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 아이들이 수능 성적표를 받았어요.” 배방고등학교 이원희 교사는 ‘상상만개’ 운영진을 맞이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필이면 오늘이 수능 성적표 발표일이라니.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날, 다른 그 어떤 날보다도 이불 속에 들어가 있고만 싶은 오늘, 지금의 나를 꺼내 쓰라고 이야기해야 한다니. 강의를 맡은 정소정 극작가는 “오늘 같은 날 어떻게 글을 쓰나요. 전업 작가도 이런 날은 아무것도 못 해요.”라며 아이들의 마음부터 걱정했다.
학교는 고요했다. 수능을 마치고 출석 일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몸을 끌고 나온 고3 학생들의 무료함, 아니 무기력감이 복도에 교실에 사물함에 책상 서랍 속에서 여기저기 흘러나왔다. 쉬는 시간조차 탈진 상태 같은 고요함이 맴돌았다. 칠판에 쓰여 있는 ‘스물 D-27’이라는 단어만이 유일하게 생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열아홉, 스물까지 카운트다운
이원희 교사는 “고3 수능 후에 아이들이 학교에 나와서 의욕적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이 없어요. 자습이나 영화 관람이죠. 아이들을 학교에 오게 하고 뭔가 하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렵죠. 학교별로 수능 후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이번 프로그램을 신청하게된 계기를 말했다.
의욕적으로 신청한 학생들도 있었지만 자의 반 타의 반 참여한 학생들까지 각 반에서 26명의 학생이 모였다. 그 자신도 종잡을 수 없는 청소년의 때, 몇 년간 수능을 향해 달려온 고3 수험생만이 마주할 수 있는 허탈감들을 무엇으로 해갈할 수 있을까. 정소정 작가는 정성스럽게 준비한 PPT로 자기소개를 열며 조용하고 담담한 어조로 나인틴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PPT는 누군가의 전유물로만 느껴지는 ‘글’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대중음악, 뮤직비디오, 웹드라마, 뮤지컬 넘버 등 이 세대가 좋아할 만한 콘텐츠들을 예시로 삼아 보여주었고, 금세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글이라는 건 워낙 보편적이니까, 문학이나 희곡 같은 걸 느닷없이 보게 되면 학교 수업의 연장이잖아요. 그걸 듣는다고 해서 글쓰기에 적용되지 않죠. 그냥 시험을 위한 공부의 일환일 뿐이지. 웹드라마 작가든 래퍼든 모두 동시대에 작가들이잖아요. 가장 실용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을, 본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콘텐츠로, 그런 글 중에서 이건 정말 매력적인, 이 시대의 목소리다, 라고 생각되는 걸 찾아서 함께 읽어보고 싶었어요.”
– 정소정 (극작가)
아무리 좋은 명강의도 청중을 고려하지 않다면 무슨 의미겠는가. 글쓰기에 도움을 주기 위한 참고 영상들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학생들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정소정 작가의 깊은 고민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글은 눈에 보이는 거니까 말로 하기 어려운 것을 확실하게 전할 수 있고, 말은 한번 들으니까 많이 까먹을 수 있지만 글을 보는 건 여러 가지로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어서, 말보다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거 같아요.”
– 김채연(배방고 2학년)
인생을 살며 계속해서 요구되는 것이 글쓰기다. 학생들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제일 잘 아는 것이 어쩌면 ‘나’ 이겠으나 내가 나를 쓰려다 보면 대체 가능한 단어를 잃어버린다. 정소정 작가는 5분 동안 좋아하는 것부터 써보자고 했다. 생각보다 쉽고 가벼운 접근에 아이들은 슥슥 손쉽게 써내려갔고 정소정 작가는 “생각 없이 아무거나 써보기를 하다 보면 편안한 일이 될 수 있다.”며 학생들을 독려했다.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아졌나요.”
“네!”
기분 좋은 목소리가 모두를 기분 좋게 했다. 좋아하는 것을 떠올리며 글을 썼더니 긴장감이 돌던 교실이 온화해진 것과도 같다. 그렇다. 글을 쓴다는 것은 감정을 함께 쓰는 일이다. 또 그 글을 읽는 사람의 감정 또한 쓰도록 한다. 글은 감정을 전이시킨다. 여기에 정소정 작가의 눈높이 글쓰기 비법 스킬이 들어간다.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글쓰기의 가장 큰 적이에요. 그냥 쓰면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잘 쓰게 됩니다. 시간에 대한 믿음이요.”
정소정 극작가
마음껏 표현하는 용기 있는 글쓰기
카타르시스, 허위와 과장, 디테일, 차이,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마미손과 보르헤스를 지나, 래퍼 이센스(E SENS)의 가사에서 우주론자 마틴 리스의 이론과 공존하기도 하고, 제목부터 이미 <에이틴>인 웹드라마에 나오는 그들만의 언어가 은유와 상징으로 빛을 냈다. 개념이 실전이 될 수 있는 눈높이 스킬은 학생들에게서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것   #내가 원하는 내 모습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나
정소정 작가가 제시하는 키워드에 막 배운 스킬을 적용하며 학생들의 글쓰기가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써나가는 글을 쓴다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 어쩌면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우리들은 목적 없는 글을 써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목적 없는 글을 써도 된다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비록, #아무도 올랐으면 하는 나, 를 쓸 때는 푹푹 한숨이 터져 나오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목적 없이 대상 없이 오로지 자신 안에서 나오는 단어들을 툭툭 꺼내 써 내려가던 조용한 시간, 그 살아있는 침묵이 참 아름다웠다.
“아직 대학교 발표 나기 전이라서 마음이 불안정한데 저를 돌아봄으로써 10대의 마지막 달의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 있었어요.”
– 한지완(배방고 3학년)
“마지막으로 자기소개서를 써볼까요.” 잘 따라오던 아이들이 #자기소개서 라는 말 앞에서 글쓰기를 어려워하기 시작한다. “분량이나 질은 상관없어요. 나 자신이 원하는 형식으로 쓰세요.” 의식의 흐름을 따라 마지막 자기소개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자기소개서가 아닌가.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 나를 드러낸다는 것, 좀 쑥스럽고, 솔직해지기 어렵고, 막상 쓰자니 아무것도 한 게 없고, 왠지 내가 초라하게만 느껴지고, 나도 나를 모르겠고, 빈 종이만 바라보게 된다. 정소정 작가에게 아이들이 가장 싫어할 것 같은 자기소개서를 왜 선택했는지 물었다.
“저는 이 친구들과 정말 짧은 시간 만나는데, 희곡을 써보자던가 짜인 형식을 구성해서 제안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음악도 그렇고, 희곡도 그렇고, 문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 다 자기소개잖아요. 자기소개라는 건 순수한 문학의 근본이지만, 가장 더럽혀진 문학인 거죠. 얼마나 거짓말을 많이 해요.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의미도 있고 어른이 되면 자기소개를 써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을 텐데, 이쯤에서 진짜 자기소개서를 쓴다는 게 용기가 되고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정소정 작가
목적이 없는 진짜 자기소개서. 아이들은 지금의 나를, 어떤 나로 기억하게 될까.
“자기소개서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양식이 있고, 그 틀에 맞춰서 썼어야 했는데, 오늘 같은 경우는 제가 마음껏 쓸 수 있는 저만의 생각이니까, 저를 더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였던 것 같아요. 진로랑 연관이 있어서 뭘 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설렘을 갖고 신청했는데, 나 자신을 더 알 수 있는 시간이 된 것 같아요.”
– 김홍찬(배방고 3학년)
무명으로 되어 있는 자기소개서를 노란색 이야기 상자에 모두 넣었다. 아이들은 랜덤으로 상자에서 무명의 글을 뽑아, 조명과 마이크 앞에 서서 낭독했다. 개성이 넘치는 글들이 이어졌고, 폭소와 탄성이 함께 터져 나왔다.
“제가 학교에 와서 아이들의 글을 들여다보면, 제게 가르침을 주는 글들이 많아요. 어른들은 되게 쉽게 요즘 애들이 어떻다고 재단하는데, 제가 만난 아이들은 정말 생각이 깊고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부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나 아이 같이 순수해요. 그 어른이자 아이인 양면의 모습들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오히려 아이들의 글이 제가 잃어버린 어떤 감각을 깨워줘요.”
– 정소정 작가
나는 위대하다.
나야말로 위대함이라는 단어에 걸맞은 사람이다.
나는 정점이며 빛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의 규칙과 나의 뜻에 의해 살아간다.
모든 것은 나로써 해석되고 나로써 끝난다.
세상은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세상을 사랑하기에 나는 위대할 수 있다.

― 배방고 3학년, 무명, <자기소개서> ―

목적이 없는 자기소개서는 모두 시였고, 음악이었고, 소설이었고, 희곡이었다.
2018 고3 수험생 대상 문화예술교육 사업 ‘상상만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마친 고3 학생 및 수험생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진학·사회 진출 등 진로 고민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고, 새로운 일상을 스스로 준비할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2018년에는 <찬란한 교복, 유치찬란 패션쇼>(남현우), <첫눈이 오면 마임>(이정훈), <뷰직 오케스트라>(박훈규), <이 시간이 가면>(노니), <운동장 싸이퍼>(라마), <교실 밖을 나온 만화>(김보통), <절대 따라하지 마시오>(김남석), <메이킹 스쿨마블런>(박혜민), <나인틴, 우리들의 마지막 이야기>(정소정), <파블로프의 종소리>(시로스카이) 등 10개 프로그램으로 전국 각지에 45개 고등학교를 찾아간다.
홍은지
백송시원 엄마, 연극하는 송김경화
낭만유랑단 소속으로 작가, 연출, 배우를 하면서 가끔 홍보물디자인도 하는데, 어느 한 역할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려 한다. 혜화동1번지 6기동인으로 활동했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신의 입자> <체체파리> <제 12장 불완전성 정리> <프라메이드> <섹스인더시티> <백한덕브이> 등이 있다.
layair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