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아카이브는 개인이나 집단의 기억을 입으로 말하게 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자료를 기반으로 연구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구술사이다. 기존의 연구가 주로 주류의 권력을 가진 이들의 문서기록 중심이라면, 구술사는 일반의 목소리를 토대로 기억과 경험을 통해 주체로 세우는 연구 방법이다. 최근 구술사는 학문의 영역을 넘어 문화예술 영역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개인의 서사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 기획, 지역의 이야기 찾기, 자기 역사 쓰기까지 적극 활용된다. 구술자의 주관성에 기반한 구술사는 과거의 사실 정보라기보다는 구술자의 시대적 경험과 가치관, 상황에 대한 당사자의 해석을 담고 있기 때문에, 맥락을 이해하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예술 구술채록과 디지털 아카이빙
1979년 개관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자료실을 모태로 하는 아르코예술기록원은 국내 최초의 예술 기록보존 전문기관으로 약 38만 점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를 갖추고 있다. 아르코정보예술자료관 시절인 2003년부터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을 시작했고, 한국예술디지털아카이브를 통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구술사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술기록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유산을 기록 보존하고 예술사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 수집의 일환으로 원로 예술인 중심의 구술 채록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공연예술, 시각예술, 대중예술, 문학 분야 약 250여 명의 원로 예술인 생애사 구술채록 자료가 있다. 주제사로 드라마센터 공연활동 연구, 창극단의 역사, 20세기 한국 서화전통, 해방 이후 근현대 무용교육과 무용창작, 민중춤을 주도한 창작인 및 비평가 구술 등을 담고 있다. 자료는 아르코예술기록원 서초동 본원과 대학로 분원에서 열람할 수 있고, 온라인에서는 승인 요청 과정을 거쳐 열람이 가능하다.
무용가 제프 프리드먼(Jeff Friedman)의 무용 구술채록 <레거시>(Legacy)는 대표적인 예술 구술사 프로젝트이다. 이 작업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까지 에이즈로 위험에 처한 샌프란시스코 지역 무용 예술가의 삶과 예술활동에 초점을 맞췄다. 초기 자료 20여 개를 통해 에이즈가 예술가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볼 수 있다. 이후 이 프로젝트는 독립 비영리로 운영되는 샌프란시스코 공연 디자인 박물관(Museum of Performance+Design)과 연계해 진행되었다. 박물관에서는 레거시 오디오 녹음을 디지털화하고, 무용・음악・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 게이 및 레즈비언 예술가 등을 선정하고, 구술자는 성별과 인종을 배려해 다양하게 구성했다. 레거시 구술사 온라인 콜렉션에서 예술가의 생애에 대한 약사와 구술 음성과 녹취록을 볼 수 있다.
공연예술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뉴욕공립도서관은 국가기금 지원을 받아 무용 구술사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책으로 기록되는 문학이나 대본으로 남는 연극과는 달리 기록하기 애매한 무용 장르의 문서화 간극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와 인종차별반대시위로 닫힌 상황을 직면하고 있는 무용 종사자의 경험을 기록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열었다. 2021년 5월 30일(KST)까지 진행되는 무용 종사자 구술 프로젝트(COVID-19 Dance Worker Narratives Project)는 동등한 관계의 구술 프로젝트이다. 무용 예술가, 교사, 학생과 종사자 누구든 참여할 수 있고, 친구나 동료와 팀을 이뤄 인터뷰어가 되거나 구술자가 되어 원격으로 1시간 이내의 시간 동안 팬데믹 상황에서의 변화와 대응 등에 관한 인터뷰를 진행한다. 셀프 인터뷰도 가능하다. 인터뷰를 마치면 음성파일과 영상파일을 제출하고, 인터뷰는 디지털 작업을 거쳐 온라인에 공유된다.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수집하고 기록한 활동도 있다. ‘인간과기억아카이브’에서는 2013년부터 ‘5월 12일 일기 수집’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우리 주변에서 매일 반복되는 순간을 포착해 역사적 기록으로 만들기 위한 일상 아카이빙이다. 21세기 한국인의 삶과 문화를 기록화하기 위해 진행된 이 프로젝트는 아동, 청소년, 노년 등의 커뮤니티에서 그림일기, 메모, 전자문서, 음성녹음, 동영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료를 받고 있다. 수집된 자료는 기증자의 기억 보관소로, 연구와 교육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영국 서섹스 대학과의 MOU로 연결되었다. 1937년부터 시작된 영국 인류학자들의 일상기록화 프로젝트(Mass Observation Day Survey Project)는 1950년대까지 일반인의 일기를 수집했다. 서섹스 대학은 2010년부터 이 취지를 살려 ‘일기 수집 프로젝트’(day diary archive project)를 진행하고 있으며 다양한 연령, 지역, 직업군의 시민이 참여했다. 달라진 것이라면, 이메일을 통한 디지털 일기 수집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일상 아카이브 중 하나인 스토리콥스(Storycorps)는 평범한 사람들이 기록한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아카이빙해 서비스하고 있다. 2003년 10월 뉴욕시의 교통 거점인 그랜드 센트럴 터미널에 스토리부스(Story Booth)를 오픈하면서 탄생한 스토리콥스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이 안에는 9.11 생존자,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소수자, 재향 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고 경청하고 참여하게 하면서 접근성을 높이고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도록 출판, 라디오 송출,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모으기 위한 툴을 출시하고, 대중을 위한 모바일 앱을 출시하기도 했다. 스토리콥스 아카이브는 의회도서관에 보관되기도 하며 일반 대중은 물론 학생, 교육자, 연구자, 비상업적 미디어 제작자, 커뮤니티 파트너 조직 및 학술 또는 문화 활동에 관련된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자원으로 개발되고 있다.
경청, 진심으로 깊이 듣기
예술교육 현장에서는 전문적인 구술 채록보다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삶의 이야기를 찾는 목적의 인터뷰가 주를 이룬다. 이 경우에도 구술의 기본인 인터뷰는 대상과 목적에 따른 사전 계획만큼이나 태도도 중요하다. 구술사의 기본 원칙은 구술 대상자의 얘기를 듣는 것이다. 현장에서 대화가 주제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과장하거나 숨기는 부분이 있거나 정리되지 않는 이야기가 펼쳐지더라도 강압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통합적인 관점에서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득하거나 강요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은 자료원이 아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억지로 강요하면 안 된다. 결국 인터뷰의 질은 상대방에게 얼마나 신뢰를 주고 라포를 형성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전 조사를 하고, 시간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져야 한다.
인터뷰 구술 시에 녹음은 필수다. 기억은 자기 멋대로 작동하기 쉬워서 녹취를 풀면서 제대로 확인하지 않으면 구술 내용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현장에서 진행되는 구술은 사진이나 영상, 녹음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할수록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자원이 풍성해진다. 영상기록은 녹음보다 더 많은 기록을 담을 수 있고 자료 활용도 측면에서도 유용할 수 있다. 진행 중 중요한 사항은 메모를 하면서 들으면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거나 애매한 부분을 확인하기 쉽다.
또한 시간이 흘러도 매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 문자 기록이기 때문에, 현장은 녹취록으로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녹취록을 작성할 때는 윤문 하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 구술사는 입말이 살아 있는 기록이다. 입말을 통해 인생이 고스란히 소리로 전달된다. 입말, 속어, 사투리를 살려 상대방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 있다. 지문을 입체적으로 적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구술자가 인터뷰 도중 침묵할 경우 ‘눈물이 글썽글썽해지더니 말이 없었다’는 것과 ‘어색해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는 다른 침묵이기 때문이다. 작성된 녹취록은 구술자에게 보내 확인 작업을 거치는데, 이때 녹취록과 함께 음성파일을 보내고 꼭 함께 확인하라고 요청하는 것이 좋다. 확인 과정을 거쳐 생성된 자료들은 기록지를 작성하고 라벨링을 해서 하나의 박스에 담아서 보관한다. 용도와 목적에 맞게 책이나 전자책, 음성, 영상 등 디지털로 변환하면 보관과 활용도를 높일 수 있다.
구술사는 주류에 들지 못하고 권력을 갖지 못해 말하지 못하고 기록되지 못하는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주체로 세우는 작업이다. 개인의 역사는 구술자의 발화를 통해 또 다른 시간의 결을 그리고 공동의 기억을 만든다. 예술교육 활동에서는 이러한 과정에서 상호작용이 발생한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맥락을 헤아리며 타인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경험은, 나의 세계를 넓히고 삶을 깊게 보는 경험이기도 하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삶에 닿아보려는 구술사에 기반한 활동은 예술교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최순화
최순화
서울프린지네트워크에서 축제와 공연기획, 문화기획 활동을 시작했다. 아시아 국제교류, 지역 커뮤니티, 공공 공간 관련 문화기획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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