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간 대구의 마을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에 종사하다 시골살이 한 지 3년이다. 도시 활동가의 시선으로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지난날 필자의 활동과 요즘 시골 동네의 현실이 중첩되면서 드는 묘한 감정과 조건에 무기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민이 점차 깊어진다. 지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시골에서 태어나서 시집장가 가고 아들딸 낳고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을 성실히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농촌의 현실이 자기들의 책임인 양 누구에게 따지지도 묻지도 않는다. 그저 배우지 못하고 도회지로 나가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으로 치부한다. 농부들의 삶이란 해 뜨면 밭에 나가 일하고 해지면 집에 와서 연속극이나 뉴스를 보는 외에 따로 할 것이 별로 없다. 기껏해야 농한기 회관에 모여 고스톱을 치거나 도회지 나간 아들딸 자랑이나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일상을 재탕 삼탕 할 밖에 뭐 딱히 할 것도 없다. 가끔 오는 평생학습 선생님들이 진행하는 체조나 글쓰기 그림 그리기(칠하기) 등을 하기도 하지만 그리 애착이 있거나 즐거워 보이지는 않는다. 선생님에겐 꼭 필요한 일인데 배우는 이들에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적은 인구, 넓은 면적, 드문 교통수단
인구 1천만의 도시와 1백만의 도시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1백만의 도시와 50만의 도시에서도 그 차이가 크다고 하기 어렵다. 그러나 인구 10만 이하의 군 단위 지역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필자가 살고 있는 의성군의 경우 인구 5만3천으로 의성읍 인구 1만3천 명을 제외하면 평균 면 인구는 2,300여 명 남짓이다. 도시에서 1개 동의 인구는 적으면 1만에서 많으면 5~6만에 이른다. 이동 거리와 시간으로 치자면 반경 1~2km, 걸어서 10~20분이면 충분하다. 반면 농산어촌의 읍면 단위의 인구는 적게는 8~900명에서 많아야 1만5천 명 정도이며 거리로는 3~4km는 기본이고 6~7km도 다반사다. 걸어서는 불가능하고 차량으로도 1~20분 걸리는 곳도 허다하다. 대중교통수단이 없는 곳도 많다. 이런 곳에까지 대도시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문화예술교육지원정책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은 기반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심각한 차별에 다름 아니다. 관심의 정도가 모자란 것인지 애써 외면한 결과인지 모르지만 정책이란 것이 있는가 싶다.
농산어촌에 사는 이들의 삶은 숫자가 적으니 문화적으로 피폐해도 괜찮은가? 10원짜리 고스톱 치는 것만으로도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믿으며 즐거워해야 하는가? 도시의 문화센터나 노인복지회관에 다니는 고매한 어르신들처럼 시골의 마을회관(경로당)에서 유모차 끌고 다니는 노인들은 화가가 되거나 시인이나 수필가 혹은 작곡가나 배우가 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들도 소년소녀시절 해보고 싶었던 꿈이 있었을 것이 아닌가? 도시인들만 이 꿈을 다시 꿀 수 있단 말인가? 왜 20명 혹은 30명이 모여야 문화예술교육은 가능한가? 5명은 왜 문화예술교육을 받으면 안 되는가? 적은 인원의 교육은 형평에 어긋난다고? 도시에서는 20~30명이 같이 하는 것도 쉽지만 작은 시골마을에서는 하나의 문화예술 취향으로 5~6명이 모이기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누구든지, 어디서든 행복을 누리려면
헌법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부여된 기본 권리이다. 작은 시골마을에 사는 이들에게 헌법 제10조는 무슨 의미를 가질까?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리를 알고나 있을까? ‘문화권리’라는 말을 들어보기나 했을까? 80년을 살아도 영화관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이도 있으니 음악회나 전시회장이야 물어 무엇하겠냐 싶다. 이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게 가능이나 할까? 가능하려면 그건 어떤 방식일까? 고민이 깊어진다. 도시든 농촌이든 어촌이든 산촌이든 인구가 많든 적든 나이가 많은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지 결혼을 했든 하지 않았든 어떠한 상황이든지 누구든지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것이 우리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현실은 그러한가? 문화예술은 그러한가? 문화예술교육은 이러한 원칙을 지키고 있는가? 혹시 적극적인 요구가 많이 있는 곳으로부터 그 욕구를 우선적으로 채워주고 있지는 않은가?
문화예술 인프라가 충분히 갖추어진 도시에서 공적인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은 개인의 소외로부터 생겨난다. 구조에서 소외되거나 일탈된 개인의 문화권리를 문화예술교육이 공적으로 보완 보충해주고 있는 것이다. 농산어촌 문화예술교육의 필요성은 도시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농산어촌은 물적‧인적인 문화예술 인프라의 절대적 부족과 문화예술교육 구조의 미비함으로 인하여 욕구의 발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 해결 또한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이다. 부족하면 채우고 구조를 만들기 위한 정책을 펼쳐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형편이고, 부족한 상태에서나마 최선의 방식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책은 늘 풍족한 곳을 우선으로 하는 우를 범하였다. 일정한 규모와 형식을 갖추지 않으면 교육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의 조건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문화예술교육정책은 농산어촌에는 맞지도 않으니 적용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도시의 관점을 벗어나
우선 지금과 같은 공모 방식의 사업 규모와 형식으로는 이동수단이 확보되지 못한 (노령화) 소규모 자연부락 마을 단위 대상자들의 문화예술교육은 영원히 해결될 수가 없다. 정책적으로는 나누어진 각종 지원 사업을 하나의 틀로 묶어서 시행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교육과 생활문화공동체, 도시재생, 평생학습 등을 하나로 묶어서 추진할 수 있는 새로운 구조가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작은 마을에 적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이 필요할 것이고 이를 수행하는 강사나 활동가는 그 지역의 개별 예술가나 예술강사를 발굴하여 활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학교 예술강사제와 같이 농산어촌에 거주하는 해당 인력을 사회문화예술교육 활동가로 등록하여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활동가들은 평생학습교육에서 시행하고 있는 교육자가 대상자를 방문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형식의 교육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연부락 마을 단위의 교육이 필요하며 장르 예술교육보다 종합적인 문화교육이 절실하다. 갈수록 노령화는 진행되고 이동수단은 해결되지 않으니 앞서도 살펴보았듯이 피교육자의 인원에 구애됨 없이 교육이 진행될 수 있도록 수혜 인원 기준의 현실화도 필요하다. 농번기와 농한기의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탄력적인 교육방법을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귀촌한 예술가 한 사람이 그 지역의 동네마다 작은 모임들을 만들고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채워주어 7~80 평생을 잊고 살았던 과거의 미래를 찾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농촌의 작은 마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사진_필자 제공
최수환
최수환
화가, 문화기획자, 갤러리도암한방 대표. 대구에서 10여 년간 문화예술교육을 하다가 경북 의성군 단밀면 시골 마을 농가를 개조한 갤러리도암한방을 열고 동네 어른들과 그림으로 놀아보고자 하는 귀촌 4년 차 전업 화가. 우리나라 화가 100인의 100가지 이야기를 56강으로 구성하여 56주간의 강의 ‘촌에도 문화가 있다 – 시골화가 최수환의 그림읽기’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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