지정우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이야기였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빈 놀이터에서 남녀 주인공이 그네를 타면서 어린 시절 얘기를 하는 장면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내가 나고 자란 아파트는 어딜 가나 다 똑같은 브랜드 아파트이고, 학교는 다 똑같은 경직된 복도와 교실의 학교라면, 적어도 아이들의 놀이 공간만큼은 기억 속에 남아있는 특별한 곳,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 정수초등학교 꿈담교실 모형(위)과 완공 후 사용(2021)
최도인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교육가, 교사, 지역문화재단 등 [아르떼365] 독자들이 새로운 공간을 짓거나 리모델링을 통해서 문화예술교육 공간을 만들 때 유념할 점 등이 있다면 조언의 말씀 부탁드린다.
지정우  실제로 문화예술공간을 조성할 때 현실적인 제도를 무시할 수는 없다. 모든 공간이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물건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크고 그만큼 많은 자본과 노동이 드는 영역이기 때문에 제도와 형식을 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건축은 경직된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에게 다가가는 문화예술공간이 조성되려면 그 공간을 실제로 사용할 사람들, 시민과 단계별 워크숍을 하는 게 필요하다. 사용자 사이에서도 서로 협의와 조정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 과정에 디자이너, 건축가, 조경가 등 실제로 디자인할 주체와 함께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부적인 활동 결과를 한 장의 문서로만 전달하면 설계자는 그 결과에 공감하기 어렵다. 공간을 디자인할 사람도 제도에 의해서 결정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럼에도 인터뷰도 해보고 그 사람이 썼던 글이나 다른 작업 등을 통해서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하면 더 나은 공간을 같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공공 공간은 제도가 만든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제도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괜찮은 공간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거다. 그런 점에서 디자인 주체와 협업이 중요하다.
최도인  결국 그 공간을 운영하고 사용하는 사람들과 디자인 주체가 함께 공간의 질적 수준을 높여 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긴 시간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하다.
지정우

지정우

건축가, 이유에스플러스건축사사무소 공동 창립자이자 대표건축가. 서울과 미국 뉴욕에서 건축 실무를 하며 주로 공공 공간과 복합개발, 마스터플랜 작업을 했고, 2012년부터는 서울에서 건축작업을 하며 학교 공간, 놀이풍경, 도서관 등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을 그들과 함께 구상하고 설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와 관련한 저서뿐 아니라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점진성을 화두로 실무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숙명여자대학교 환경디자인과 겸임교수, 파주시 공공건축가, 서울시 교육청 학교건축 전문가이다.
최도인

최도인

1997년부터 도시전략, 문화공간, 창조산업 등 분야에서 100여 프로젝트의 컨설팅과 기획을 총괄해왔다. 찰스 랜드리의 저서 『크리에이티브 시티 메이킹』의 한국어판 책임 기획자, 『만드는 사람들의 도시』 공동저자이다. ‘예술적 창의성’이 만드는 사회적 역동성과 변화에 주목해 왔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객원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X성수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문화체육관광부 새문화정책준비단 위원, 문화예술위원회 예술정책소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본지 편집위원.
프로젝트 궁리
정리_프로젝트 궁리 주소진 기획팀장
인터뷰 사진_이재범 라무팜스튜디오 실장 andy45a@naver.com
프로젝트 사진_EUS+ARCHIT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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