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내 인생에 있어서 ‘전환’의 해로 기억될 전망이다. 올해 초 사회학자 김찬호, 여성학자 조주은 선생과 함께 베이비부머 3명을 심층 인터뷰한 구술집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를 출간했다. 최영식·정광필·김춘화 세 분 중 내가 인터뷰한 사람은 ‘문래동 홍반장’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최영식 선생이었다. 1954년 전북 순창 출신으로 은행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최영식 선생은 은퇴 후 문래동 젊은 예술가들과 철공소 아저씨들을 연결하는 커넥터(connector)이자 지역 살림꾼으로서 더 역동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며 꼰대가 아니라 열혈 ‘꽃대’의 삶을 살고 있다. 신중년/신노년으로의 전환을 하며 자신의 삶을 멋지게 잘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올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이른바 50+ 신중년을 대상으로 한 시범사업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17개 전국 광역센터를 대상으로 사업 수요조사를 한 후 추진단을 구성해 일종의 협력 기획의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인천·대전·세종·전남·경남 5개 지역센터가 참여했고, 교육진흥원 자체사업으로 <문학과 함께 한 달 살아보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의 추진단장을 맡아 참여 지역센터와 함께 고민을 공유하고 있는데, ‘전환’이라는 키워드는 부사어로 표현하면 ‘하마터면’과 같은 용례와 의미가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다시 말해 신중년 세대의 경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같은 성찰적 태도와 더불어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한 줌의 작은 용기가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삶의 궤도(volution)와는 좀 다른 궤도를 상상하고 ‘다시 돌리려는’(re-volution) 전환의 태도와 실천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 삶’을 위한 앙코르 커리어는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소하고 위대했다”
장석주 시인의 『베이비부머를 위한 변명』은 베이비부머 당사자의 정직한 기록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다. 베이비부머 당사자인 사회학자 송호근이 쓴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가 출간된 적 있지만, 장석주 시인의 기록은 더 내밀하고 더 개인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195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며 경기상고를 중퇴한 후 시인·문학평론가로 데뷔하고 출판사를 운영하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등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행간에 펼쳐진다. 가장 기억나는 문장은 “나는 현무암처럼 단단한 가난과 불행을 묵묵히 견뎌내며 불혹을 넘어서고 이순의 문턱을 넘어섰다”는 표현이다. 여기 등장하는 ‘현무암처럼 단단한 가난과 불행’이란 베이비부머 세대가 공유하는 집단기억이고, ‘아버지(세대)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는 세대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베이비부머가 살았던 시대는 ‘국민교육헌장’이 상징하듯 학교와 사회 곳곳에 폭력이 지배했고, ‘박정희’라는 이름을 빼놓고는 그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 장석주 시인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국민교육헌장이란 ‘반공 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하는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에 불과하며, 1980년 광주 이후 등장한 신군부 시절이란 “내 1980년 기억의 바탕을 이루는 감정은 무기력과 나르시시즘이다”고 고백한다. 다시 말해 “내 1980년대 기억의 빈곤함은 내가 심장이 뛰는 삶을 살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자책하고 있다.
이렇듯 장석주 시인의 책은 자기 삶을 서사화하며 ‘읽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인생길을 담담히 살아가겠다는 구상을 털어놓는다. 책 뒤에는 5명의 고교 동창을 인터뷰한 내용을 약전(略傳) 형식으로 덧붙였다. 이 책을 보며 신중년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이란 각자의 개별성을 탐색하며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어야 한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쉽게 말해 동학의 2대 교주였던 해월 최시형 선생이 구한말 1897년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앵산동(수산1리)에서 ‘향아설위(向我設位, 나를 향하여 신위를 베푼다)’ 제례법을 반포한 것처럼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에서는 신중년의 관심을 세상을 향해 돌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향해 돌리도록 설계하고 운영해야 하는 것이다. 50+ 신중년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교육이란 저마다 고유의 색과 리듬을 지닌 개별자들과 눈빛을 마주하며 얼굴을 익히는 행위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소하고 위대했다”는 장석주 시인의 문장이 오래도록 여운을 준다.
자립하는 농적 순환의 삶
이 점은 노인 혹은 노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도 여일하다. 1922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서 열여덟 살에 시집 와 지금의 양양 송천마을에서 평생 ‘호미’를 놓지 않는(‘못하는’이 아니라) 삶을 사는 이옥남 할머니의 농사일기집 『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은 한 사람의 생애사는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감동적인 기록이다. 부모 복 없고, 재산 복 없고, 오로지 ‘일복’을 타고난 이옥남 할머니는 영감 사별 후 스스로 배운 글자 연습을 하기 위해 ‘도라지 까서 번 돈’으로 공책을 사서 1987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옥남 할머니의 이토록 ‘사소하고 위대한’ 기록을 보며 자립의 삶에서 형성되는 건강한 습관(habit)은 한 장소에서 오래도록 거주(habitat)할 때 형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리고 전환의 삶을 위해 나이듦에 대한 태도와 감수성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발라야 젊어 보이는지 고민하는 항노(抗老) 혹은 안티에이징(anti-aging)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노년의 삶에서는 늙어가는 것을 수용하고 긍정하려는 ‘향노(向老)’의 태도와 감수성이야말로 더 중요하다.
혼자 사는 이옥남 할머니의 일상은 심플하다. 저녁에는 텔레비전과 시간 보내고, 낮에는 호미 들고 밭에 가는 게 취미 생활이다. 곡식이 귀여워서 키우는 걸 재미로 알고 농사짓는다. 속표지에 실린 삐뚤빼뚤한 할머니의 글씨가 못내 가엽다. 복숭아꽃 피면 호박씨 심고, 꿩이 새끼 칠 때 콩 심고, 뻐꾸기 울기 전에 깨 씨 뿌리고, 깨꽃 떨어질 때 버섯 따며 자연 속에서 일하며 사는 할머니의 일상은 너무나 평범하다. 그러다 문득 “나무는 단풍이 들어도 예쁘고 보기나 좋지만, 사람은 쭈글쭈글한 것이 얼마나 보기 싫을 것을 생각하니 정말 한심하구나” 하며 한탄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할머니의 욕망은 멈추지 않는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사람의 도리’를 먼저 생각하고, 솟적새(소쩍새)·매미·도토리·노루·방게 같은 미물들에게도 가없는 애정을 쏟는다. 무엇보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보와 월간 [작은책]을 구독하며 책에 수록된 이오덕 선생을 비롯해 이상석·조향미·추송래 같은 필자들의 글에 깊이 공명하고, 동화작가 권정생의 『몽실언니』와 『한티재 하늘』을 탐독하며 노동하고 묵상하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 권정생 선생의 『한티재 하늘』에 등장하는 ‘이순이’의 곡절 많은 삶을 보며 “잠든 차옥이를 (이옥이가) 안고 젖을 먹이는데 눈물이 괜히 난다”(1999.7.5.)고 적은 대목이 쉽게 잊히지 않는다. 이옥남 할머니는 “내 몸이 아프니 뻐꾹새 소리가 더 처량하게 들린다”고 한 표현처럼 겨우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가없는 애정을 보내고, 인간의 인간됨이란 무엇인지 잊지 않으며, 사람의 도리를 잊지 않고자 한다. 곳초(고추), 두럭(두둑), 이약가(손수레), 배차(배추), 거두미(추수) 같은 강원도 사투리의 맛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많이 배운 먹물들의 문어체가 아니라 구체적 생활세계인 농적(農的) 순환의 삶에서 경험하는 살아 있는 입말[口語]이 주는 건강한 아름다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은 텔레비 위에 덮는 뜨게를 다 떠서 수동집 갖다 주고
저녁에 딸한테 욕만 실큿 먹고 이런 인간은 왜 안 죽고
살아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지 맘에는 날 생각해서 고생한다고 편하게 있으라고 하는데
우두카니 있으니 열 빠진 거 같은 기 심심해서 손으로
뭘 만져야 정신이 드니 뜨게라도 뜨는 건데 하도 쏘아붙이니
서운하기만 하다.
저녁에 딸한테 욕만 실큿 먹고 이런 인간은 왜 안 죽고
살아 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지 맘에는 날 생각해서 고생한다고 편하게 있으라고 하는데
우두카니 있으니 열 빠진 거 같은 기 심심해서 손으로
뭘 만져야 정신이 드니 뜨게라도 뜨는 건데 하도 쏘아붙이니
서운하기만 하다.
‘온몸이 귀가 되는’ 수업을 위하여
비교적 최근에 쓴 위 일기는 딸을 ‘디스’하며, 자신이 바라는 노년의 삶이 무엇인지 적은 대목이다. “손으로 뭘 만져야 정신이 드니”라는 할머니의 토로는 노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교육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핵심가치가 아닌가 생각한다. 어르신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예술교육은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교육’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한 문화예술교육’의 형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간과하면 어르신 대상의 문화예술교육은 기능 위주의 교육에 그냥 매몰되고 만다. ‘초짜’ 예술강사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가 ‘기능 따로, 스토리텔링 따로’ 시간을 구분해 진행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참여 어르신들이 기능 수업할 때만 참석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스토리텔링이란 것도 한 사람 한 사람 어르신들과 눈빛을 나누며 얼굴을 알아가며 저마다의 ‘사연’을 알아가는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수업 중 어르신들이 토로하는 한마디 말도 그냥 흘려듣지 않고 ‘온몸이 귀가 되는’ 경지가 필요하다. 할머니의 외손주가 양양 상평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놀며 가르치고 있는 탁동철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달려라 탁샘』(2012)에서 ‘가르치는 손’을 감추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 바 있는 탁동철 선생님이 책 뒤에 쓴 “짐승이나 작은 벌레도 함부로 하지 않는 마음, 곡식을 가꾸고 거두는 모습, 이웃에 대한 정성. 내가 찾고 싶고, 우리 아이들한테 찾아주고 싶은 삶이다”라는 문장은 이옥남 할머니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고, 손주 세대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장석주 시인, 이옥남 할머니의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 있다. 사람의 생애에서는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서사(narrative)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나는 어떤 인간이고,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이며, 어떤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면 큰 혼란을 겪게 된다. 두 권의 책은 신중년 및 어르신의 내밀한 결들을 섬세히 이해하고, 잘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좋은 참조가 될 만한 책이다. 나 또한 올해 초 갑자기 건강을 잃은 후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자주 갖게 되었다. 그런 고독한 시간은 어쩌면 내 삶의 ‘전환’을 위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보내며 앞으로의 내 삶은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것보다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더 많이 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내 삶의 ‘전환’을 위한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두 권의 책이 작지만 단단한 디딤돌이 되었음을 여기 고백한다.
이미지제공 _ yeondoo, 양철북
- 고영직
- 문학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문학웹진 [비유] 편집위원, 문화예술교육 웹진 [잇다]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자치와 상상력』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공저) 등을 펴냈다.
gocritic@naver.com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2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안녕하세요
김대정이라고 합니다(010.5759.8272)
지인이 올려준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전 연세대.이화여대등에서 생애경력설계과정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혹 시간될때 차한잔 할수있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김대정드림
네. 따로 연락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