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로 문화예술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관한 국제적인 담론의 장을 형성했던 ‘서울 어젠다: 예술교육 발전목표’가 채택된 지 10주년이 되었고, 「문화예술교육 지원법」 제정으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 본격화된 지도 15년이 지났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문화예술교육을 받았던 어린이·청소년들은 자라서 청년이 되었고 사회인으로서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료가 되기도 했다. 문화예술교육은 이들에게 어떤 기억과 영향을 주었을까? 앞으로 이들이 만들어갈 시대에 문화예술교육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문화예술교육과 함께 성장한 청년에게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과 역할, 방향에 관하여 들어본다.
- ① 김도연 청년협동조합 뒷북 조합원
- ② 최진성 안무가·댄서
- ③ 김선혁 협동조합 문화예술단 꾸마달 이사장
- ④ 김나예 예술교육 생명나무 예술가 교사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나’비처럼 ‘예’쁘게. 큰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순우리말 이름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한테 특별히 자기소개를 하거나 나를 기억에 남게 하고 싶을 때 종종 이렇게 표현하는데, 초등학생 저학년 앞에서 첫 소개를 할 때 나비 그림을 그리고 내 이름을 맞춰보라고 하기도 한다. 현재 예술교육 생명나무에서 예술가 교사(TA)로 일하고 있다. 생명나무는 ‘예술교육을 통해 삶의 위로와 변화를 이끌다’라는 미션 아래 11명의 예술가 교사가 활동하고 있다. 학교 창의적 체험활동, 자유학기제, 동아리, 지역 문화예술축제, 청소년 캠프, 학교 교사 및 기업 연수 프로그램 등 다양한 예술교육 수업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주로 뮤지컬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생명나무가 나의 첫 직장이고 함께 한 지 3년 정도가 되었는데 아직까지는 부딪치며 배워나간다는 생각으로 즐겁게 임하고 있다.
처음 문화예술교육을 받았던 때를 기억해본다면? 언제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했는지 궁금하다.
고등학생 때이다. 지금 돌아보면 중학생 때도 밴드부로 동아리 활동을 하며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계셨지만, 그때 당시에는 방과 후 수업 정도의 느낌이었고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인지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무튼 중학생 때에도 밴드부에 들어갔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예술에 흥미와 관심이 있었는데, 고등학생이 되면서 학창 시절 추억으로 동아리 하나는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풍물부, 댄스부, 영화제작부 등 여러 동아리 중에서 연극부가 눈에 들어왔고, 연기를 하면 내가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되어볼 수 있고 여러 가지 직업을 다 가져볼 수 있을 테니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아리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당시 연극 동아리가 주로 사용하던 시청각실에서 나름 조명도 해놓고 무대 위에 서서 오디션을 보았다. 소품을 주고 자유 연기를 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너무 떨려서 제대로 연기도 못하고 노래만 간신히 부르고 나왔다. ‘아 그냥 이렇게 한 번 해볼걸’하고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오디션에 합격했고 1년에 한 작품씩 연습해서 ‘서울 청소년 연극제’를 비롯한 여러 청소년 연극 대회에 나갔다. 나는 동아리 9기로 들어갔는데 이미 전국청소년연극제 대상 등 수상 경력이 많았던 동아리인 만큼 선배들의 전통을 잇고자 동아리원 모두가 더욱 열심히 연습에 임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대회 준비에만 목매는 것은 아니었다. 동아리 1기 때부터 쭉 담당해 오신 함형식 예술강사 선생님께 예술의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특별한 시간들을 동아리원들과 함께 해나가며 협동심은 물론이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내가 점점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했던 친구들도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며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참 의미 있었던 시간들이었고 지금도 고등학생 때를 돌아보면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연극부 ‘온새미로’가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단순히 대회 준비에만 목매는 것은 아니었다. 동아리 1기 때부터 쭉 담당해 오신 함형식 예술강사 선생님께 예술의 기술만 배우는 것이 아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 특별한 시간들을 동아리원들과 함께 해나가며 협동심은 물론이고 감정 표현에 서툴렀던 내가 점점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함께했던 친구들도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며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참 의미 있었던 시간들이었고 지금도 고등학생 때를 돌아보면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연극부 ‘온새미로’가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연극부인 만큼 공연과 대회를 준비하다 보면 재밌고 힘든 일도 많았을 텐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보통 동아리 활동은 2학년까지 많이 하는데 나는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계획이 있어서 3학년 때도 참여했었다. 그만큼 내 학창 시절을 의미 있게 장식해 준 여러 가지 추억이 떠오른다. 1학년이었던 2011년에 온새미로가 국제 아동·청소년극 축제인 제7회 키지무나 페스타에 초청받아 오키나와에서 김유정 작가의 소설 『동백꽃』을 음악극으로 공연했던 것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처음 해외에 가보는 데다 우리나라의 감성이 담겨있는 동백꽃을 외국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여서 정말 설레고 의미 있었다. 축제 측에서 지원을 받아 다른 나라 공연도 볼 수 있었고 일본인 친구들과 교류하는 시간도 있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예술로 하나 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때 오키나와에서 동아리 선생님, 친구들과 함께 봤던 황홀한 바다와 하늘은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이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3학년 때 했던 창작극 <아빠>의 마지막 공연이다. 그 해 여러 대회와 공연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학교 축제에서 했던 공연이었다. <아빠>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아빠와 사춘기 딸 둘의 갈등과 회복을 담은 이야기로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래가 커튼콜이었다. 커튼콜에서만큼은 배역을 떠나서 정말 각자의 아빠에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울며 노래를 불렀는데 하필 그때 학교 안내 방송이 나온 것이다. 그 순간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당황하는 사람 없이 모두들 그 소리를 감추려고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노래를 불렀다. 소중한 마지막 공연 중에 방송이 나와서 아쉬웠지만, 덕분에 더욱 감동적이었던 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 3년간 연극부 활동을 하며 막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것을 ‘예술교육’을 통하여서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이 생겼다. 예술교육은 나 자신의 환기와 성장에도 도움이 되었고, 진로에 대해서도 더욱 구체적으로 방향을 잡게 해 주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3학년 때 했던 창작극 <아빠>의 마지막 공연이다. 그 해 여러 대회와 공연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학교 축제에서 했던 공연이었다. <아빠>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아빠와 사춘기 딸 둘의 갈등과 회복을 담은 이야기로 인순이의 <아버지>라는 노래가 커튼콜이었다. 커튼콜에서만큼은 배역을 떠나서 정말 각자의 아빠에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울며 노래를 불렀는데 하필 그때 학교 안내 방송이 나온 것이다. 그 순간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당황하는 사람 없이 모두들 그 소리를 감추려고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노래를 불렀다. 소중한 마지막 공연 중에 방송이 나와서 아쉬웠지만, 덕분에 더욱 감동적이었던 순간으로 기억에 남는다. 3년간 연극부 활동을 하며 막연히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것을 ‘예술교육’을 통하여서 하고 싶다는 구체적인 꿈이 생겼다. 예술교육은 나 자신의 환기와 성장에도 도움이 되었고, 진로에 대해서도 더욱 구체적으로 방향을 잡게 해 주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만져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멋있다. 고등학교 시절 시작한 연극이 이제 꿈이자 직업이 되었다. 자신이 받았던 문화예술교육을 온전히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클 것 같다.
연극부 활동을 하며 진로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현재 그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이 지금의 삶과 일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함께했던 친구들이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내적인 성장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은 분명 학생들에게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수업에서 내가 교육연극을 선택했을 때의 그 가치와 목표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동아리 수업은 비교적 소수의 인원을 깊게 만나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많이 나누고 교감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 그 외의 수업들은 시간적인 제약 등이 있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문화예술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무언가 더 줄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한다.
문화예술교육 활동을 하면서 놓치지 않고자 하는 관점,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제는 한 사람의 예술교육자로서 학생들을 만나고 수업을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마음과 마음이 만날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만약 똑같은 문화예술교육이라도 대회 1등에 집착하는 교육을 받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공연을 만들고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함형식 선생님께서 “연기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셨던 게 마음에 깊이 남는다. 그리고 동고동락했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더욱 인격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우울감으로 힘들어했던 친구가 연극을 통하여 감정을 표출하며 위로를 얻고 트라우마가 있고 소심했던 친구들이 자신감이 생겨 리더가 되는 모습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업 한 번으로 한 사람의 인생이 크게 바뀌지는 않겠지만 문화예술교육자로서 마음가짐을 다지며 방법론적으로도 더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하고 있다. 또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행복하면 행복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고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무책임하게 감정을 내뱉기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에 대해 아는 만큼 남에 대해도 알게 되고 배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문화예술교육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우리나라의 교육을 생각하면 획일적, 주입식, 1등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많은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주입식 교육을 받고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한다. 개인주의는 점점 더 심해져서 운동장에서 다 같이 뛰어노는 모습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그저 스마트폰에 빠져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매체의 발달로 보고 아는 것은 많아졌지만 마음의 깊이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공부는 하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이러한 현실에서 문화예술교육을 통하여 정적인 아이들에게 환기가 되고 소통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에게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예술가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개성을 발현할 수 있으며 자신감을 주고 리더십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를 하면서 멀리 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문화예술교육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교육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더욱 건강한 사회를 만들 수 있기를 소망한다.
- 김나예
- 서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재학 시 연극동아리 온새로미에서 처음 연극을 시작했다. 오키나와에서 열린 국제 아동·청소년극 축제 ‘제7회 키지무나 페스타’(2011)에서 연극 <동백꽃>을 공연했으며, 제6회 SAC청소년연극뮤지컬경연대회(2012)에 참가해 <아카시아 꽃잎은 날리고>로 단체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세종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청소년과 놀이문화연구소 교육연극지도자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예술교육 생명나무 예술가 교사로 모교인 영등포여자고등학교 동아리 강사, 초·중학교에서 뮤지컬(뮤직드라마)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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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보듬고 진심을 다하는 예술교육자를 꿈꾸며
문화예술교육의 역할을 말하다④
김나예 예술교육 생명나무 예술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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