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 두 위기론이 대두된 지도 이십여 년이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서울 대학가에 스무 곳이 넘던 인문사회과학 서점은 하나둘씩 사라져 이제는 단 두 곳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때 ‘지성의 산실’이라 불리던 대학이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지성을 키워나갈 수 있을까? 그 공백을 메꾸고 있는 인문학 공동체 혹은 아카데미를 소개한다.
대학의 울타리를 넘다
“전 사회가 능력주의와 물질 숭배에 물들어가는 현 시기, 인문학이 설 곳은 없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해결이 가능할지 모를 정도로 문제가 광범위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것인가?”
푸른역사 아카데미는 단체 소개문에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제도 밖에서 역사의 미래를 찾는다’라는 아카데미의 슬로건처럼 대학이란 제도의 울타리 밖에서 새로운 지성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답을 찾아가고 있다. 다른 인문학 대안 공동체들도 같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중지성의 정원도 단체의 취지문에서 “오늘날 대학은 지성의 성장과 소통 및 전파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성 발전의 걸림돌로 되고 있다”며 신자유주의적 기업이나 국가의 외주하청기업체와 다를 바 없어진 대학의 현실을 비판했다.
‘모두’를 위한 공간
제도의 울타리를 넘어 탄생한 대안적 인문학 공동체들은 두 가지의 경계를 허문다. 하나는 참여 대상을 한정 짓지 않고 모두에게 개방하는 것이다. 모든 인문학 공동체들은 소개문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다중지성의 정원은 단체 취지문에서 “학생, 교사, 교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 노동자, 가사 노동자, 성노동자, 실업자, 사무직 노동자, 서비스직 노동자, 연구원들, 아이들, 주민들 등이 함께 모여 현재의 질서를 넘어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꾸리고…” 라고 밝히며 다양성이 지성을 키워나가는 데 중요하다는 점을 언급했다.
아카데미 느티나무 역시 “모든 시민은 교사, 예술가, 정치가입니다”라고 선언하며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키우려는 시민들이 즐겁게 만나고 서로를 환대하는 배움의 공간’임을 명시하고 있다. ‘21세기 서원’을 표방하는 길담서원도 역사적 전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공부와 놀이를 실천하는 인문·예술 공간을 꿈꾸고 있다. 시민의 자율적 인문공동체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연령대와 모든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문제를 인식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문의 경계를 넘어
학문 분과의 경계도 뛰어넘는다. 다중지성의 정원은 철학, 정치, 사회, 문학, 언어,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개설하고 관련한 기획세미나도 열고 있다. 정치철학 고전들은 물론, 시 읽기 모임, 번역 세미나 등 분야를 넘나드는 것은 물론 모임의 성격도 다양하다. 한 인터뷰에서는 다중지성의 정원을 “특정 분과 학문에 갇히지 않고 상호 접속하고, 공통의 즐거운 지식과 행동들을 생성하는 공간”(웹진 [인문360])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아카데미 느티나무가 <시민교육> 1호(2009.12)에서 밝힌 교육방향에도 이런 가치가 드러난다.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교육, 지성·감성·영성 그리고 실천이 통합되는 시민교육을 지향한다는 슬로건처럼, ‘바느질 수다’ ‘술술타로’ ‘힙합 강좌’까지 일상의 소소함과 전문 분야를 결합해 대중적으로 풀어낸 강좌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현재 진행 중인 예술워크숍 ‘난민과 나, 보이지 않는 실찾기’는 사회적 이슈를 예술적 방식으로 풀어보는 것으로, 분야를 넘나드는 시민교육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보여준다.
푸른역사 아카데미는 역사 전문 출판사 ‘푸른역사’에서 출발했지만, 예술, 역사,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전문가와 시민이 모여 모임을 이어나가고 있다. 길담서원도 다양한 독서모임과 함께 철학·역사·경제공부 모임, 청소년인문학교실, 어른인문학교실 등 광범위한 대상과 분야를 넘나들며 여러 학습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위기는 그 자체로 사회의 병폐를 보여주지만, 때로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대학이라는 공간과 사람과 학문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가능성을 탐구하는 인문학 공동체들이 걸어가게 될 미래에 동참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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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