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사진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예술과 표현의 문제에 부딪혀 휴학을 하고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 근처에 하숙을 얻어 두어 달을 놀았던 적이 있다. 프랑스 오스만 남작이 파리시 개발에 못다 적용한 근대 도시의 아이디어를 새롭게 건설되는 땅에 그대로 실현한 계획도시 워싱턴 D.C, 그곳에서의 몇 달은 도시 곳곳을 샅샅이 훑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내내 허기진 듯 온갖 박물관, 미술관, 갤러리를 찾아다녔고, 도시의 문화적 역량에 놀라워하며 거의 모든 문화예술의 장을 찾아가 보았다. 그렇게 부러운 마음으로 돌아와 서울을 보니, 어이쿠! 서울엔 문화적 역량을 담은 장소와 공간이 훨씬 더 많고 더 다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린 600년의 역사를 가진 거대도시 아니던가. 경계를 넘어 갔다 와서야 내 것이 제대로 보인다는 사실을 몸으로 경험한 순간이었다. 짧은 미국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미국은 이렇구나~’가 아닌, ‘우리가 이랬구나~’였다. 그를 통해 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 다른 눈으로 새롭게 보게 되었다는 것, 나와 나의 문화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거나, 알게 될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여행의 의미라는 흔한 말을 진짜 알게 된 것이다.
순환의 과정을 담은 성장과 성찰
문화예술교육 매개 인력들의 해외 탐방을 지원하는 ‘글로벌 문화예술교육 탐방 프로젝트 A-round’(이하 ‘어라운드’)는 예술교육자들의 경계 밖으로의 떠남이자 세계를 향한 여행이다. Art Education(예술교육)과 round(순환)를 담고 있는 어라운드는 ‘문화예술교육 매개 인력들에게 해외 탐방의 기회와 자원을 지원하여 매개 인력의 역량을 강화하고, 경험을 공유‧확산함으로써 국내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제고에 기여하고자 하는 국제교류 프로그램’이다. 사업의 목적이 말해주듯, 어라운드는 단순한 탐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쌓아온 문제의식-탐방과 만남-문제의식에 대해 답하기와 새로운 아이디어-공유와 확산’의 ‘과정’을 담은 프로젝트이다.
나는 운 좋게 참가자들의 여행을 곁에서 지켜보고 공감해볼 기회가 있었고,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꼈던 것에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먼저 나는 이 프로젝트의 방향과 목적이 국가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나가고, 만나고, 배우고, 돌아와 공유하는 일련의 실천은 계몽의 의지를 담은 국가적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여행을 떠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라운드는 문화예술교육의 장에서 신나게 달리는 사람들이 성장과 배움을 꿈꾸며 자신이 살고 있는 시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이다. 낯선 곳으로 떠나 밖의 세상을 통해 ‘자신과 자신의 삶’을 더 잘 보고, 더 세밀하게 보기 위한 시간이다. 익숙한 세계를 떠나 보고 느끼게 된 것을 마음에 담고, 그 마음에서 씨앗이 자라는 것이다. 가끔은 그것이 누군가의 운명을 바꾸는 도전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피로도 쌓인 일상의 며칠이 될 수도 있다. 이 개인적 경험의 씨앗이 바로, 왜 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고 어라운드의 기본 전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가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계몽에 두거나, 그 기준으로 결과치를 바로 측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근대 유럽 귀족이 자녀들을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보내 진보한 문명을 배우게 했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어라운드의 중요한 목적이자 기준이 ‘애써 낯선 누군가와 만난다’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문화예술교육으로 삶이 생동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가진 힘을 알게 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앞서 혹은 오래 경험한 사람들로부터 놀라운 영감을 얻기도 하고, 때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확인하기도, 때론 지친 날에 대한 위로를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떠난 자만 일방적으로 받아 오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나만 얻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난 그도 역시 지식을 얻고, 영감을 얻고, 인연을 얻고, 지구적 삶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때 떠난 자는 그런 상호적인 교류의 물꼬를 트는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가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현장을 보여줄 수 있는 자료를 꼭 가지고 떠날 것을 조언한다. 멋있고 신나게 만나라고. 그리고 현지, 현장에 직접 자신의 몸으로 도달했기 때문에 찾을 수 있었던, 만날 수 있었던 우연이면서 필연인 발견과 만남을 즐기고 오라고. 그것이 이 여행의 의미임을 의심하지 말라고.
부딪히고 만나고 질문을 새기는 과정
작년, 2018년은 사업 4년 차를 맞아 7개 팀, 14명이 세계 곳곳으로 떠나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을 체험하고 돌아왔다. 4년차가 되는 동안 어라운드 사업은 지속적으로 보다 나은 방법과 방향을 고민해 왔다. 사업 첫해 예술강사만을 대상으로 하던 것을 작년에는 정책사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단체 기획자, 예술강사, 연구자 및 유관기관 관계자로 확장함으로써 문화예술교육을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을 포함시켰다. 또한 자유주제였던 것에서 최근 정책적 화두가 되고 있는 ‘기술 융복합, 유아 대상, 청장년층 대상, 교육 전용공간’을 지정 주제로 하여, 관련 주제에 대한 고민과 열정을 가진 참가자를 모집하였다. 탐방의 성과 역시 사업기획형과 콘텐츠개발형으로 나누어 단순 탐방이 아닌 한 발짝이라도 자기 현장의 실천으로 귀결될 수 있도록 하였다.
매해 조금씩 시험하고 고치고 시험하고 고친 결과, 작년 가장 의미있었던 것은 참여자들이 현장에서 쌓아온 관심과 문제의식을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참여자들은 정책적 화두를 담은 지정주제를 자신의 영역과 현장 경험에 근거하여 해석했고, 그랬기 때문에 사업 기획이나 콘텐츠 개발 등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조금씩 구체화시키는 과정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4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예술과 새로운 기술의 융복합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떠난 참가자들은 테크놀로지가 예술의 새로운 상상을 가능케 하고, 예술 습득과 접근의 어려움을 극복하여 누구나 쉽고 즐겁게 예술을 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 4차 산업혁명 시대 문화예술교육은 새로운 기술의 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신체와 삶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어야 함을 배웠다.
유아, 장애인, 아동 등 참여자에 대한 현장의 질문은 교육 참여자를 바라보는 전제의 전환이자 새로운 관계 모색의 시도로 그려졌다. 또한 참여자에 따른 특수성이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더 모이고 싶고 즐거울 수 있는 ‘예술가의 유쾌한 툇마루’가 되는 그림을 상상해 보고 있다.
공모 주제였던 교육 전용 공간은 공간 자립에 대한 간절함으로 구체화되었다. 사실 공간 자립은 엄청나게 많은 수로 불어난 문화예술교육단체 공동의 숙제이기도 하다. 공간 자립과 단체의 위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지고 출발한 참여자들은 공간에 대한 생각의 전환, 새로운 상상력에 고무되어 귀환하였다. 꼭 전형적인 교육공간이 아니어도, 예술가들에 의해, 예술가들로부터, 상상하고 시작하는 공간, 지역 토착적 공간 기획이 중요함을 배웠고, 그런 공간을 꿈꾸며 찾고 있다.
더불어,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마을의 큰 나무와 같은 단체들을 만나 지역 커뮤니티의 협력과 상생 노력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 역사와 이야기가 “빼곡히” 담긴 현장을 보며, 조직이 조직원들과 가치관/비전을 공유하며 동반 성장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것이 지속가능한 원동력임을 다시 새기며 돌아왔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문화예술교육은 국가 주도, 제도 중심으로 확장되어 왔고, 많은 인력이 유입, 배출되었다. 이제는 분명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이번 참가자들은 그 전환이 예술가에 의해, 지역에서, 빨리 말고 천천히 시간을 들이는 방향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담론과 실천을 오래오래 쌓아가며 고쳐가며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고 동의한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 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자주 모이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그런 생각이 언제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꽃을 피울 것이라 믿는다.
현장으로 이어질 모색과 실천
사실 어라운드 프로젝트 참여는 녹록치 않은 일이다. 지원 신청을 위한 기획부터(구체적이고 고민이 담긴), 떠나기 전의 엄청난 준비(많이 할수록 성공적), 조금이라도 더 보고 만나기 위한 정신없는 여행(부지런함과 뻔뻔함을 장착한), 귀환 후의 결과보고서 작성(정리할 게 너무 많은), 떨리는 성과공유회(드디어!)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참가자들만 아니라, 사업 담당자와 다양한 관계자들 역시 바쁘고 긴장된 날들을 보낸다. 사업기획단계에서부터 누구에게 가장 필요한지,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지원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내 기대와 걱정 속에서 살림을 꾸려 간다.
아직 어라운드 프로젝트에는 여러 과제가 있다. 알려진 곳이 아닌 새로운 탐방 현장의 발견, 새로운 관계의 모색, 인력양성이라는 관점에서의 지속가능성 구축 등을 여전히 묻고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새로운 역할, 비전, 방향을 확인하고,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속가능성에 관해 묻고 모색하는 과정, 서로에게 그 질문과 모색을 전이하는 과정, 그 창의적 협력의 과정 자체가 이 프로젝트의 성과라고 강조하고 싶다.
지난 어라운드에서 만났던 참가자들을 현장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콘텐츠를 발전시켜 강의도 하고, 문화예술교육 ODA(공적개발원조) 사업 강사로도 가고, 연구논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각종 지원사업에 좋은 프로그램과 철학을 가지고 지원하기도 하고, 사회적 경제의 틀 안에서 창업을 하기도 했다. 차이는 있어도, 어라운드에서의 경험과 고민을 잘 녹여 자신의 현장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기에 자주 마주치게 되는 것일 게다.
지나고 보니, 어라운드의 의미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하나, 문화예술교육에 영감이 될 “씨앗되기”였던 것 같다. 그래, 사람이 하는 일에 사람을 키우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 현혜연
- 문화예술교육 기획자. 사람에 관심이 많아 사회복지, 사진예술, 사진이론, 인류학을 공부하였다. 1997년 어린이 사진캠프로 문화예술교육 현장의 모험을 시작하였고, 지금은 중부대학교 사진영상학과에서 가르치면서, 지역 사람들과 함께 하는 꿈다락토요문화학교, 치유 프로그램 지원사업, 문화예술교육 관련 연구를 진행하며, 다양한 실천과 공부를 하고 있다. 2017년과 2018년 어라운드 사업 멘토로 참여했다.
hyhy1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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