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나의 교집합
서울을 떠나 강원도에 터를 잡았을 때 내심 기대했던 건 여유로운 삶과 걷기 좋은 도시였다. 나는 지금, 그렇게 살고 있을까? 현실을 들여다보면, 삶의 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나는 여전히 바쁘고, 열심히 운전한다. 1시간여를 이동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서울 생활에서 10분~20분 이내에 도심과 자연 어디든 갈 수 있는 이 도시의 공간성만으로도 삶의 질이 올라갔지만, 기대했던 삶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문화도시 사업 담당자이다. 나의 도시 원주에 사는 자부심을 시민들이 느끼고, 문화적 삶이 가능하도록 도시문화생태계를 조성하는 임무가 나에게 주어져 있다. 이 도시와 나는 공적인 의무와 개인적 욕망이 뒤섞여 교집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사는 도시와 나의 삶은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을까?
  • 『천천히 재생』
    (정석, 메디치미디어, 2019)
  • 『수박이 먹고 싶으면』
    (김장성 글/유리 그림, 이야기꽃, 2017)
도시와 나를 위한 속도 조절
문득 사업, 혹은 사회적 활동에서 중요한 타이밍이 내 삶의 타이밍과 어긋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삶이 내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사회적 역할의 속도에 내 전체 삶을 끼워 맞추는 시간이 있어왔다. 그 여파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어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는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 둘의 교집합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궁금해하고 고민할 때, 『천천히 재생: 공간을 넘어 삶을 바꾸는 도시 재생 이야기』를 만났다.
“도시에 사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동식물들의 삶까지 함께 보며 풀어야 한다.”
– 정석, 『천천히 재생』
도시정책에서 속도가 중요한 이유는 여러 유기체 간 연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연대의 기본 조건은 서로의 사정을 살피면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속도가 빠르면 각자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다. 이에 못지않게 느슨한 연대도 중요하다. 지역사회의 가치사슬 연결은 오랜 시간 지역의 특성에 맞추어 발전되어 왔다. 평소에는 느슨하다가도 지역사회의 이슈가 있을 때 큰 힘을 발휘한다. 가치사슬은 시대에 따라 시민들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에 도시정책은 항상 시민들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
살펴본다는 것. 도시재생에서 속도가 무척이나 중요한 이유이다. 시민들의 삶을 살피고, 스스로 재생해야 할 이유를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이유를 스스로 납득해야만 우리는 도시의 주인이 될 수 있고, 도시 재생의 방향성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시간은 국가 공모사업의 속도와 다를 수 있다. 저자는 도시 재생 사업이 실패 확률이 매우 크다는 뼈아픈 이야기도 꺼낸다. 스스로 원해서 시작해 자신의 힘으로 지속하는 게 아니라 보조금에 의존한 시한부 프로젝트임을 이유로 든다. 결국 해법은 자생력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스스로 살피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스스로 살피며 자신이 사는 도시의 방향성을 생각할만한 시간을 가져왔을까?
천천히, 과정과 함께 성장하는
시민들은 다양한 사연을 안고 이 도시를 살아간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이주를 했지만 아는 길도, 아는 카페도, 아는 사람도 없는 시민이 있다.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잠시 달리기를 멈추고 어디로 다시 달려야 할지 방황하는 시민도 있다. 엄마도 아프고, 할머니도 아파서 동시에 2명을 어부바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들과 도시는 어떤 관계를 가질지 생각하다가 『수박이 먹고 싶으면』이 생각났다. 그림책은 나의 오래된 독서 취향이기도 하지만 문화도시 사업을 맡으면서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기 위해 읽기도 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수박 씨를 심어야 한다.”
– 김장성 글/유리 그림 『수박이 먹고 싶으면』
당연한 이야기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에 그려진 농부의 발뒤꿈치와 흙들의 움직임에, 쟁기를 끄는 소의 뒤태에 한순간 얼음이 되는 건 완성된 수박의 형태만 생각의 범주에 넣어왔기 때문이라고 억지로 말을 맞춰본다.
이 책은 과정을 이야기한다. 수박이 먹고 싶으면 겨울이 말끔히 물러간 밭에 수박만 한 구덩이를 파고 삭은 퇴비와 참한 흙을 켜켜이 채워 넣어야 한다는 것, 아무리 아깝더라도 대견한 수박 싹 두세 개는 솎아 내어야 한다는 것, 짠 땀이 뚝뚝 떨어지는 고단한 노동을 마다치 않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원한 미숫가루 한 사발 들이마시고 낮잠 한숨 잘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까지 농부의 손과 주름과 수박의 성장으로 이야기를 한다. 마지막에 농부가 손짓을 한다. “어이! 이리들 오소!”
다함께 모여 수박을 먹을 수 있는 이 도시는 참 멋진 도시가 아닐까 한다. 수박이 먹고 싶다는 욕망을 스스로 알고, 스스로 심고, 스스로 고생을 한다. 그리고 다 함께 그 결실을 나누면서 한 시절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이 수박을 아낌없이 나눠먹는 일이라고 스스로 평한다.
“목적과 결과보다 아름다운 동기와 정성스런 과정이 존중받는 세상, 함께 만들어가요!”
– 김장성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이주를 했던 그 시민은 이제 아는 길이 생기고, 아는 카페가 생겼다. 잠시 달리기를 멈추었던 시민은 여전히 방황 중이다.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 도시가 시간을 들여 시민들의 삶을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천천히 천천히 가면 여지가 생긴다. 그 여지 안에 행복이 있다.
김선애
김선애
책, 어학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교육 분야에서 전략기획과 마케팅을 주로 하며 직장인 생활을 했다. 그림책을 매개로 도시 원주와 인연을 맺으며 서울 탈출의 꿈을 실현했고, 이제는 길 가다가 아는 사람들을 제법 만나기도 하고, 소개해 줄 맛집 리스트도 길어지고 있다. 현재 원주시 창의문화도시지원센터 사무국장이며, 그림책여행센터 이담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uagirl@naver.com
이미지 제공 _ 메디치미디어, 이야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