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로 뿌연 하늘만 마주했는데 이날의 부산 하늘은 맑다 못해 쨍하게 쾌청했다. 공기 속 부유하는 물질들이 어느새 일상의 기분마저 좌우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끼며 지구 반대편에서 온 그녀를 만나러 중앙동 한성1918로 출발했다.
전국 곳곳에서 다채롭게 열린 2019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행사 프로그램 중 가장 먼저 신청 마감이 되었다는 이번 연수는 2세부터 12세까지의 어린이를 위한,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에 대한 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아일랜드 디 아크(The Ark) 입주 작가 루시 힐(Lucy Hill)을 초청했다. 디 아크(The Ark)는 아일랜드 국내외 예술가들과 협력 해 어린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연, 전시, 워크숍과 교육 프로그램 개발을 도모하는 유럽 최초의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센터이다. 미술 연구로 조지 캠벨기념상과 토마스단만 기념상을 받은 화가이자 교육자인 루시 힐은 그곳에서 존 쿨라한 아동예술가 레지던시(Prof. John Coolahan Early Years Artist Residency)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새롭지 않지만 새로운 재료
문화 행정에 종사하며 타의로 이런저런 워크숍에 참여하긴 했지만 이번 행사에 마음이 동한 것은 솔직히 개인적인 사유도 있었다. 6세 유아를 키우는 보호자로 ‘기술’이 아닌 ‘감성’을 키우는 유아 문화예술교육의 무엇인지 궁금했다. 재밌게 놀면 장땡이다 싶다가 각종 교구의 필요성을 어필하는 또래 부모를 만나면 한쪽 귀가 팔랑댔다. 놀이든 교육이든 목적이 어떻든 간에 번듯한 ‘재료’에 먼저 손이 갔던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루시 힐의 워크숍은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고 새롭진 않지만 새로운 재료들의 퍼레이드를 보는 것 같았다. 마음껏 이은 종이 빨대는 누군가의 얼굴이 되기도 했고 옷장 괴물로도 변신했다. 곳곳에 펼쳐진 흰색 종이 빨대 향연으로 워크숍 장소는 금세 재밌는 놀이 공간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세션 때 재료들은 더 흥미로웠는데 주방과 냉장고, 소품 창고나 쓰레기 박스 등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것들이 등장했다. 꽃, 식물, 야채, 얼음, 분필, 채, 알루미늄 종이 등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재료를 활용해 루시 힐이 드로잉과 채색 시연을 선보였고, 이후 참가자들이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무 조각이 도장이 되기도 하고, 꽃이 곱슬머리로 활용되기도 했다.
야채를 통해 물감을 만들거나 템페라 기법(달걀노른자와 아교를 섞은 불투명 안료를 사용하는 기법)처럼 풀이랑 실제 원료를 바탕으로 실생활에 사용되는 가루를 섞어 색을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이 프로그램이 놀라웠던 것은 2세에서 4세를 대상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었다. 겨우 말을 시작하는 아이들이 밀가루 놀이처럼 촉감을 느끼는 놀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재료를 활용해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 수 있을까 궁금했다.
“저는 나이대별로 프로그램을 설계한다면 고착화되기 쉽다고 봐요. 그래서 재료 중심의 교육이 보완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이를 구분하지 않는 학습 환경이 더 자연스러울 수 있죠. 2세에서 4세의 어린아이들도 충분히 각 물질의 특성을 가지고 즐길 수 있어요.”
– 루시 힐
재:활용과 변형, 그리고 창의
질문을 주로 받던 루시가 참가자들에게 질문했다. “참가자들이 학교에 다닐 때 배운 예술교육과 오늘날 예술교육이 차이가 있나요?”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 변한 점이 있다, 없다, 하면서 참가자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학교문화예술교육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유초등의 예체능 사교육비 역시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진로의 한 장르로 엘리트 예술교육은 감소 추세이나 예술이 창의력 증진에 도움된다는 공감대로 창의예술교육은 각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에서 유·아동 예술 프로그램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의력 증진이라고 했다. 그 점에서 이번 워크숍은 ‘창의예술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루시만의 해설집 같았다.
워크숍 2세션은 햇빛 한가득 내리쬐는 옥상정원에서 진행됐다. 참가자 각자가 소지한 오브제를 청사진(Cyanotype) 종이에 올려놓고는 일정 시간 햇빛에 노출 시킨 후 노출된 종이를 물에 헹구는 작업을 했다. 그러자 통상 인쇄물에서 보기 힘든 맑고 푸른색의 종이 배경에 대비되게 오브제를 올린 부위는 투명한 흰색으로 변해갔다. “와!” 하는 짧은 탄성이 곳곳에서 나왔다. 이 청사진 기법은 철의 산화 반응을 이용한 것으로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고 인화지에 직접 물체의 실루엣을 남기는 오랜 사진 기법의 하나라고 했다. 누군가의 안경, 자동차 열쇠도 어김없이 흔적을 남겼고, 일부 창작물은 밤하늘 별똥별 지나가듯 흰 선이 선명히 드러났다.
“햇빛만으로도 종이 색깔이 바뀌고 물에 담그고 나면 사진처럼 실루엣이 만들어진다니 아이들이 너무 신기해하겠어요.”
네 번째 세션에는 재활용된 얇은 플라스틱 가방과 비닐이 등장했다. 헤어드라이어 등을 통해 비닐에 열을 가한 후 참가자들 간 협력 해 입체적인 형태의 조형물을 만들어 냈다. 거대한 풍선, 이어지는 동굴 등이 만들어졌다. 언어가 없어도 손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재료들이 변하며 창작물에 스토리를 더해갔다. 어쩌면 그동안 예술교육이 즉흥과 과정이 주는 창의보다 의도와 완성된 결과물에 방점을 둔 것이 아니었는지 되짚어 봤다. 아일랜드에서는 지역 예술가가 학교에 개입되어 그 학교 학생들의 창의력 증진에 도움이 되는 계획들을 함께 짠다고 했다. 하나의 수업 수행을 넘어 지역사회 일원으로 예술가가 교육자들과 협업을 중요시한다는 조언을 되짚어 보면 그만큼 과정이 중요하다 싶다.
“창작물에 의도도 만들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에 의도가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과정 자체로만 해도 충분하죠. 생각하는 것을 꼭 언어로 표현해야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언어를 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죠.”
– 루시 힐
세션별로 마무리가 된 후에는 워크숍 내용을 토대로 향후 어린이 예술교육을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나왔다. 참가자들이 활용해 본 재료를 공유하기도 했고 앞으로 무슨 재료를 쓰면 좋겠는지 조언도 이어졌다.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무언가 특별한 교안을 기대했지만, 대상이 아니라 시간, 공간, 재료를 중심 구성요소로 삼는 시각예술교육의 특별함은 충분히 흥미로웠다. 재료의 향연 덕분에 고된 청소 노동이 필요하겠다는 행사 스텝의 고충도 들렸지만, 만약 이 자리에 유아가 있었다면 어지럽히면 어지러울수록 새로운 조형물이 나오는 수업에 얼마나 신이 날까 상상해 봤다.
“종이 빨대나 재료들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유아들이 소근육이 자연스럽게 발달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설치할 수 있도록 공간을 사용하니까 해방감이 느껴져요.”
– 이민경 부산문화재단 문화교육팀
“실생활에 쉽게 접하는 재료들이 활용되니까 처음엔 당황했는데 물질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면서 활용할 수 있게 되니까 저절로 창의력이 생기는 것 같았어요.”
– 장수광 무용 예술강사
“유치원에서 활용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아서 큰 도움이 되었어요. 빛을 통해 색깔이 바뀌는 과정을 아이들이 얼마나 신기해할까요.”
– 박혜영 유치원 원장
사진 _ 박진우 사진작가 nowhere1999@gmail.com
- 고윤정
- 사방팔방 귀를 열어 놓는 호기심쟁이지만 특히 문화다양성과 도시,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에 관심이 많다. 오랫동안 추진한 문화다양성 사업들 덕분에 다름이 차이를 넘어 창의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재단 ‘비전 2030’ 수립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은 그 무엇보다 문화예술교육에 있는 것 같아 최근 아르떼 자료들을 꼼꼼히 읽고 있다.
happyhada@bsc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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