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풍경이 떠오른다. 주말이나 휴일, 아니라면 평일의 어느 저녁 시간, 저녁상을 물린 가족이 탁자에 마주 앉아, 또는 거실의 소파나 구석의 책상에 앉아 글을 쓴다. 노트나 메모지에 연필로 꾹꾹, 조심조심 써 내려간다. 아니면, 노트북컴퓨터를 열고 타닥타닥, 틱틱, 타이핑을 해나간다. 가족은 두 명에서 여러 명까지 다양하고, 일상을 기록하거나 일상을 바탕으로 시를,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글을 쓰는 동안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다.
가족, 일상, 문학으로 어떤 꿈을 꿀 수 있을까?
‘일상의 작가’를 준비하면서 기획에 참가했던 강사들과 기획자들은 위와 같은 상상을 했을지 모른다. 저녁이 사라진 시대, 어쩌면 불가능에 가까운, 상상으로만 가능한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일상의 작가’ 기획자들은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가족을 참여자로 설정하고, 참여자들이 각자의 일상에서 문학적 글쓰기(문예)를 함으로써 가족 사이의 소통을 이룬다는 원대한(?) 기획이 조금씩 현실화된 것은 2017년 겨울 문턱이었다.
시범사업으로 진행된 2017년 ‘일상의 작가’는 키워드를 ‘가족’ ‘일상’ ‘문학’ 등으로 정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할 강사들과 함께 구체적인 내용을 잡아갔다. 강사진은 문학에 관심이 깊고 창작을 병행하고 있는 작가들로 구성했다. 말하자면, 글쓰기 강사가 아닌, ‘작가의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분들을 찾고 모집했던 것이다. 기존의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문학 강사 4인과 프로그램 진행 능력이 검증된 시인・작가 4인 등 모두 8명의 강사가 참여했다. 이들은 프로그램 콘셉트에 맞춰 내용을 구성하고 진행하는 강사의 역할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의 방향을 구체화하는 기획자의 역할도 해야 했다. 또한, 작가의 작가로서 참여자들의 글쓰기를 실제적으로 이끌어야 했다.
왜 문학 강사가 아니라 ‘작가의 작가’인가?
‘작가’들이 모여 기획회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작가’에서 가장 신경을 쓴 키워드는 ‘문학’이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등,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는 그동안 가족 참여자와 함께하는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해왔지만, 문학을 바탕으로 ‘작가 되(어보)기’를 내세운 프로그램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상의 작가’ 강사들의 사전 모임 겸 기획회의에서는 ‘문학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문학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써 무언가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강사들은 가족 참여자들이 그 ‘무언가’를 찾아가는 데 길라잡이 역할을 하기로 했고, 2017년 시범사업으로 진행된 첫해 ‘일상의 작가’에서 그 역할에 충실했다.
시범사업을 마무리하고 강사들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프로그램으로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점검했다. 아쉬운 점은 시간 부족으로 인해 참여자 모집이 어려웠다는 것, 참여자의 연령차에서 오는 눈높이를 맞추기 힘들었다는 것 등이었다. 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가족 문학 프로그램’의 방향에 일치했다는 자체 평가를 내놨다. 2018년 ‘일상의 작가’에서는 시범사업을 발판으로 형식과 내용에서 확대된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결국 이 물음의 답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탄생은 선택이 불가능하지만 존재는 스스로 인식하고 성찰함으로써 찾고, 만들어갈 수 있다. 문학은 이 물음에 답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형식이자 내용일 것이다. 가족 참여자와 함께하는 ‘일상의 작가’에서는 이 물음을 프로그램에 걸맞게 바꾸었다. ‘나는 왜 이분(들)의 자식인가?’ ‘나는 왜 너의 부모인가?’ ‘왜 우리는 가족인가?’ 나를 중심으로 가족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비단 ‘핏줄’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결국, 가족에서 나를 빼면 그것은 일상이 없는 (연구 대상의) 가족일 뿐이다. 어떤 형태의 가족이든 나에게는 (소중하든 지긋지긋하든) 가족이다. 나와의 관계에 따라 갈등도 생기고 화해도 하게 된다. 소위 정상가족, 평균가족, 4인가족, 한부모가족, 조손가족, 다문화가족 등 가족의 형태가 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프로그램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 형식적인 면에서 가족 구성원을 어른과 아이로 구분하더라도, 내용적인 면에서는 나와 가족으로 구분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연령차에서 오는 어려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2018년 사업에서는 강사들이 이 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상의 작가’에서 가족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문학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모든 것이 움직일 때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꼿꼿하게 버티는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일상의 작가’에서 참여자들이 3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면 그것만큼 성공적인 프로그램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여자들이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할 때 강사들에게는 그것만큼 반가운 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이, 자본주의사회의 무한 경쟁과 광폭의 속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3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견디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쓸데없는 것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쓸데없다’는 말이 수식하는 것 중 가장 어울리는 것은 바로 문학이다. 그런 것 해본 적 없다, 글은 써본 적(문맹이 아니라면 글을 안 써봤겠는가, 글은 곧 문예적 글쓰기라는 것을,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도 없다는 말은 곧 쓸데없는 짓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그것은 너무도 힘드니 쓸데없는 짓이라도 해보는 것, 그럴 때 ‘일상의 작가’는 의미를 갖는다.
‘일상의 작가’ 강사들도 참여자와 함께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갖고, 교사나 사가 아닌, ‘작가의 작가’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의식하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강사들은 참여자와 같은 물음을 갖고, 참여자와 함께 ‘서로 배움’을 이루어가면서, 참여자는 참여자의 글쓰기에서 오는 문학적 고민을 갖게 되었고, 강사 역시 작가로서 자신의 글쓰기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문학 창작이라는 거창한(?) 방식을 일상 속에서, 가족 속에서 함께하면서 가족 참여자들의 작가 되기는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너, 왜 안 노니?” 재미도 강요되는 시대에서 ‘일상의 작가 되기’
‘일상의 작가’가 재미라는 측면에서 참여자들에게 다가가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였는지 모른다. 수많은 프로그램이 재미를 바탕으로 진행되지만 결국, 그 시간의 휴식이 일상으로 돌아가면 잊히기 십상이다. 비유하자면, 문학적 멈춤이 흐름을 거슬러 견디는 것이라면, 휴식은 흐름 위에 얹혀 쉬는 것이다.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이 ‘일상의 작가’에 참여하는 것은 그만큼 ‘멈춤’이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진단하게 된다.
문학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다. 그것도 완성이 없는 행위, 완성이 불가능함을 알면서 완성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행위다. 문학인가 아닌가를 회의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아가는 방향이 맞는지 회의한다. 항해사가 나침반을 시시때때로 점검하듯이 문학은 회의하고 또 회의한다.
일상이라는 거대한, 하지만 소소한 시공간에서 가족들은 서로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이면서 ‘아낌없이 주는 흉기’가 되기도 한다. ‘일상의 작가’의 글쓰기는 이처럼 이중적인, 하지만 끊을 수 없는 가족 관계의 소통을 진솔하게 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가족의 마음이다. 자신의 내밀한 마음을 표현함으로써, 비록 개인적이고 사소하고 때로는 이기적인 이야기를 함으로써 소통은 일상이 된다.
‘일상의 작가’는 참여자와 강사 모두에게 질문을 일상화하는 프로그램이다. 질문이 가득한 사람은 작가다. 세상과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 바로 문학, 나아가 인문의 핵심이다. 그 질문을 글로 써서 휘발시키지 않는 훈련을 하는 과정이 바로 글쓰기이고, 이런 능력을 기르고 훈련한 사람이 바로 작가다. 질문은 단순히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묻는 것, 그 행위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의문, 회의, 자각, 의심이 있다. 그리고 궁극에는 설의법(設疑法)으로 표현되는 확신이 따른다. ‘일상의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 되기’를 모색하고 돕는 가족 프로그램이다.
최규승
최규승
시인. 2000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무중력 스웨터』(천년의시작, 2006), 『처럼처럼』(문학과지성사, 2012), 『끝』(문예중앙, 2017), 육필시집 『시간 도둑』(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등이 있다. 2017, 2018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일상의 작가’ 프로그램의 안내자로 참여했다.
pitumay@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