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창작활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이다. 이때의 존재 증명이란 예술가가 단지 어떤 작품을 만든다는 의미를 넘어, 그 작품을 만드는 데 연루되는 모든 과정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온전한 인정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전문 직업인으로서 예술가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산식이나 매뉴얼로 재단될 수 없는 창작활동의 특수성을 끊임없이 재해석하고 재구성해가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을 반영한다. 때로 이 노력은 예술 장르나 분야의 집약된 목소리로 발현되기도 하고,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존재 증명이 결국 이러한 모든 활동에 대한 사회 전반의 동의를 전제로 해야 비로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교육 현장은 필연적으로 예술가들의 서포터이자 파트너로 함께 움직일 수밖에 없다. 이 글에서는 2010년대 이후 예술가들이 스스로 움직여 변화를 모색해가고 있는 현장의 사례를 살펴본다.
사회적-미학적 관계 맺기를 위한 투쟁
‘미술생산자모임’은 2012년 5.1 총파업 퍼레이드에 미술가-디자이너 그룹으로 참여한 이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자발적 모임이다. ‘미술생산자’는 작가를 넘어 큐레이터, 학예사, 기획자, 평론가, 갤러리 운영자 및 운영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수행하는 인턴에 이르기까지, 전시를 만드는 모든 이들과 더불어 더 나은 미술 생산의 조건을 고민하고자 하는 현장의 의지를 함의한 명칭이다. 제도와 정책의 불합리한 구조 안에서 미술생산자로서 그들이 부딪힌 현실의 문제는 2013년 첫 토론 자리에서 공론화되었고, 모임을 기획한 구성원들이 미술대학 학생부터 여러 현장 관계자를 인터뷰한 자료를 소책자 형식으로 발간하면서 보다 많은 이들의 동의와 연대를 구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후 모임에서는 예술가의 자립을 고민하는 포럼을 개최하고, 작가와 기획자를 대상으로 자체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특히 작가 보수(artist fee)와 관련한 논의를 본격화했고, 2015년 미술생산자모임 2차 토론회를 계기로 정부에서 추진하는 ‘작가보수제도’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작가보수제도’가 ‘미술창작 대가 기준’으로 확대 개편되어 국공립 미술관 등을 대상으로 시범 시행되는 동안 미술생산자모임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도한 연구와 토론회 등에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하면서 “산술적으로 계산해낼 수 없는 창작의 모든 활동, 수치화할 수 없는 예술 활동에 대한 사회적 존중의 내용과 의미”(『미술창작대가기준 개선 토론회 자료집』, 2019.12.19.)를 전달하기 위한 발언을 지속해오고 있다.
  • 미술생산자모임 1차 토론회 자료집 표지
  • 미술생산자모임 2차 공개 토론회 포스터
성폭력 피해자와의 연대
‘여성문화예술연합’(WACA)은 문화예술계의 고질적인 성폭력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총 7개 분야, 9개 단체가 참여해 결성한 연대체로서 지난 2017년 활동을 시작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에서 집필에 참여한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가이드라인』(2017)에 따르면, 문화예술계 내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예술가를 길러내는 도제식 교육 제도와 현장의 폐쇄적 위계 구조, 그리고 프리랜서라는 지위의 특수성으로 인해 제재가 어렵다는 점에 있어 여타 직장 내 성폭력과 명백한 차이점을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오랜 세월 문화예술계의 성폭력 피해자들은 개인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견디거나 그렇지 못할 경우 작업을 그만둬야 했고, 가해자들은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은 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정당화하며 활동을 지속해왔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공유하는 것으로부터,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용기를 내 발언하는 여성 예술가들이 등장하자 수많은 이들이 그에 공감하고 연대하기 시작했다. 여성문화예술연합은 이러한 움직임에 힘입어 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정책 도입과 제도 개선을 위해 연구와 자문을 이어가고 있으며, 세미나와 강의 등을 통해 현장의 예술가들과 소통하고 함께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아가고 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문제는 앞서 언급한 환경적 특성으로 인해 강력한 제도와 정책의 개입을 필요로 하는 바, 입법 및 행정 기관을 상대로 현장의 상황과 맥락을 전달하고 그 추진 과정을 감시하는 여성문화예술연합의 활동은 향후 더욱 실질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한 실천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Korea Theatre Standards, KTS) 워킹그룹은 보다 안전한 창작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한 예술가의 규칙, 혹은 약속을 고민한다. 공연예술은 다양한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이들의 공동작업이다. 때문에 작업을 위해 모인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상호 신뢰와 합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예술 장르다. 이때 창작에 참여하는 각 구성원이 취하는 태도나 자세를 통제 불가능한 개인적 영역으로 남겨두지 않고 모두의 동의에 따라 얼마든지 조정하고 교섭해갈 수 있는 창작의 기본 조건을 논의해가려는 것이 워킹그룹이 지향하는 목표다. 실제로 2020년 9월 발행된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선언문」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는 공연예술가들이 스스로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라고 규약의 의의를 천명한다.
2018년 연극계 #미투(#MeToo) 운동 이후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 기획한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Chicago Theatre Standards) 국제 워크숍’을 토대로 한국의 실정에 적용 가능한 자치규약을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 2019년 2월의 일이다. 이후 워킹그룹은 국내외 여러 단체의 자치규약을 검토하고 예술계 성폭력 실태에 대한 자료와 예술인 권리보장법을 살펴보는 등의 리서치를 거쳐, 현장의 사례들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주제별 토론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공연예술 창작 과정을 단계별로 구분해 그에 맞는 세부 내용과 자기 점검표를 제시함으로써, 현장에 바로 적용하고 상황에 맞게 바꿔 사용할 수 있는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을 제작·배포했다. 올해 10월과 11월 사이에는 ‘2020 연극의 해’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 각지에서 관련 워크숍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상의 사례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술가들은 이미 그들이 직면한 문제를 타개해나가기 위한 싸움을 시작했지만,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둘러싼 여러 문제는 결코 그들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실천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하면 예술가가 자기 존엄을 지키며 창작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위에, 우리 사회가 왜 예술가를 필요로 하는가, 그들의 예술작품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의와 가치를 구현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지지를 구하는 움직임으로 확산할 수밖에 없다. 지면의 한계상, 이 글에서는 지극히 일부의 사례만을 소개하고 그들의 활동 목적과 취지를 다루는 데 만족해야 하지만, 지금 이 시각에도 예술현장 곳곳에서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제, 누군가 응답할 차례다.
[참고자료]
– 『미술창작대가기준 개선 토론회 자료집』(2019.12.19.)
– 『문화예술계 성폭력 피해자 지원 가이드라인』(2017)
–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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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CA 여성문화예술연합
한국공연예술자치규약
김슬기
김슬기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한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일상과 연극, 연극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 및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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