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빛의 노란색 칠 위에 정갈한 글씨체로 쓰인 책방 이름, 한미서점. 올해 초 2019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일상의 작가’ 사업에 참여할 공간을 선정하는 자리에서 한미서점 두 분의 주인장 중 한 분을 뵈었었다. 책을 사러 갔다가 서점 주인과 결혼하게 된, 그리하여 지금은 남편과 함께 서점을 운영하는 김시연 대표였다. 왜 ‘일상의 작가’ 사업에 참여하려 하시는지 물었더니, 대답이 짧고 분명했다. “책만 팔아서는 더 이상 안 되니까요.” 최근 몇 년 새 동네 책방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책방 입구에는 언제나 북 토크, 글쓰기 수업, 책 제본 워크숍 같은 프로그램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동네 책방이 지역의 문화공간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도 하고, 책만 팔아서는 운영이 어려운 현실을 짐작하게도 한다. 대를 이어 무려 60년을 넘게 책방을 꾸려온 한미서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즘의 감성에 맞는 신간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에 봤었던 책을 다루는 곳이니. 중고책을 사고파는 곳만이 아닌 다른 쓰임새를 만들어 가고 있는 한미서점의 공동 운영자이자 아내와 남편인 김시연, 장원혁 대표를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한미서점은 드라마 <도깨비>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요즘에도 많이들 찾아오시나요?
김시연 : 드라마 방영 후 정말 많이 왔었어요. 이 좁은 곳에 하루 동안 500명이 왔었을 때도 있었어요. 어휴, 그땐 힘들더라고요. 요즘은 그때 비하면 찾는 사람이 줄어들긴 했는데, 드라마에서 알게 되어 ‘사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은 여전히 계세요.
드라마를 통해 급작스레 널리 알려지긴 했지만, 근래 몇 년 사이 동네 서점의 증가와 함께 오래된 것, 낡은 것에 대한 관심이 일종의 트렌드가 되어서 중고책방의 가치에 다시 주목하는 분위기도 있지요. 동네 책방이란 면에서는 지역 문화공간으로 의미를 부여받거나 중고책을 다룬다는 면에서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낭만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고요. 책방 운영자로서 생각하는 중고책방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요?
장원혁 : 책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는 점이죠.
하하하. 긴 서두가 붙은 질문에 아주 간명한 답을 주셨네요.
장원혁 :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때마다 다 제 돈 주고 사기 어려운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맘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책방이 있어야죠.
맞아요. 보고 싶은 책을 싸게 살 수 있는 책방이란 점이 중고책방의 분명한 존재 이유인데, 그런 경제적 이유가 아닌 어떤 다른 의미를 더 부여해야 문화적으로 존재할 만한 가치를 가진 듯이 여길 필요는 없지요.
장원혁 : 그렇죠. 경제적 이유 말고 한 가지를 더 꼽자면… ‘추억’이 아닐까 싶네요. 책에 묻어있는 기억을 떠올리고, 그때 그 시간에 대해 추억할 수 있다는 점은 중고책방의 큰 매력이죠.
아버님께서 10대 때부터 노점에서 책과 잡지를 팔기 시작해 1955년 가게를 얻어 책방을 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드님이신 장원혁 대표께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점 일을 돕다가 가게를 이어받으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책방을 운영하고 싶으셨나요?
장원혁 : 아니요. 당연히 아니었죠. 절대 안 물려받으려고 했어요. 아버지가 몸이 편찮아지시면서 가게 운영이 어렵게 되었었는데, 책방을 이어받는 게 싫은 것보다 책방이 없어지는 게 더 싫더라고요. 그래서 이어받았어요.
책방으로 먹고사는 게 절대 쉽지 않잖아요. 직접 해보니 어떠시던가요?
장원혁 : 어휴, 어렵더라고요. 부모님은 열심히 살면 세상이 알아주겠거니 하시며 오랜 시간 책방을 운영하셨어요. 저 역시 꾸준히 책방을 열고,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면 찾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 때 만들어진 틀이 내 몸에도 고스란히 배어있었던 것이죠.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가 닦달하더라고요. 하하. 알려야 한다고.
김시연 : 몰라요. 말 안 하면 모르죠. 눈빛만 보고 아는 건 부부 사이도 안 되는데 누가 알아주겠어요. 묵묵히 책만 팔아서는 운영이 안 되니까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도록 책 정리를 하고 이곳저곳 직접 수리도 했죠. 공간을 알뜰하게 써보려고.
장원혁 : 책방을 ‘음식’이 아니라 ‘그릇’으로 생각하니 이제까지 와는 다른 태도가 생기더라고요. 음식 장사를 할 때 보기 좋고 먹기 편한 식기를 사는 것처럼 서점을 꾸몄죠.
한미서점에서 그동안 했던 프로그램을 살펴보았는데, ‘손으로 생각하기-일상의 발견에서 인생의 기록으로’라는 타이틀로 진행한 60세 이상 어르신과의 글쓰기와 목공 수업, 점자 자수를 놓으면서 시각장애인을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손끝으로 여는 세상-책으로 나눠요’가 눈에 띄더라고요. 어떤 계기로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하신 건가요?
김시연 : 창문을 보고 있다가요. 책방에 있으면 유리문 밖을 바라볼 때가 자주 있죠. 오늘은 어떤 사람들이 오가나, 손님이 오시나 궁금해서요. 그러던 어느 날 폐지 줍는 어른이 지나가시는 거예요. 그분을 보면서 ‘저분은 나이 들어 지금 이렇게 살 거라는 걸 짐작하셨을까?’ ‘나 또한 정작 저 나이가 되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하는 질문이 들었어요. 나이 들어서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엄마와도 얘기해보고 노인 생애체험센터 가서 80대 노인 체험을 해보기도 하면서 프로그램을 구상했어요. 소소한 일상에 대해 감사해하는 짧은 글을 쓰면서 긍정적인 생각 하도록 하고 의자를 만들면서 작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했죠. 시각장애 관련한 프로그램도 우리 서점 앞으로 종종 지나다니는 두 분의 시각장애인을 보면서 생각한 것이고요.
  • ‘일상의 작가’
  • ‘손끝으로 여는 세상 책으로 나눠요’
책방을 운영하는 일도 쉽지 않겠지만, 프로그램 운영도 절대 쉽지 않잖아요. 앞서 책방 운영해 보니 어떠시냐는 질문에 장원혁 대표님이 크게 한숨 한번 쉬셨는데, 김시연 대표께도 같은 질문을 드릴게요. 프로그램 운영, 해보니 어떠시던가요?
김시연 : 휴, 어렵더라고요. 프로그램 운영을 시작한 처음 1~2년은 진짜 힘들었어요. 책방에 와서 프로그램만 딱 참여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책도 들춰보고 그러다 관심 가면 사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거든요. 중고 책이 저렴하기도 하니까. 근데 무료 프로그램만 딱 참여하고 가는 거여요. ‘어,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실망감이 컸죠. 몇 년 해보니 이제는 프로그램 운영과 책방 매출이 꼭 연결되지는 않고,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해서 책에 더 관심 두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설사 책 읽기 프로그램, 글쓰기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요. 지금은 그런 부분은 많이 내려놓았어요. 후훗.
책방에서 문화 혹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운영을 함으로써 기대하는 효과는 있지만, 장담할 수는 없죠.
장원혁 : 그런데도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게 있을 거라고 저는 믿어요. 사는 곳에서 멀지 않고, 무료 프로그램이니 가볼까 해서 한 번이라도 이곳에 오면 그 경험이 주는 기억으로 인해 언젠가는 책을 좀 더 가까이하고, 책방을 한 번 더 들러볼 수도 있겠죠.
김시연 : 그렇죠.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며들겠죠.
장원혁 : 가랑비에 젖은 옷은 금방 마르는데…….
김시연 : 프로그램을 몇 번 했다고 해서 우리 서점이 바로 동네 문화 커뮤니티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참여자들에게도 당장 눈에 띄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요. 그런데 적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느슨한 관계가 이어지고 있는 건 확실해요. 책 사러 왔다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경우도 있고,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아이와 학부모가 가까이 지내는 가족에게 같이 하자고 권해서 오게 된 경우도 있어요.
장원혁 : 우리 서점에서 하는 여러 문화 프로그램은 서점이라는 그릇에 맞춰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보는 요리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사람들에게 계속 맛을 보게 하고, 맛을 느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도록 하는.
마르지 않도록 계속 스며들게 하려면 책방도 계속 운영하셔야 하고 프로그램을 꾸준히 하셔야 할 텐데요, 앞으로 한미서점을 어떻게 꾸려나가고 싶으신가요?
장원혁 :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시절에는 읽을거리보다는 학습지를 많이 팔았어요. 먹고 사는 데 더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저는 이야기가 있는 책에 더 욕심이 나고, 이야기가 있는 책방으로 사람들과 만났으면 좋겠어요.
김시연 : 이제 책방이 책만 팔아서는 먹고 살 수는 없는 시대인 거 같아요. 심지어는 책방에 들어와서 “여기 있는 책 파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는 분도 계세요. 이곳을 관광지로만 알고 오신 거죠. 그래서 제가 블로그에 “한미서점은 서점입니다”라고 태그를 달아놓기도 했어요. 서점에서 문화프로그램을 운영하면 책방의 쓰임을 넓힐 수 있고, 지역문화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서점 운영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책을 파는 곳이라는 정체성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언젠가는 책방이 책방 그 자체로 문화공간이 되고, 자생적으로 운영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시연·장원혁
김시연·장원혁

한미서점 공동대표. 아버지가 운영하던 서점을 이어받은 주인과 디자인을 전공한 손님으로 만나 결혼한 후 한미서점을 함께 운영하고 있다. 1960년에 설립된 한미서점은 한 번의 이전과 두 번의 확장을 거쳐 약 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서점과 문화프로그램 공간 허공상실을 이루어 냈다. 2016년 문화가 있는 날 ‘낡은책의부활’,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엄마의 책장’을 시작으로 4년간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허공상실’(2017, 2018), ‘일상의 작가’(2019), ‘소장용 도서읽기 모임’(2018), ‘꿈꾸는 니들’(2019), 인천 지역문화예술교육 ‘손으로 생각하기’(2019), 동네책방 문화사랑방 ‘손끝으로 여는 세상 책으로 나눠요’(2019) 등의 문화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사진 _ 이재범(pov스튜디오) andy45a@naver.com
달라라
달라라
문화예술 분야를 포함해 여러 공공프로젝트 기획‧실행자로 오랜 기간 머리 쓰는 일을 해 왔고, 지금은 운동트레이너로 몸 쓰는 일도 같이 하고 있다.
dahllala.funk@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