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다.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믿음을 도발적으로 뒤집는 『그냥, 사람』의 저자의 말이다. 2015년 서른일곱의 나이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막상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는 정작 가야 할 길을 잃어버려 ‘몹시 당황했다’는 저자. 어디로 갈지를 몰랐던 게 아니라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태’였다고 고백하는 그는 『그냥, 사람』을 통해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온몸으로 퍼진 통증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상태, 그것은 곧 약자의 삶이었고 그 약자란 온갖 차별과 감금을 당해 온 장애인을 말한다. 장애인 또한 그냥 사람이다. 그들도 어디로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나 그것은 투쟁하고 저항하면서 그냥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획득해나갈 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투쟁도 저항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약자로 옭아맬 때 강자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 『그냥, 사람』
    (홍은전, 봄날의책, 2020)
  • 『린다 브렌트 이야기』
    (해리엇 제이콥스,뿌리와이파리, 2011)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며 발견한 ‘시선’
약자의 세계는 그냥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면서도 또 다르게 단절되는 세계를 켜켜이 이룬다. “이빨… 경찰서… 가서… 찾았어. 동생.” 언어장애를 가진 중증장애인의 언어는 그 또 다른 세계다. “더듬는 말, 맥락을 알 수 없는 말, 뭉개지고 덩어리진 말, 까끌까끌한 말, ‘언어의 수용소’가 있다면 필시 갇히고야 말았을 ‘추하고 열등하고 쓸모없는’ 말들”의, 표준어 체계 안에선 도저히 표현할 길이 없는 언어세계. 어쩌면 그들의 투쟁과 저항은 자신들의 언어세계를 표준어 체계로 번역하는 지난한 고통일 것이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밧줄 같은 말”, “그 말의 힘을 아는 사람들이 쉽게 연결하기 어려운 것들을 연결해 ‘장애인의 이동권’이라는 불가능한 권리를 발명하고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같은 낯선 문장을 개발했다.”
이를테면 2007년 전국적으로 확산된, 투쟁으로 관철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는 일상이 열리고 인생이 시작되고 사랑하고 욕망하며 자기 인생의 주체가 된 ‘가장 혁명적인’ 순간이었다. ‘시설’에 갇힌 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사람으로 사회에 나아가려는, 약자가 약자 스스로 뛰어넘으려고 움직이고 말하는 주체일 때 비로소 강한 소수자가 되면서 또한 비로소 강자 역시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그 반대로 약자가 소수자가 아닌 강자의 우산 아래에 있는 다수자의 그림자로 머무를 때 강자는 더 강고한 강자가 될 것이다.
‘그냥, 사람’의 저자 홍은전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활동했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이야기와 함께 했다. 그는 활동의 또 다른 활동으로서 글쓰기를 한다. 그러나 그는 약자들의 삶을 대변하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들과 함께 한 삶의 교감 속에서 자신의 ‘시선’을 가지고 ‘완고해지는’ 일이 곧 자신의 글쓰기다. 장애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같은 이야기들, 자신이 겪으며 매일 듣는 그 소리들은 사람들의 세상에는 없다. 그래서일까. 글 속 그는 세상 속 자신보다 더 섬세하고 더 진지하고 더 치열하게 산다. 그의 글쓰기는 힘들고 괴로운 일이면서도 삶의 화살표를 자신의 손으로 하나하나 그려나가는 일이다. 그 화살표는 어쩌면 자기 삶에 약자의 삶을 중첩하는 소수자 되기일 것이다. 그래서 그냥 사람이고자 하는 자기 윤리의 욕망을 표출하는 행위일 테다.
약자는 투쟁하고 저항할 때 말하는 주체로 나서며 자기 언어를 갖는다. 아니 자신의 처지와 욕망을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투쟁하고 저항하는 사건이 시작되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며 역사와 삶의 주체로 나선다. ‘당사자의 말하기’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약자들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사건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언어의 세계가 다르고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그 표현수단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홍은전은 그들 속에서 활동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소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세상과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자신의 ‘시선’을 발견한다. 때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이 동반되는 시선의 삶. 그럼으로써 당사자들과 흔쾌히 벗이 되는 소수자 되기로서의 글쓰기가 실행되고, 부서져야 시작되는 공동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움직이고 말하는, 당사자의 글쓰기
사회적 약자라고 해서 당사자의 말하기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분신자살이라는 온몸으로 말하기를 했던 1970년대 전태일도 그러하거니와 여기서 호명하고자 하는 해리엇 제이콥스가 그러하다. 그는 ‘린다 브렌트’라는 가명으로 자서전 『린다 브렌트 이야기』를 출간한다. 그는 181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에든턴에서 노예로 태어난 흑인여성이다. 그는 자신을 성노리개로 삼으려는 백인주인의 끈질긴 추태를 피해 결국 도주한다. 철저한 추적을 피해 친할머니의 오두막집, 빛도 공기도 거의 들어오지 않고 팔다리를 움직일 공간도 없는 참혹한 천장에서 7년을 숨어 산 끝에 마침내 도주에 성공하고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더 힘든 고통은 바로 눈앞에서 보이는 자신의 어린아이들에게 조차도 자신이 그 공간에서 숨어 지낸다는 사실을 알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린다가 비밀스럽게 만날 수 있었던 사람은 오로지 할머니뿐이었다.
“낙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쁨과 슬픔이 뒤섞여 있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물이 흘렀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말을 건네고 싶었는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린다의 자서전이 나온 시기는 미국 노예제의 참상과 비인간성에 대한 각성이 불붙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북부인 사이에는 남부의 노예제가 무지하고 미개한 노예들을 보호하는 것 정도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런 인식 탓에 도주한 노예들을 붙잡아 남부로 되돌려주는 「도망노예법」이 발상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남부 노예제를 체험한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이 담긴 노예증언문학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독특한 산문 형식의 글들은 이후에 ‘노예서사’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흑인문학의 원류가 되었다. 린다는 도주하면서도 결국 노예제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인식하였고 자서전에서도 자주 언급하였다.
“나는 ‘더러운 새들이 모여 사는 새장에서’ 21년을 살았다. 그동안 내가 경험한 것, 내가 목격한 것으로 증언할 수 있다. 노예제는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에게도 저주라는 것을, 노예제는 백인 아버지들을 잔인하고 음란하게 만들고, 그 아들들을 난폭하게 하고 음탕하게 한다. 딸들도 악에 물들게 하며 아내들을 비탄에 빠뜨린다. 흑인들이 겪는 극도의 고통과 끝없는 타락을 묘사하기에는 안타깝게도 내 필력이 부족하다. 하지만 이렇듯 사악한 제도가 얼마나 심각한 도덕적 파멸을 가져오는지 자각하는 노예주는 거의 없는 듯하다. 목화 작황이 나쁜 것은 걱정하면서 영혼이 황폐화되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노예제의 참상을 직접 확인하고 싶다면 남부로 가서 노예상으로 가장해보라. 그러면 불멸의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일어날 거라 상상하지 못했던 일을 가감없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게 될 것이다.”
노예가 어떻게 자서전 글쓰기를 할 수 있었을까. 린다의 애초 주인은 어릴 적 그에게 글을 가르쳤고 노예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 주인이 일찍 죽어버리자 못된 새 주인을 만나게 된다. 인생의 처참한 시기를 맞이한 그는 그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제도화된 처참한 약자였음에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고, 자신과 아이들의 해방을 위해 탈주를 감행했고, 감동과 문학적 감성으로 가득 채운 자서전을 쓸 수 있었다. 그가 자서전을 쓰고자 한 것은 단순히 자기 이야기를 폭로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노예주조차도 영혼을 황폐화시키는 노예제도의 사악성을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흑인여성노예’라는 당사자가 천만다행으로 ‘글자’라는 자기 표현수단을 가질 수 있었고 자서전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노예로 위치시킨 노예제도라는 사회적 굴레를 폭로했다. 그가 자신의 언어세계를 통해 발명해낸 시선은 ‘나는 이렇게 해냈노라’ 따위의 사사로운 영웅 심리적 프레임이 아니라 노예제도라는 사회적 프레임을 향하고 있었다.
‘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약자가 없어지는 과정은 약자인 당사자 몫이기도 하고 비당사자의 몫이기도 하다. 약자 역시 어느 순간 강자의 그림자로 묻히기도 하고 비당사자 역시 약자의 세계와 교감하기도 한다. 당사자와 비당사자의 이분법적 선 긋기는 강자의 논리이다. 강자의 위치에 서 있거나 강자를 향하는 사랑과 욕망의 불온한 화살표를 좇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우리는 모두가 약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약자다’라고 선언한다고 해서 모두가 약자인 것은 아니다. 당사자든 비당사자든 움직이고 말하는 소수자 되기로서 거듭 태어날 때만이 『그냥 사람』의 저자처럼 그냥 사람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거나 혹은 『린다 브렌트의 이야기』 저자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를 할 것이다. 움직이고 말하지 않았다면 이들도 없다. 공통된 화두는 아마도 크고 작은 숱한 세계 안에 존재하는 약자들의 세계와 교감하고 소통하며 표현할 수 있는 시선의 리터러시(literacy)일 것이며, 여전히 필요한 것은 시선의 리터러시를 타고 넘나드는 글쓰기의 문제가 아닐까.
고길섶
고길섶
문화비평가.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서울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철학을 곁눈질하다 언어문제와 문화연구 쪽에 발을 담그면서 문화이론지 문화/과학 편집위원과 시민문화단체 문화연대 편집위원장 일을 했다. 고향으로 내려와 문화예술교육 관련 활동과 마을공동체지원센터 센터장 활동을 했으며 지금은 마을 자원조사 및 마을 콘텐츠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협동조합(준) 마을과이야기 대표이다. 저서로는『우리시대의 언어게임』『소수문화들의 정치학』『부안 끝나지 않은 노래』『거기에서 사람들을 보다』등이 있다.
pp640@chol.com
이미지제공 _ 봄날의책, 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