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길을 걷는다. 인생을 걷는다. 가끔 뛰고, 가끔 멈춰도 어떻든 우리는 삶을 걷는다. 길을 잃어 찾는 사람이나, 두리번거리며 산책하는 사람이나, 보이는 건 매한가지다. 하지만, 그 마음은 낮과 밤만큼 다르다. 낮밤의 시공간만큼이나 먼 내 마음의 거리감은 어디서 올까. 길을 잃어 헤매는 나의 두려움을 산책의 즐거움으로 바꾸어 줄 그 비밀의 단서는 어디에 있을까. 안무가, 기획자, 교육자, 그 많은 이름 가운데 이 사람이 있다. 그와의 대화 속으로 단서를 찾아 걸어보자.
선생님을 처음 뵙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인터뷰 제안을 받고,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했다. 무용수였고, 안무가였고, 선생이었고, 기획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는 무대에서 공연할 때가 아니라 배우고 연습할 때 제일 행복했다. 나는 선생님 말고, 늙어 죽을 때까지 배우는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계속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요새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하다. 준비 중인 작업도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좋겠다.
첫 번째는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The 5th International Teaching Artist Conference, ITAC5, 아이택5)의 프로그래밍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특히 언러닝 부분에 집중해서 프로그래머로 발제자들이 흥미로운 발제를 할 수 있게 돕고 화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참여자로 상호작용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또 하나는, 오랜만에 무대 작업을 한다. 올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제롬 벨(Jerome Bel)의 <갈라(Gala)>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 작년 제롬 벨이 환경을 생각해서 더 이상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며 작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철도와 선박을 이용해서 한국에 도착해 작업하는 거로 계획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오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 공연은 내가 총괄안무로 국내 아티스트와 피디 등 팀을 구성하고 제롬 벨과 온라인으로 소통하면서 공연을 준비하여 10월에 올린다.
개인적으로는, 펠든크라이스(Feldenkrais) 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4년 차 되었다. 국제 공인 프랙티셔너(practitioner) 자격을 따는 과정이다. 내 인생에 특별한 만남이며, 공연예술이나 움직임 전문가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너무 유용한 방법론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움직임이 생명 활동의 본질적인 형식이다. 자신을 돌보며 몸을 편안히 하고, 자신의 움직임을 통해서 계속 배울 수 있는, 배우는 방식을 새롭게 배우게 되는 과정으로, 언러닝과도 관련이 있다. 나의 춤과 작업 방식에도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자신의 몸으로부터 출발한 개인의 변화가 그 사람의 삶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 공동체 변화까지 가길 희망한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 변화를 추동하는 힘, 근본적인 힘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다. 이걸 일반인에게 좀 더 쉽게, 친절하게 다가갈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만들고자 한다. 사업을 준비하고 있고, 본격적으로는 올 연말쯤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원금과 창업 정보를 찾아보며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요새는 펠든크라이스 무브 대표라고 소개한다. 새로운 도전이다. (웃음)
춤과 어떻게 처음 만나고, 업(業)으로 삼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7살로 기억한다. 내 기억에 나는 항상 춤추고 있었다. TV를 보면서 내가 백댄서보다 더 정확히, 훌륭하게 추고 있다고 느꼈다. 너무 흥과 신명이 넘치는 거다. 한국춤에 ‘배냇춤꾼’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글에서 한 민속학자가 현장 연구 가서 시골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할머니들을 녹취하고 촬영하는 중에, 할머니가 “서울서 온 선생 찍지만 말고 한번 춰봐” 그랬더니, “제가 배우지 못해서 못 춰요” 했단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아니 춤을 배워서 추나” 그러셨다는 거다. 나는 이 말이 너무 좋다. 사람은 배워서 춤을 추는 게 아닌데 말이다. 사회에서 춤은 배워서 춰야 된다고 사람들에게 억압을 심어 놓은 거다. 우리는 누구나 배냇춤꾼인데. 잘 추고 못 추고 평가나 우월의 개념이 없는 게 춤인데. 그 시골 할머니 말씀이 너무 맞는 거 같다.
아무튼, 좋아하는 춤을 배우러 학원을 갔는데, 그게 한국무용 학원이어서 한국무용을 했다. 발레 학원이었으면 아마 발레를 했겠지. (웃음) 너무 자연스럽게 예술학교에 갔고, 대학의 무용과를 나왔다.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도 없었다. 그냥 자연스럽게 나는 무용가가 될 거고, 늙어 죽을 때까지 춤출 거라고 그랬다. 살면서 왜 구김이 없었겠나. 그 어두운 마음이 춤만 추면 다른 세계로 갔다. 춤출 때는 내가 선녀고. 춤출 때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좋은데 어떻게 안 추나. 그렇게 춤을 췄다.
2005년 김윤진 무용단을 창단하자마자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국내뿐 아니라, 2009년 뉴욕 댄스 시어터 워크숍 <기생 비컴즈 유(Kisaeng Becomes You)>로 주간지 [타임아웃뉴욕] ‘베스트 댄스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궤적이 조금 달라진다. 2011년 페스티벌 봄 <구룡동 판타지-신화 재건 프로젝트>, 2012년 중년 여성을 위한 지역 밀착형 생활 예술 프로젝트 <춤추는 꽃중년 프로젝트>, 2013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되었던 ‘서울댄스프로젝트’ 등 어느 순간부터는 주로 길바닥(?)에서, 도시 여기저기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생기게 되었나?
‘길바닥’이라는 표현이 너무 적확하다. 사실 내가 길바닥 인생이다. (웃음) 대학교 때도 선배들과 지하 서클(?)을 만들었다. 운동권 모임이 아니라 춤추는 모임이었다. 친구들이랑 대학로 길바닥에 매주 토요일마다 춤추러 나갔다. 그러다 들켜서 교수님께 불려가 혼구녕이 났다. 이화여대 축제에서 처음으로 춤을 췄다. 문화적인 축제에 왜 주점만 여나 싶었다. 지금은 없어진 이화광장에서 춤을 췄는데, 총학생회에서 다음 해에도 같이하자고 연락이 왔다. 한국민속춤은 원래 무대에서 추는 춤이 아니라 삶의 춤이다. 제도권 무용교육을 충실히 받으면서 극장 무용의 환상과 기예를 습득했는데, 무대에서 내 존재로 관객을 압도하는 쾌감도 있지만 내가 항상 보여지는 대상이 되는 것도 공포스러웠다. 양가적 감정. 그런데 길에서 추는 것은 그게 없다. 그 공간의 경계가 없잖나. 전통연희에서 ‘판’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되는데 무대와 객석이 갈라놓은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달까.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경험이었다.
<구룡동 판타지>는 뉴욕에서 <기생 비컴즈 유>를 하면서 이미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극장무용에 숨이 막혀서 그리 튀어 나갔다. 현실과 아무런 연결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쌓여왔던 것이 한계에 다다랐다. 그래서 친구한테 “구룡마을 가서 보란 듯이 선녀춤 출 거야” 하고 말해놓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울댄스프로젝트는 ‘도시’라는 삶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춤판이다. 길바닥에서 원 없이 춤춰 봤다. 춤에 대한 사회적 억압은 대개 몸과 여성 등을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는데 이런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다. 신나게 췄다. 길에서, 다리에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2016년 검열과 블랙리스트에 항의하는 ‘선녀 퍼포먼스’와 지금까지 지속 중인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활동까지, 이젠 정말 최전방에서 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욱하는 게 있다. (웃음)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욱하면 어디로 튈지 모른다. 2016년에 검열과 블랙리스트 1인 시위에 댓글 하나 달았던 것이 무용인들의 릴레이로 이어져서 결국 무용 분야가 제일 오래 1인 시위를 이어갔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은 블랙리스트 1인 시위 활동 인연으로 만들어진 거다. 지금은 ‘오롯_#위드유’라고 무용계 성평등한 창작환경에 대한 이슈로 작년부터 류모 안무가 성추행사건 연대 활동을 했고 최근에는 그 경험을 공유하는 연구모임을 진행 중이다. 나에겐 가해자와 함께 활동하고 묵인한 세대로서의 부채감이 있다. 오롯 활동을 하면서, ‘다음 세대가 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용계의 허리쯤 되는 세대인 것 같다. 다음 세대의 예술가에게 어떤 쓰임이 있으면 좋겠다.
오롯 활동 4년 차가 되었다. 블랙리스트, 창작환경, 성평등 등 많이 배우면서 좌충우돌 힘들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활동가’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주 자치규약 워크숍을 하면서 감동했다. 대학생 때 되게 반항하는 학생이었는데, 나도 선생이 되고 나니까 문제적인 행동을 무감각하게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부끄러움을 느꼈다. 워크숍에서 사회를 보며 “무엇이 필요한지 말하는 모임이 열리는 데 30년 걸렸다”고 말하는 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안 변해. 소용없어.’라는 말, 쉽게 하잖나. 더디지만 이게 변화다. 희망적인 길을 같이 가면 좋겠다고 했다.
  • 길을 잃기 위하여 Ⅰ
    [기획·진행] 창작그룹 비기자
  • 길을 잃기 위하여 III- 생존을 위한 움직임 워크숍
    [기획·진행] 움직임 연구집단 – 언리밋
ITAC5 사전 프로젝트로 ‘언러닝 – 길을 잃기 위하여’를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코로나19로 일상의 큰 변화를 경험하고 프로젝트 제목처럼 ‘길을 잃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언러닝’은 무엇인가.
‘언러닝’(Unlearning)이라는 말이 어려운 것 같은데 사실 쉽다. 예정된 길을 갈 때, 그 과정에서 다다르는 목표는 사실 다 정해져 있는 거잖나. 그걸 성취하는 기쁨도 당연히 있다. 그런데 길을 잃었을 때, 초심이 되었을 때, 배움을 초기화한다. 코로나 이후 우리는 이전과는 달리 생각해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고 있잖나. 불확실하고 예측하던 것들이 작동하지 않을 때,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에 의문을 품고 질문하기 시작한다. 예측한 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았다가 코로나19 이후 몸으로 맞닥뜨린다. 언러닝이 러닝과의 길항 작용을 한다는 생각을 한다. 러닝을 무시하거나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다’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면 초심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다 내려놓으면 오히려 새로운 배움이 등장하는 것 같다.
‘언러닝 – 길을 잃기 위하여’라는 이름부터 수상(?)하다. 교육의 실천을 이야기하자고 모였는데, 일단 ‘언러닝’을 선언하고, 부제로 ‘길을 잃기 위하여’라니. 어떤 프로젝트인지, 어떤 생각으로 이 작업을 기획하셨는지 궁금하다.
구룡마을에서 예술교육 수업을 하려니 내가 알고 생각하던 것이 하나도 작동이 안 되더라. 애들은 관심도 없고, 한 달 동안 시작도 못 했다. 통제는커녕 아이들에게 난타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알던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즉 언러닝 하지 않으면, 실천이 안 되더라. 돌이켜보면 각자 언러닝의 순간이 있었을 거다. 기존에 내가 알던 것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시간과 상황에서 우리 예술가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작업에 있어서도 예술가 스스로 언러닝적인 방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는 분들이 많을 거다. 자기 갱신. 내가 알고 있던 방법론을 버리는 것. 나를 제로베이스에 놓고 춤이 뭔지, 안무가 뭔지, 공간이 뭔지, 시간이 뭔지를 살피는 것 말이다. 같은 지면에 발을 딛고 있어도 감각이 달라지고 움직임의 패턴이 달라지는데, 그것을 매일 새롭게 배울 수 있느냐 하는 것. 그것이 언러닝이라고 생각한다. 배움을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길을 잃어보는 경험을 선물하자는 의도로 ITAC5 작업을 하고 있다.
‘언러닝 – 길을 잃기 위하여’는 ITAC5 프로그래밍 위원인 최선영 비기자 대표와 함께 기획하고, 이를 시각예술을 기반으로 한 비기자와 움직임 연구 집단 언리밋 두 그룹이 총 4번의 워크숍을 실행하는 프로젝트다. 비기자가 진행하는 1차 워크숍을 지난주 진행했다. 그림 받아쓰기를 했는데, 한 사람이 그림을 보고 다섯 문장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걸 듣고 그린다. 듣는 사람은 질문할 수 있지만 ‘네, 아니요, 모르겠어요’로만 답한다. 그런데 우리가 질문하는 방식도 정해져 있더라.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선험적 인식에 준해 질문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질문을 들으면서 어떻게 질문하는가를 배운다. 서로 멘붕에 빠지기도 한다. 같은 문장을 듣고서도 다 다른 그림을 그린다. 또 최근에 언리밋이 진행하는 “생존을 위한 움직임”에 참여했다. 줌을 통해 움직임 워크숍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해하는 참여자들과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뛰어내렸다. 뜬금없이 뛰어내리라는 주문에 일제히 뛰어내리는 상황이 재밌기도 하면서 우리는 지금 왜 뛰어내리는지를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도 하더라. 참여자가 스스로 미션을 만들고 함께 수행하는 대목에서 “서로의 공간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들어보세요” 했다. 순간 7개의 줌화면에 적막이 흐르는데 그 침묵이 아름답더라. 우리가 길을 잃었는지 알 수 없지만 각자의 배움을 질문하고 있더라. 사전 프로젝트로 8월까지 진행될 4번의 워크숍 이후 본행사(9.15~9.17.)에서 세계의 예술교육가들과 이러한 경험을 나눌 예정이다.
ITAC5에는 어떤 분들이 주로 참여하나.
예술가, 예술교육가,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실천가가 주로 참여한다. ITAC5는 실제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장이다. 이번에는 온라인 컨퍼런스로 전환 되었는데, 더욱 많은 분이 참여하여 자료도 많이 나누고 서로의 작업에 공감하면 좋겠다. 작업하다 보면 외롭고 어려운 일도 있지 않겠는가. 서로 당면한 문제들에 공동의 지혜를 나누고 활발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기대한다.
선생님에게 예술교육이란 무엇인가.
이번 행사에는 ‘예술가의 언러닝’이라는 부제가 있다. 예술가의 작업 방식, 태도를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매일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일과 더불어 쉽게 변하지 않는 관성적인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어렸을 때, 어느 날 춤을 너무 잘 춰서 선생님께 엄청 칭찬을 받았다. 다음 날, 어제처럼 똑같이 잘 추려고 딱 서 있는데, 선생님께서 “너 어제 잘 춘 거 잊어버려야 해”라고 하셨다. 충격이었다. 그땐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갔는데, 살면서 가끔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러닝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늘 너 어떠니?’ 하고 묻는 ‘How are you?’나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는 ‘here and now’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도 다 같은 말이다. 여기서 시작해야 예술도, 예술교육도 가능할 것 같다. 교육은, 예술교육은 길 위의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변화를 받아들이자.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김윤진
김윤진

한국춤을 전공했으며 2005년 김윤진 무용단을 창단하고 <욕망> <침묵하라> <노래하듯이> <다녀오세요, 구두가 말했습니다> 등 음악, 연극, 시각예술과의 협업작업을 통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을 확장시켰다. 2009년 <기생 비컴즈 유(Kisaeng becomes you)> 발표 이후 <구룡동 판타지- 신화재건 프로젝트> <룸 퍼포먼스-밝힐 수 없는 무엇의 나눔> 등 장소와 관계를 주제로 작업하였다. 공공과 시민예술의 접점을 실험하는 ‘서울댄스프로젝트’ 기획감독,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무용전공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펠든크라이스 무브(Feldenkrais MOVE) 대표이다. 제5회 국제예술교육실천가대회(ITAC5) 프로그래밍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김연임
김연임
웹진 [춤:in] 편집장. 국립국악원,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디자인문화재단, 국립현대무용단, 삼성전자 등 다양한 국공립 예술기관, 단체, 축제, 예술가, 기업과 함께 일했다. [한국대학신문] [1/n] 에디터를 거쳐, LIG문화재단에서 발행한 계간 [interVIEW] 편집장을 역임했다. 현재 서울무용센터에서 발행하는 웹진 [춤:in]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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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_ 복세욱 POV스튜디오 rickybok@naver.com
인터뷰 장소 협조 _ 세운협업지원센터 세운테크북라운지 http://sewoon.org/sewoon-space/27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