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문재와 소설가 최성각은 생태·환경 문제에 관한 한 누구보다 예민한 작가들이다. 이들은 생태·환경 문제를 단순히 소재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얕은 생태학을 지향하지 않는다. ‘파국’이 임박한 지구적 기후위기 문제를 비롯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를 예민하게 의식하며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다. 물론 두 사람의 기질은 다르다. 시인 이문재가 『지금 여기가 맨 앞』(2014)에 이어 최근 『혼자의 넓이』(2021)에서 ‘세계감(世界感)’을 강조하며 지구를 걱정하는 시를 쓴다면, 소설가 최성각은 ‘환경운동 하는 작가’를 자처하며 환경책을 깊이 읽는가 하면 생태적 삶을 직접 살고자 고민하고 싸우는 작가이다. 그런 두 사람이 최근 각각 시집과 산문집을 출간했다.
녹색 감수성을 향한 새로운 언어
소설가 최성각의 산문집 『욕망과 파국』은 ‘나는 환경책을 읽었다’라는 부제에서 보이듯이 이른바 환경책들을 섭렵하고 작가 나름의 안목으로 읽고 쓴 서평 모음집이다. 스스로 ‘생태 잡문집’이라 표현한 전작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2010)에 이어 물경 십여 년 만에 출간하는 서평집인 셈이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들 하지만, 강산보다 더 변한 것은 작가 자신인 것만 같다. 최근의 코로나19 사태를 비롯해 생태·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세계 인식이 훨씬 더 비관적인 쪽으로 변해버렸다. 머리말에 “역병 이후에 전개될 ‘다른 삶’에 대한 다짐이나 각오는 증발해버렸다”라는 문장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최성각은 지치지 않고 더 높은 성장과 발전을 추구하며 오로지 부국강병책만을 꾀하려는 국가-재벌 복합체를 비판한다. 그런 패러다임으로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엄습에서 확인했듯이 공생의 가치에 기반한 생태주의와 결코 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2000년도 초 서울 상계 소각장 건설 반대(작가는 ‘소동’이라 부른다) 투쟁에 투신한 이래 영월 동강댐 건설, 새만금, 4대강 같은 생태 파괴의 현장에서 싸우던 환경운동가 최성각의 목소리를 곁에서 듣는 것만 같다.
코로나19 시대 『욕망과 파국』이 의미를 갖는 것은 성마른 목소리로 대규모 토목공사를 반대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최성각은 언제나 새로운 ‘언어’로 싸우고자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주 입에 올리는 ‘삼보일배’ ‘생명평화’ 같은 말들을 고안하고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바로 최성각이었다. 미국 운동가 제이슨 델 간디오가 “말은 생각을 바꾸고, 생각은 습관을 바꾸고, 습관은 운명을 바꾼다”고 했던가. 여하튼 최성각은 행동하는 작가로서 누구보다 언어에 예민했으며, 그런 살아 있는 ‘삶의 언어’야말로 나와 사회를 바꾸리라고 생각했다. 정상명 선생과 더불어 ‘풀꽃세상’이라는 환경단체를 만들어 새, 지렁이, 돌멩이, 자전거, 골목길 같은 비인간 존재에게 참회와 감사의 마음을 담아 환경상(풀꽃상)을 드리는 방식으로 환경운동을 한 것도 작가적 가슴에서 우러나온 활동일 것이다.
그러나 최성각은 좌절했다. 오직 ‘잘 먹고 잘 살기’라는 먹고사니즘이 지배하며, ‘정신만 빼고 다 있는’(조세희) 서울살이의 ‘욕망’에 염증을 느끼고 과감히 강원도 춘천 툇골로 ‘퇴각’했다. 그러한 퇴각을 결행하게 한 책이 바로 더글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2011)이다. 2020년 역대급 긴 장마가 계속되던 시절에 쓴 이 서평은 ‘기후 악당국가’ 대한민국을 고발하며 나와 우리 모두의 전환을 촉구하는 ‘격문(檄文)’이다. 나라의 목표가 곧 ‘선진국 진입’이 되어버린 우리네 실상을 파헤치는가 하면, 더글러스 러미스의 주장처럼 (경제적으로는) 마이너스 성장 혹은 ‘대항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 바로 ‘녹색 감수성’이다. 발전이나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자본의 위력 앞에서 무너지는 데에 ‘통증’을 느끼고, 다른 생명에 대해 겸손한 마음을 지니는 생태 감수성을 갖자는 것이다. 바로 그런 마음에서 무연보시(無緣報施)의 경지도 가능할 것이라고 최성각은 생각하는 듯하다. 최성각의 이러한 마음은 ‘생태시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는 말과, “나는 해석하고 분석하고 가르치려는 사람들보다는 언제나 현장주의자들을 믿는다”라는 말에서 잘 알 수 있으리라. 코로나19를 통해 확인했듯이 생태시(예술)는 더 이상 얕은 생태학이 아니라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시의 마음을 되찾는 삶으로
시인 이문재는 『혼자의 넓이』에서 지구를 걱정하는 시인의 도저한 마음을 드러낸다. 특히 제3부에 수록된 시들이 그렇다. 시단에서 누구보다 ‘에코소피(Ecosophy)’의 경지를 시적으로 승화하고자 하는 이문재의 이와 같은 시적 태도는 「끝이 시작되었다」「지구의 말」「천국의 묵시록」「삼대」 같은 시에서 잘 드러난다. “천국에도 있고 지옥에도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인간과 방사능 물질이다”(「천국의 묵시록」)라든가, “아버지에게 미래를 빼앗긴 다 자란 아들딸들이/ 지구 표면 곳곳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삼대」) 같은 표현을 시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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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좋은 자들이 만들고
많이 가진 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지구 안의 또다른 지구 새로운 지구
방사능 미세먼지 중금속을 차단한 완벽한 생태계
기후변화 화석연료 신종질병 쓰나미와 무관한
지속가능한 인공 도시 -
– 이문재, 「인터스텔라」 부분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착상을 얻은 이 시에서 시인 이문재가 모든 것을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해결하며 ‘인공(人工) 지구’의 길을 찾으려는 인간들의 헛된 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위 시의 마지막 연을 보라. “별과 별 사이보다 인간과 인간 사이가/ 중력과 사물 사이보다 인간과 인류 사이가/ 4차원과 5차원 사이보다 인류와 지구 사이가/ 훨씬 더 아득해 보였다”.
저마다 ‘혼자의 팬데믹’을 겪고 있는 코로나19 시대 이문재의 시집이 갖는 의미를 짧은 지면에 자세히 서술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끝이 시작되었다」라는 시에서 강력히 환기하듯이 “끝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라고 말하는 시인 이문재의 예민한 문제의식은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직후 고(故) 김종철 선생이 어느 특강에서 “드디어 성장이 멈추었다, 춤을 추자”라고 한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점은 『녹색평론』 179호에 수록된 이문재의 에세이 「김종철 문학의 ‘큰 마음’」에서도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문재의 시집에서 「파브르 아저씨」 같은 시가 코로나19 시대 저마다의 ‘혼자’가 된 존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한다. 곤충기, 식물기를 쓴 파브르가 여기저기 답사 여행 다닐 형편이 못 되어 자기 집 앞마당 한 평 땅에서 나고 지는 풀들을 살피면서 식물기를 썼다는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재난의 시대에 한 사람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만 같다. 그것은 자세를 낮추어 자세히 관찰하고자 하고, 비인간 존재들을 사랑할 줄 아는 ‘세계감(世界感)’을 갖자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위 시의 마지막 연이 “(생략) 얼마나 가졌느냐보다/ 무엇을 가졌느냐/ 가진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라고”로 끝나는 대목이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이문재 또한 최성각과 마찬가지로 소유하는 삶이 아니라 ‘시의 마음’을 되찾는 삶이 중요하다고 조용히 역설하고자 한 것이었으리라.
시인 이문재와 소설가 최성각, 두 사람의 시집과 산문집은 기후행동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저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묵직한 물음을 던져준다. 최성각이 70만 개의 자급자족적인 촌락공화국의 연합체를 꿈꾸었던 간디의 정신을 되살려 부국강병이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백범 김구)을 신뢰하는 나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목소리는 결코 가볍게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문재 식으로 표현하면 헛된 “꿈과 희망 주의 주장이 너무 많”(「1인 시위」)은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 책의 어조가 전반적으로 침통한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그러나, 시의 힘, 예술(교육)의 힘은 누군가가 정의한 인류세(人類世)를 자본세로 새롭게 정의하며, “혼자 있음이 넓고 깊어질 수 있도록”(이문재, 「혼자 울 수 있도록」) ‘오래된 기도’를 하며 뒷걸음질 칠 수 있는 작은 용기를 발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문재의 시 「삼대」의 마지막 연으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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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아버지가 미래를 돌려줘야 아들딸들이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꾼다
지금과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 아들딸과 아들딸의 아들딸이
다시 다 만들어서 쓰고 다 키워서 먹어야 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서로 떳떳하고 스스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 누구도 함부로 미래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
– 이문재, 「삼대: 미래를 미래에게」 부분
- 고영직
- 문학평론가.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경희대 실천교육센터 운영위원, 춘천문화재단 [POT] 편집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삶의 시간을 잇는 문화예술교육』 『인문적 인간』을 비롯해 『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생애。전환。학교』(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
이미지 제공_동녘,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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