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문화와 문화예술교육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쉽게 구분이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사실은, ‘생활문화’라는 개념이 정책에서 전면화되면서 생기는 혼란이 상당하다. 자칫 생활문화가 동아리와 집단성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공동체의 결속을 이끌어내면서도 개인을 지우지 않는 강력한 모델이 있다. 얼핏 모순되는 말처럼 느껴지지만, 조미자 관장과 진접문화의집이 오랫동안 견지하고 지켜온 태도다. 진접문화의집을 전국구 스타로 만든 ‘나와유’ 축제에서 보여준, 부침개 한 장을 나누는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과 움직일 공간을 보장하면서도 커뮤니티의 조화를 잊지 않는 균형감각은 생활문화와 문화예술교육을 업으로 삼는 이들에게 두루 탐구대상이 될만하다. 모든 이야기의 가치를 믿으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낸 『진접 우리동네 이야기』를 3권까지 밀어붙이는 뚝심, 마을에 존재하는 재능과 이야기를 찾아내고 관계로 연결하는 집요함, 문화예술교육과 일상이 만나는 지점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자신감을 갖춘 조미자 관장을 만나 생활(문화) 중심의 문화예술교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관장님의 이전 경력들을 보니 뭐랄까,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증권사에, 여행업에… 말하자면 정통 문화예술계 출신이 아니다. 스스로 문화예술계 출신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갖는 인식이 있는가?
내 생각에는 오히려 그래서 이곳에서 잘 견디고 있는 것 같다. 내게 문화예술에 대한 전문성이 있었다면 답답하고 무척 힘들었을 거다. 나는 혼자서 일상을 해석하거나 사유하는 것을 재밌어한다. 또 항상 정리돼야 넘어가는 습관이 있다. 진접문화의집에서 20년 가까이, 정확히는 19년 됐는데 ‘내가 왜 이 자리에 19년이나 있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이후에 6년 이상 해온 일이 없다. 여기서는 기적처럼 있었고 지루할 만하면 문화의집 공간을 옮긴다거나 위탁 단체의 대표가 불합리한 결정을 밀어붙여 싸울 일이 생긴다거나 등의 임팩트 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제는 약간의 책임감 속에서 나의 마지막 에너지를 태우고 있다.
이전의 경험들이 문화의집을 운영하고 지역에서 생활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화예술교육과 다양한 문화 활동을 벌이는 데 나름의 원동력이 되었을 것 같다.
문화의집을 운영하려면 일단 행정을 알아야 했는데 행정은 증권사에서 배웠다. 문화예술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데 필요한 자유로운 사고는 여행사에서 누리고 익혔다. 개인적으로 풍물을 계속해서 장르 활동의 한 가지 특징도 가지고 있었다. 살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지만, 하나의 일에 인생을 바쳐 충성을 다 할 일은 없었다. 그저 그런 일을 할 때마다 재미있었고, 집중했고, 지나고 나니 경험이 되었다. 확실히 경험이 많아지면, 일단 생각이 넓어지고 유연해진다. 누구나 지금 하는 일에 매몰되기 쉬운데 여러 가지 경험과 함께 여행을 다니며 넓게 볼 수 있는 시각과 생각을 갖추게 된 것 같다. 막연히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생각과 스스로 다녀보면서 인간사의 보편성들을 보고, 나와 마을, 관계의 보편적인 것을 해석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사람들이 나를 보면 자신감 있고 당차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영향을 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로 전국의 모든 문화예술 활동이 얼어붙었다. 진접문화의집에서는 어떻게 이 시절을 건너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코로나와 관련해서 공공마스크 만들기, 베란다 콘서트, 온라인 미팅 등을 하고 있다. 수제마스크 만들기는 매우 일찍 시작했고, 꽤 많은 양을 만들어서 아직 여유가 있다. 남양주에서도 베란다 콘서트를 열었다. 관람객 한 분이 메시지로 보내주신 “살 것 같아요”라는 표현이 감동이었다. 하반기에도 한 차례 더 진행할 예정이다. 다음으로는 온라인으로 만나는 일을 한다. 온라인 미팅은 첫째는 생사 확인, 둘째는 ‘문화의집이 아직 여러분과 연대하고 지지하고 있으니 외롭지 마라’고 하는 발신이다. 동아리 대표들을 3개 팀으로 나눠 한 팀에 7~8명 정도 참여한다. 서로 무척 반가워한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할 예정이고, 동아리별 온라인 미팅도 계획하고 있다. 아예 올해는 부침개 축제도 온라인으로 해볼까도 상상하고 있다.
회원들은 활동에 대한 아쉬움이 큰 걸까,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큰 걸까. 궁금해진다.
사실, 내게도 같은 궁금증이 있다. 진접문화의집에서 활동하는 분들은 10년쯤 함께 움직이신 분들이다. 여기서 동아리들끼리 외로움도 해결하고 커뮤니티도 일궜다. 시간이 흐르니 유형이 좀 갈리는 것 같다. 풍물팀을 비롯해 어떤 분들은 본인들의 비용을 들여 민간 시설 대관을 해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예전에 진접문화의집 활동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를 가야 하는데, 동네를 떠나기가 싫어서 이사를 갈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동네에 남아 활동을 지속하는 사람들이 꽤 된다고 들었다.
어딜 가나 마을 안에서 본인의 역할도 있고 재미도 있는 정주감을 못 느껴본 사람들이 많다 보니 활동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고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생기더라. 진접문화의집이 부침개와 나와유 축제로 많이 알려졌는데, 축제뿐 아니라 일상적인 기록 작업을 하기도 했다. 남편이 군대에 갔을 때도 연애편지를 써본 적 없었던 분이 누군가를 기록하고 만나는 활동을 했다. 글의 완성도보다 이들이 만남의 과정에서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그 과정에서 자기를 객관화시키자, 문화의집을 객관화해서 보자, 매몰되지 말자고 이야기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다. 그런데 자신을 객관화하면서 이웃과 소통하고 공동체성을 바탕으로 본인이 뭔가 만들고 확장하는 과정에서 변화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 분들이 문화의집과 네트워크가 된다. 더디고 소수지만 분명 생긴다. 마을에서 문화의집 때문에, 마을회의 때문에 이사를 못 간다는 분들이 실제로 꽤 있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이웃과 소통하며 성장하는 결속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함께 한 협력연수 <한 사람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퍽 인상적이었다. 멜론을 재배하며 기타를 치는 분이라든지, 마을 목공방을 운영하는 전직 해운업 CEO를 비롯한 다양한 이들의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다.
모든 사람의 삶에 들어가 보면 그 정도의 스토리는 가지고 있지 않을까. 남양주만의 특별한 이야기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그렇게 접근한다. 그래서 그때도 호기롭게 교육진흥원에 “우리는 수천 명도 가능해요”라고 이야기했다. 스스로가 한 번쯤 주인공이 된 듯한 자부심과 감사한 마음. ‘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나를 조명해주네.’ 나는 그 부분을 살리고 싶은 거다. 주체적 개인들이 살아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신뢰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런 면에서 지역에 접근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책에서 ‘모든 인간은 소중하고 모든 기록은 가치가 있다’는 문장을 봤다. 마을책은 글의 완성도 측면에서 봤을 때는 ‘이게 뭐야’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과정들이 살아 있는 거다. 모든 기록은 가치가 있다는 말에 용기를 내 『진접 우리동네 이야기』를 3권까지 냈다. 누구든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누구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부침개 축제를 진행하는 와중에 누군가 “우리 애가 대학을 가서 쏘고 싶다”라고 하길래 단호하게 선을 그었던 적이 있다. 대학을 못 간 사람의 소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이 망했어요’라고 부침개를 부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 집이 돈을 벌었어요’라며 부침개를 부쳐서 망한 사람을 가져다주면 졸지에 활동이 ‘복지’가 되는 거다. 그러면 해석이 달라진다. 마을과 우리 관계의 존재 자체에 충실하자고 강조한다.
‘존재 자체에 충실하자’는 말이 별다른 말이 아닌 것 같지만,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동시에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이.생.망’은 포기하고 절망하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건 포기하고 되는 것을 찾아 관계를 맺는 과정이다. 잘하는 것보다 과정의 즐거움이 중요하다. 결국 그때그때 ‘Here and Now’(지금, 여기)다. 흘러가는 부분을 정확히 해석만 하면 그다음 일은 보이더라. 때로는 직관과 추진력이 필요했는데 그런 것에 기질이 맞은 거다. 여기 있는 분들도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것보다 즐거우니까 같이 가는 거다. 그러다 보니 ‘나 여기서 계속 살 거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 부침개 축제를 해야 하는 게 결코 아니다.
기존의 문화예술교육과 진접문화의집에서 기획한 활동의 다른 지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이라고 생각하는가? 나와유 축제나 ‘하더라 쉐프를 찾을지도’ 같은 사업을 보면 공간이나 프로그램에 한정되지 않는 느낌이 있었다.
일단 우리는 사람 중심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풀어내는 것들이 많다. 개별성을 존중하는 거다. 초창기 문화의집 목표는 생활문화예술 체험공간이었고, 예술 장르 위주의 강좌 중심이었다. 그 안에서 꾸준히 하는 팀들이 동아리화 되는, 전형적인 동아리 서사를 만들어냈다. 일상 속의 예술은 조금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이 질문은 예술의 정의까지 가 닿는다. 나는 그 부분을 ‘매개의 매개’라 생각한다. 소통의 매개, 우리들과의 매개. 자기 스스로 하는 활동은 삶에 대한 매개로 행복을 위한 자기 작업인데, 이곳은 개인 작업을 지원해주는 곳이라기보다는 함께 활동하는 사람들이 중심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술이나 해금을 하는 것보다 어떤 커뮤니티를 만들고 어떤 태도로 서로가 융합해서 가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예술은 하나의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수단이 다른 가치를 압도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생활문화에서 경계해야 하는 게, 개인적인 예술 활동의 목표를 가질 수 있지만, 한계 역시 인식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50세가 넘어 풍물을 시작했는데 어떻게 김덕수패처럼 풍물을 치겠나? 과정의 즐거움을 느끼는 방향으로 태도를 바꾸는 거다. 그게 안 생기면 본인 실력도 거기서 거기일 뿐인데 남의 실력을 평한다. 거기서 커뮤니티의 결속이 깨진다. 이러면 나는 대번에 입바른 소리를 한다. ‘제가 보기에는 오십보백보예요’라고. 그러다 어르신들에게 야단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물론, 마을을 대상으로 축제 등을 벌일 때 예술성은 필요하더라. 재작년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파견지원사업으로 예술인 3명이 합류해 나와유 축제를 했었는데 훨씬 풍성하고 다채로웠다. 개개인의 일상적인 예술성은 각자의 몫이고,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경험들이 예술을 바탕으로 마을에서 확장되는 것은 전문예술가의 결합을 통해 펼쳐질 수 있다고 본다.
커뮤니티, 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도 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는 태도가 인상적이다. 개인과 관계, 공동체에 대한 해석들이 필요한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
팬데믹 시대에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에 집중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이전 프로그램들이 ‘30~40대 경력단절 여성’ 혹은 ‘어르신’ 등으로 대상을 뭉뚱그렸다면 새로운 방식으로 개별성을 찾는 게 중요한 시점이라는 말씀인가.
그렇다. 왜 경력단절이 됐으며, 단절된 시간에 무엇을 했고, 이후에는 어떤 욕망을 갖게 됐는지 등을 정리해 가며 움직여야 한발 한발 건강하게 가지 않을까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보다 정리가 안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문화의집에 왔는데도 그렇다. 문화의집에서 활동하다가도 ‘이래야 문화의집에 도움이 되지’라고 표현하는 분을 만나면 나는 소리를 빽 지른다. ‘도움이 안 되어도 되거든요. 선생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세요’라고 말이다. 그분은 인정 욕구를 가진 것이다. ‘선생님 덕분에 문화의집이 이래서 너무 고마워요’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인데 나는 그 이야기를 싫어한다. 당신이 원해서 이곳에 온 거고 그것과 우리가 조화를 맞추는 거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무엇을 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만나자는 거다.
연장선상에서 문화의집에서 하는 일상이나 삶을 결합한 문화예술교육이 학교나 박물관, 미술관 등 다른 기관에서 하는 것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무엇일까?
나는 박물관, 미술관의 문화예술교육을 잘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런 기관들은 목표지점이 작업에 집중되어 있고 어떤 한계를 정해둔 게 아닌가 싶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경우 기관의 컬렉션이나 전시에 연동된 프로그램이 많으니,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아무래도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커뮤니티 조성을 목적으로 하는 기관은 아니니까 프로그램 이후 지속성에 대한 고민은 조금 한정적이지 않을까. 우리는 관계망의 확장, 마을로의 확산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것은 사실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기관에서 하는 프로그램은 어쨌든 끝이 있지만, 문화의집에서 삶과 일상을 대하는 활동은 끝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공간이나 관계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삶이 끝나지 않으니까.
그렇다. 그런 체험이나 경험들이 이어지고 합류될 때 시너지가 커진다. 그런데 그게 너무 많다는 게 이제는 문제다. 굉장히 엇비슷한 성격의 것으로 약간의 해석 차이만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많은 만큼 지역의 생활문화 공간들과 연결이 되면 좀 시너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작은 책방 같은 소규모 공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민간 영역의 작은 공간들이 공공 공간의 의무감이나 압박을 넘어 스스로 원하는 일들에만 매몰되지 않고 마을에 대한 해석을 하고 삶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면, 그런 공간들이 많아지는 게 공동체의 탄탄한 네트워크들이 만들어지는 첩경이 될 거다. 그게 건강한 사회로 가는 밑거름, 베이스캠프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나 역시도 그걸 꿈꾸고 있다.
조미자
대학교를 졸업하고 입사한 증권사 노동조합에서 풍물반 활동을 하며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접했다. 이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프리랜서 여행가이드로 일하다 2004년 한국예술인총연합회 남양주지회 사무국장으로 문화기획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현재까지 20여 년간 진접문화의집 관장으로 일하며 주민들과 함께 마을공동체를 주제로 한 ‘나와유(I&U) 축제’, 진접읍 숨은 일꾼들의 이야기를 담은 『진접 우리동네 이야기』 등을 기획했다. 남양주 시민미술학교 운영위원장, 문화체육관광부 생활문화센터운영컨설팅 위원, 생활문화협동조합나와유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진접문화의집 관장, (사)한국문화의집협회 운영이사, 경기도 마을공동체 지원센터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 안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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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활동가를 시작으로 웹진 [컬처뉴스] 편집장,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 팀장 등을 거쳤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업』 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에서 도망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며, 여전히 만화를 보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redanth22@gmail.com
www.facebook.com/taeho.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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