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 영도구 남도여중길 130. 6월 초순, 때 이른 더위와 강한 햇빛을 맞으며 걸어 올라갔더라면 진땀을 꽤나 흘렸으리라 싶을 만큼 무척 가파른 언덕배기에서 남도여자중학교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수업이 진행될 무용실 앞에서 낯선 방문객에게 “안녕하세요!” 하며 격의 없이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을 만난 후 다시 마음이 산뜻해졌다. 1학년 디자인 수업에 참여하고자 서로 다른 반에서 모인 16명과 함께 할 오늘의 미술과 연극 융합 수업에 대한 기대도 더 커졌다.
우리가 방문한 날은 <2019 해외전문가 연계 TAT Lab 국외연수 후속 연구모임> 수업실연 ‘공간의 예술화 – 모두의 학교, 모두의 예술’ 두 번째 수업이었다. 지난 3월 미국 워싱턴주 ‘티칭 아티스트 트레이닝 랩’(Teaching Artist Training Lab, 이하 TAT Lab)과 연계한 국외연수에 다녀온 네 명의 예술강사 중 문은아, 한지혜 예술강사의 협력 수업이었다. 함께 국외연수에 참여했던 이윤미, 이은희 예술강사도 자신들의 수업실연을 앞두고 이 수업에 보조강사로 참여했다.
무대, 배우, 자신감
연극 수업은 처음이라는 아이들과 네 명의 예술강사는 몸풀기를 겸하여 커다란 원을 만들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즉흥 놀이를 진행했다. 지난 시간에 문은아 예술강사와 아이들이 학교 공간을 탐색하고 만들어낸 디자인 큐브가 중요한 소품으로 이용되었다. 학교 공간과 캐릭터, 행동을 담은 세 개의 큐브가 한 세트인데, 큐브를 던져서 선택된 하나의 캐릭터와 공간, 행동을 하나의 상황으로 만들어 즉흥적으로 보여주는 게임이다.
“린타로(게임 캐릭터)가 / 음악실에서 / 치킨을 몰래 먹다가 들킨다”
“곰돌이가 / 급식실에서 / 코끼리코로 20바퀴 돌고 윗몸일으키기를 10번 한다”
“무민이 / 상담실에서 / 예쁜척하며 애교를 부린다”
지난주 수업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미션이어서인지, 짧은 순간 캐릭터와 공간의 특징을 잡아 즉흥적인 몸짓을 해야 하는 쉽지 않은 놀이를 아이들은 수줍어하면서도 빼지 않고 끝까지 즐겁게 참여했다. 미션을 수행할 아이가 수줍어하면 다른 아이들이 함께 포즈를 취해주기도 한다. 한지혜 예술강사의 안내로 한 사람씩 돌아가며 게임에 임하는 동안 문은아 예술강사는 적극적인 아이, 움직임이 작은 아이, 표현력이 좋은 아이, 긴장한 아이 등 행동과 참여도를 관찰하며 모둠을 나눌 준비를 했고, 학생 네 명과 예술강사 한 명이 함께 하는 방식으로 4개의 모둠이 만들어졌다.
이제 본격적인 모둠 활동이 시작되었다. 모둠별로 학교 공간 중 하나를 정해서 실제로 겪었던 에피소드나 특별했던 느낌을 공유하고, 그것을 가볍게 정지 동작으로 보여주어 다른 모둠이 맞출 수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발레 포즈를 취하면 한눈에 ‘무용실’인 줄 알아볼 수 있다. 책상에 앉아 공부도 하지만 엎드려 자기도 하는 ‘교실’과 학교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밥 먹는 공간 ‘급식실’도 금방 맞춘다. 햇빛을 쐬면서 생각하기 좋은 공간은 ‘큰 거울 옆 마당’이다. 다들 한눈에 알아보게 표현도 잘하고 눈치 빠르게 특징을 잡아내는 게 이어질 활동도 예감이 좋다. 이제 실제로 각각의 공간을 무대 삼아 짧은 장면을 구성해 보기로 한다.
한지혜 예술강사가 먼저 간단한 규칙과 이동할 공간을 설명한 후, 짧은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연극에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무대요!”(우리가 오늘 학교 공간을 무대로 사용하는 거예요.) “배우요!”(여러분이 배우가 되어 연기해주셔야 해요.) “자신감이요!”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자신감을 가슴에 품고 무용실, 급식실, 교실, 마당 등 조별로 맡은 공간을 찾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고 발랄하다.
일상의 장소에서 특별한 경험을
아이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는 공부하고 밥도 먹고 휴식도 취하는 공간이다. 또한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고 웃고 울고 싸우고 화해하는 곳이다. 문은아, 한지혜 예술강사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따뜻한 감성을 키우는 풍부한 경험을 더 많이 할 수 있기를 바랐다.
큰 의미에서 ‘일상의 경험이 예술이 될 수 있고, 모두가 예술을 할 수 있다’는 빅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이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일상 공간인 학교 공간을 일상이 반복되는 지루한 공간, 의무적인 것들을 해내야 하는 곳이 아닌 예술적 공간으로도 활용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 한지혜 예술강사
특별하지도, 새롭지도 않은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예술로 표현해 특별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매일 지나치는 일상이라도 자세히 바라보면 재밌고 새로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교 공간에 대한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새로운 시각으로 학교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 문은아 예술강사
큰 거울 옆 마당, 교실, 급식실, 무용실로 이동한 모둠은 각자 빠르게 장면을 구성했다. 아이들이 공간의 경험을 나누고 그것을 바탕으로 누구나 한가지 역할을 맡아서 대사와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네 명의 예술강사는 관찰하기도 하고 질문을 유도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이들은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각 공간에서 벌어지는 3~4분 정도의 장면을 만들어냈고, 각 모둠이 만들어낸 이 작은 ‘연극’을 구경하느라 모두 함께 4층 큰 거울 옆 마당부터 지하 1층 무용실까지 차례로 이동했다. ‘큰 거울 옆 마당’에서는 전학 온 학생이 ‘잘 나가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가 싶더니 의외의 반전이 벌어졌다. (나중에 들으니 뻔하게 화해하고 끝나는 것은 싫다고 했단다.)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뒤돌아 판서하는 동안 아이들이 조잘대는 모습이 리얼하다. ‘급식실’에서는 맛있는 치킨 샐러드를 두고 아기자기한 이야기가 벌어진다. ‘무용실’에서 몰래 먹으려다 쏟아져버린 과자를 집으려는 아이들의 슬로모션이 눈길을 끌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다 같이 둘러앉아 오늘의 경험을 나눈다. 아이들이 학습 목표에 도달했는지 확인하는 형성평가는 TAT Lab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 중 하나다. 평가표를 돌려서 배우, 희곡, 무대, 참여도까지 5점 척도로 동료평가를 하고 최우수팀을 뽑도록 했다. 한마디씩 소감을 전할 때는 어엿한 배우가 된 것처럼 확실한 평가를 하기도 했다.
“○○가 약올리는 연기가 재밌었어요.”
“대사가 잘 들렸고 호흡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자신감 있게 했어요. 과자가 엎어졌을 때 슬로모션이 재밌었어요.”
“다른 반 친구들과 활동했는데도 어색하지 않고 친해진 것 같아요.”
“연기하면 안 되겠다 싶어요. (일동 웃음) 그런데 다음에 또 하고 싶어요.”
학교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탐방하고 사용해야 했던 이 수업은 양혜정 교사와 남도여자중학교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이뤄졌다. 같은 반 아이들도 아니고 교실 활동도 아니어서 다른 교사에게 협조를 구할 일이 많았을 텐데 어려움은 없었는지 묻자 양혜정 교사는 “이 지역이 도심에서 떨어져 있어서 다른 문화적 활동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아이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면 저는 힘들지 않아요.”하시며 환하게 웃으신다. 웃음 많은 아이들에게는 좋은 선생님이 계셨다.
함께 찾아 나가는 예술교육의 본질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2017년부터 학교 예술강사, 교사의 문화예술교육 현장 실행 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TAT Lab과 연계한 연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TAT Lab 정규 프로그램이 약 7개월간 세 차례의 집체연수와 학습계획서 코칭 및 텔레컨퍼런스 등으로 진행되는 데 비해 국내 연수는 해외 전문가를 초청해 3박 4일간 짧은 일정으로 프로그램의 일부만 참여해 볼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이에 2018년 TAT Lab 연수 참여자 중 미국 시애틀에서 현지 티칭 아티스트와 함께 TAT Lab의 마지막 집체연수를 직접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이번 국외연수 후 참여자들은 연수내용을 바탕으로 정례회의 등 국내 후속 연구모임을 진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팀을 나눠 ‘빅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학습계획서(Learning Plan, LP)를 작성했다. 또한 학습 목표와 달성기준을 구체화하기 위해 이번 국외연수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학습계획서 피드백 방식인 튜닝 프로토콜(Tuning Protocol)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렇게 다듬어진 학습계획서로 실제 수업을 진행해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예술강사로 혼자 활동하며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만 실행했다면 이번엔 팀원들과 함께라서 새로운 시도와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해낼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고 각자의 경험과 전문성이 만나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 이번 TAT Lab 연수 후속 연구모임의 매력이자 필요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윤미 예술강사
연수 후에 혼자 생각을 더듬어가는 게 아니라 함께 다녀온 동료 예술가와 더불어 체화하는 시간이라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함께 연습하다 보면 더 나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시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 같습니다.
– 이은희 예술강사
이날 진행된 수업 실연에서는 네 명의 예술강사들이 지난 3월 국외연수에 지원 신청할 때부터 오늘 수업을 마칠 때까지 계속 연구하며 고민을 이어온 흔적이 보였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팀’으로 의견을 나누고 문제를 해결하며, 강사의 ‘가르침’이 아닌 학생의 ‘배움’에 집중하는 모습이 특별했다. 예술강사와 예술강사, 예술강사와 교사의 협력 수업은 아직 우리 학교 예술교육 현장에서는 흔하지 않은 모습이다. 학교 예술교육이 달라지려면, 그 시작에는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서로에게 자극과 영감을 주는 좋은 동료를 만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사진 _ 박진우 사진작가 nowhere1999@gmail.com
arte365
남은정
프로젝트 궁리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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