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밸 시대를 함께할 당신의 도서관

서초구립반포도서관 문화예술 프로그램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길은 총총히 불을 밝힌다.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금세 빼곡하고 길게 늘어지는 퇴근행렬. 버스와 지하철에도 사람들이 넘쳐난다. 퇴근 후, 이미 늦어버린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고단한 몸에서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얼마 남지 않은 하루의 끝자락. 무엇을 해볼 수도 있겠지만 또 무엇을 하기에는 충분치 않은 시간이다.
지난 7월 1일,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적용하기 시작해서 그 이하 규모의 사업장으로 점차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시행 초기, 생산성과 노동환경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고 있는 형국이지만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요구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얼마나 쉴 것인가, 대신, 어떻게 쉴 것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시대, 일과 삶이 조화로운 일상을 위해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시도하고 있는 서초구립반포도서관에 다녀왔다.

도서관이기에, 도서관이라서
서초구립반포도서관(이하 반포도서관)은 분기별로 대표 프로그램 ‘문화큐레이션’을 진행한다. 문화큐레이션은 해당 분기의 주제에 따라 선임된 큐레이터가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해 한 달간 4회의 강의를 제공한다. 매주 금요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까지 이어지는 강의의 주제는 넓고 깊다. <그림 읽기의 즐거움, 현대미술의 속살> <북큐레이션: 파라텍스트를 읽다> <시대와 삶의 기록: 영상아카이빙> <K-POP과 뉴미디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가능성> 2017년부터 이어진 프로그램 제목만 살펴봐도 다양한 분야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도서관 1층 내벽에는 ‘2018 인문독서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알리는 큼지막한 배너도 걸려있었다. 이는 5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15차에 이르는 장기 프로그램으로, 매주 수요일 저녁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주제가 놀랍다. 무려 러셀과 푸코와 들뢰즈라니. 세부내용도 대학교 철학전공 강의라 해도 무방할 만큼 짜임새 있고 진지하다. 그러나 평일 저녁, 달콤한 휴식과 숱한 유흥을 뿌리치고 도서관에 와서 이런 강의를 들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조금 더 쉽고 트렌디 하고 자극적인 프로그램으로 이용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문득 염려스러웠다. 반포도서관 최재훈 문화홍보파트장은 <러셀, 푸코, 들뢰즈> 강의의 신청자가 200명이 넘는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며 프로그램 기획 방향에 대해 운을 뗐다.
“퇴근 후 집에 안 가고, 불금에 약속도 안 잡고, 도서관에 와서 이런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목적의식이 있지 않으면 힘든 일이죠. 그래서 소수일지라도 마니아층이 존재하는 분야, 그 분야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 참여할 만한 강의를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수강생을 많이 모집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교육기관으로서 꼭 해야 하고 교육기관이기에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을 우선으로 고려하는 것 같아요. 이 도서관에 오면 항상 좋은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가 생기면, 당장은 못 들어도 다음에 시간이 나면 꼭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 최재훈(반포도서관 문화홍보파트장)
정보와 콘텐츠가 난무하는 시대, 도서관은 어떠한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을까. 또 어디까지 그 영역을 확장할 수 있을까. 반포도서관은 도서관이라서 할 수 있고, 도서관이기에 꼭 해야 하는 프로그램들을 통해 조금씩 해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문화큐레이션의 방식으로 도서관 내부 기획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 역시 인상적이다.

정보와 콘텐츠를 큐레이션하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 대표 프로그램인 문화큐레이션 <시대와 삶의 기록: 영상아카이브>의 세 번째 강의 ‘다큐멘터리와 아카이브’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김혜준 문화기획자가 강의와 강사에 대해 짧게 소개한 후, 본인도 수강생들과 같이 자리에 앉는다. 그 옆에는 최재훈 파트장도 함께이다. 강의를 맡은 다큐멘터리 연출자 안해룡 감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추적하고 포착한 자신의 작업을 차례로 소개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작업은 문서 저장고에 잠들어있던 기록을 발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2007)는 송신도 할머니와 그녀를 지지하는 시민단체의 활동 자료와 증언집회 영상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고, 영화 <다이빙벨>(2014)은 세월호 참사 당시, 이상호 기자가 현장에서 직접 촬영한 방대한 영상 기록이 단초가 되었다. 현재는 일본인 포토 저널리스트인 이토 다카시의 개인 취재물 창고에서 발굴한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인터뷰 자료를 토대로 영화 <분노>를 제작 중이다.
기록을 발굴하는 과정, 기록을 재편하고 플롯을 재구성하기 위한 고민, 그렇게 탄생한 작품 영상과 일련의 경험담에 수강생들은 빠르게 몰입했다. 1991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김학순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5개월 전에 남긴 마지막 증언 영상을 틀자, 강의실의 공기가 일순 무거워졌다. 짧은 탄식이 수강생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불특정 다수를 위한 강의에서는 제 경험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편이에요. 구체적인 취재내용과 그 과정에서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소개하면 이론 강의보다 더 재밌잖아요. 그렇다고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 오히려 일반론을 소개하거나, 전문 집단을 대상으로 강의할 때보다 그렇지 않을 때 재미있는 질문도 많이 나와요. 가령 왜 역사 공부를 했다면서 이런 걸 하고 있냐, 따로 사진 배웠냐, 정보 수집은 어디서 어떻게 하냐, 같은……. ‘경험의 공유’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죠.”
– 안해룡(영화감독)
금요일 저녁, 피곤할 법도 한데 열댓 명의 수강생들은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게 강의를 경청했다. 강의 내용을 메모하거나 노트북으로 정리하는 모습도 보였다. 몇몇은 강의가 끝난 후에도 바로 가지 않고, 안해룡 감독과 동그랗게 모여 서서 후담을 나눴다. 이어지는 질문에 안해룡 감독은 후배에게 숨겨둔 노하우를 가르쳐주듯 세밀하고 진솔하게 답했다. 강사와 수강생 모두의 열성적인 모습에 조금 놀랐다.
“집 근처에도 도서관이 있는데 프로그램을 신청해본 적은 없었어요. 예술 프로그램이나 어린이 프로그램에 치중해 있어서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요. 여기는 성인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저는 기록학을 전공하는데, 전공과 관련해서 관심이 생겨서 신청했어요.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강의는 아니지만, 시야를 넓힐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 이은지(수강생)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의 균형
반포도서관에서 평일 저녁과 주말에 진행되는 성인 대상 프로그램에는 광범위한 이용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성별과 연령대는 물론이고, 거주지와 직업의 범주도 폭넓다. <러셀, 푸코, 들뢰즈> 강의의 경우, 20대 학생부터 60~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한데 모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우리가 참관했던 <시대와 삶의 기록: 영상 아카이브>의 경우에도 가까운 동네 주민은 물론이고 멀리 일산에서부터 일부러 찾아와 강의를 듣는 이도 있었다.
“아주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요구가 있어요. 고민이 많은 것이 사실이죠. 예를 들어, 강사가 강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나 재미를 위해서 자기 분야 외의 이슈를 들어서 얘기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수강생 중에 그 분야 전문가가 있을 수도 있는 거죠. 에세이 작가가 강의하면서 법조문을 예로 들었는데, 수강생 중에 법률 전문가가 있어서 오류를 지적한다거나……. 일반적이고 대중적이면서도 전문성까지 갖춰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 최재훈 파트장
공공 교육기관인 지역 도서관에서 이용대상을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않는 프로그램이기에 쉽고 재미있고 가벼워야 하지 않을까, 내내 반문했던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제목만으로도 뜨악하게 만들었던 인문학 강의들이 그제야 다시 보였다. 대학 강의처럼 학문적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일반론에만 치우치다 보면 흔하디 흔한 내용이 되어버린다. 문제는 프로그램의 난이도가 아니라 균형이다. 대중성과 전문성, 트렌드와 클래식, 흥행과 공공성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백화점 문화센터 프로그램들을 보면 도서관 프로그램과 별반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수준이 높아요. 고객 유치를 위해서라도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거든요. 하지만 고객 유치를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수요가 높고 유행하는 주제,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프로그램만 살아남을 수 있죠. 백화점 문화센터와 차별되는 도서관만의 강점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재미는 없더라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들, 공공을 위한 이슈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거……. 교육기관으로서의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하죠.”
– 최재훈 파트장
프로그램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어떤지 물으니, 최재훈 파트장이 쑥스러운 듯 말끝을 흐린다. “그걸 내 입으로 말해도 되나…….” 강의가 진행될수록 만족도가 점점 높아지는 데다가 프로그램에 대해 고마워하는 이용자가 많다며, 기쁜 듯 설명했다. 그는 도서관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마치 불로소득같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주체인 동시에 그 또한 가장 열성적인 이용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 역시 적지 않다. 직장인 이용자들의 워라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평일 저녁 프로그램이 도서관 직원들의 워라밸까지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현재로서는 직원들의 야근을 전제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 내 프로그램을 위한 공간도 제한적이다. 기존에 안정적으로 운영해 오고 있는 어린이, 학부모, 어르신 대상의 프로그램과 공간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에 강의실과 시간이 이리저리 밀리기에 십상이다. 그럼에도 도서관이 가진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도서관에서 할 수 있는 게 생각보다 너무 많아요. 책이 있고, 공간이 있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고……. 전시를 하고 싶으면 전시를 하면 되고, 공연을 하고 싶으면 공연을 하면 돼요. 언제나 보고 즐길 사람이 있거든요. 좋은 강사님 섭외하기도 너무 쉬워요. 도서관 프로그램이라면 강사님들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거든요.
– 최재훈 파트장
취재를 마치고 도서관을 나서니 어느덧 밤 10시를 앞둔 시각. 늦은 시간임에도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그득했다. 텁텁한 공기에 비릿한 땀 냄새와 알싸한 술 냄새가 뒤섞였다. 불금을 즐기기 위해, 혹은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아니면 여전히 일하기 위해 지하철에 몸을 실은 사람들.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붐비는 지하철이 그저 익숙한 듯, 스마트폰으로 태연하게 문자를 보내고 게임을 하는 그들을 보니 다시 궁금해졌다. 워라밸 시대, 우리의 저녁은 무엇으로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까. 우리는 이제 또다시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사진제공_서초구립반포도서관
박유미
박유미
설치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매체에 관심이 많은 미술작가. 2013년 개인전 《what a wonderful world》 외 다수의 전시에 참여했으며 2014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프로젝트 ‘마로니에 다방’을 기획했다. 어린이 예술교육에도 관심이 많다. 여전히 예술로 말하고 예술을 가르치는 작가 겸 강사로 목하 활동 중이다.
gomako19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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