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하지 않는 것의 미학
일본이 낳은 전설적인 음악가 오타키 에이치(大瀧詠一)의 생전에 자신의 스튜디오를 찾아온 손님들은 일단 예외 없이 스튜디오에 있는 막대한 레코드 컬렉션을 보고 “도대체 레코드가 몇 장 있는 겁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타키 에이치는 그런 질문에는 아예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질문에 대답해도 오타키의 음악성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레코드는 10만 장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해도 “와, 그렇군요. 굉장하군요”하고 끝난다. 유명한 화가에게 “캔버스 1장을 몇 분 만에 그릴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베스트셀러 작가에게 “하루에 최대 몇 자까지 쓸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신통한 대답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물음은 음악가와 화가 그리고 작가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수치화할 수 없는 힘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힘’이라고 하면 곧장 수량화 가능하고 남들과 비교 가능한 그 무엇으로 생각하는 ‘정형적 사고’에 속수무책으로 묶여 있다. ‘학력’ ‘능력’ ‘역량 강화’ 사회에 살고 있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특히 ‘사는 힘’이라는 것은 외형적·수치적으로 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내재적·잠재적인 자질이다.
예를 들면 ‘담력’은 강한 스트레스에 조우했을 때 그 위험한 상황에서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자질인데, 그것은 위기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보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느긋하고 서두르지 않는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것으로 발현된다. 즉 외형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아무 징후도 없는 것이 담력의 ‘본질’이다. 그래서 ‘힘’을 오로지 외형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성과와 달성에 의해 계측하는 것을 바라는 사람의 눈에 ‘담력’은 아마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현대 학교교육은 아이들의 ‘담력을 단련하기 위한 교육 프로세스’와 같은 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러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당연한 말이지만 ‘담력’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세계담력선수권대회> 같은 것을 개최해서 이것을 정량적으로 겨루는 것은 완전히 무의미(Nonsense)하다.
‘무엇이든지 잘 먹을 수 있는 것’도 ‘사는 힘’ 중에서는 아주 중요한 능력이다. 먹을 것이 충분하지 못한 환경에서는 이 능력을 갖춘 개체는 확실히 그렇지 않은 개체보다도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것 또한 타인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경쟁해서 마지막에 모든 경쟁상대를 다 물리친 챔피언이 주위를 돌아보면 거기에는 ‘애당초 먹을 수 없는 것을 무리하게 입에 아무거나 집어넣는 바람에 죽어서 널브러진 경쟁상대’들의 층층 겹겹으로 쌓인 시체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도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디서든지 잘 잘 수 있는 능력’도 ‘누구 하고 든지 친구가 될 수 있는 능력’도 모두 잘 살기 위해서 중요한 능력이라서 그것을 늘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은 윤택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타인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핍의 자각, 의미의 감지
‘잘사는 힘’은 애당초 타인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교해도 좋은 것은 ‘어제의 자신’뿐이다. 어제의 자신보다 담력이 좀 늘었는지, 어제의 자신보다 좀 더 릴랙스할 수 있게 되었는지. 어제의 자신보다는 포용력이 좀 깊어졌는지, 그런 점검은 자신의 심신 상태를 점검하기에 매우 유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힘’들은 타인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 ‘잘 살기 위한 힘’으로서 빼놓을 수 없는 힘 중 하나인 ‘배우는 힘’ 또한 타인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는 어느 책에서 ‘배우는 힘’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력(學力)’을 ‘성적’과 동의어로 점수화해서 우열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력’이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배우는 힘’을 가리킨다. 그것은 수량화를 강조하고 효율화를 강조하는 시대정신 덕분에 외형적으로 성적과 평가로서 표시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본래는 형태를 갖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우는 힘’이라는 것은 ‘자신의 무지(無知)와 비력(非力)을 자각할 수 있는 것’, ‘자신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선구적으로 아는 것’, ‘자신을 이끌어 주고 가르쳐 줄 사람(멘토)을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일련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힘은 성과와 달성으로는 표시할 수 없다. 배우는 힘은 ‘결핍태(缺乏態)’로서만 존재한다. 뭔가 부족하다는 자각의 강도를 가리켜 ‘배우는 힘’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미숙함의 자각’, ‘모종의 지식과 기능에 관한 결여감’, ‘스승에게 승인받고 싶은 욕망’과 같은 것은 우리의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처럼 ‘잘 사는 힘’이라는 것은 단일한 것도 아닐뿐더러 애당초 타자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사는 힘은 ‘잘 사는 기회를 증대시키는 것’을 어떻게 많이 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물음만으로 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는 ‘그런 일을 하더라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것’ ‘어떤 의미도 없는 것’이 자신에게는 도움이 되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눈앞의 세계가 자신에게는 고유한 방식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감지하지 못하는 의미를 세계로부터 길어낼 수 있는 것이다. 소원한 세계를 친근감 가득한 세계로 고쳐 쓸 수 있는 것이다.
셜록 홈즈는 런던 경찰국(Scotland Yard)이 ‘어떤 단서도 없다’고 떠나버린 살인 현장에서 한 손에 확대경을 들고 관찰하고 “곳곳에 단서가 남겨져 있다”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 짓는다. 홈즈에게 있어 세계는 경찰들의 그것보다도 친근하게 다가오고 의미가 넘치는 곳이다. 그것이 홈즈 추리의 우위성을 담보해 준다. 그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눈에는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이 의미를 갖고 다가온다. 문제는 이 ‘잘 사는 힘’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식자를 작금의 한국에서 만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
박동섭
박동섭
학문 간의 경계, 지역 간의 경계 그리고 연령 간의 경계를 종횡무진으로 이동하는 ‘이동연구소’ 소장이자 독립연구자다. ‘○○연구자’라는 제도화된 아이덴티티로 살아가는 일의 한계를 실감하며 ‘아이덴티티 상실형 인간’으로 살고 공부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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