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미국 영화계는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배우들의 미투(#MeToo)로 뜨거웠다. 그보다 먼저 2016년, 이미 한국 온라인상에서는 ‘#00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해 각 분야의 숨겨왔던 성폭력 피해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국내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성폭력 피해 해시태그 운동이 할리우드의 배우와 영화관계자들의 미투와 만났고, 2018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검찰 내부의 성추행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에서 정점을 찍었다. 서 검사의 폭로는 예술계, 정치계, 학계 등 분야를 막론한 각계각층의 피해 여성들의 고발로 이어졌고, 언론은 성폭력에 관한 기사를 연일 지면에 실었다. 서 검사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고 피해사실을 밝힌 용감한 여성들에게서 용기를 얻은 성폭력 피해자들은 온라인을 통해, 공적인 자리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드러내고 이것이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확인하고 위로받았다.
일련의 일들로 많은 여성들은 일상 속의 성폭력, 성희롱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러한 결심에 누구나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성에게 무엇이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이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았고, 같은 여성이라 해도 피해에 대한 감각은 달랐다. 오랜 시간 동안 여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고, 인내하고 견디는 것에 익숙해져 그것이 피해인지, 폭력인지 판단하는 것조차 낯설었다. 또한 성폭력은 이상하게도 피해자가 비난과 낙인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어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피해사실을 드러내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최근의 미투 현상은 오랫동안 여성운동을 해온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놀랍고도 반가운 일이었지만 대다수의 남성들과 일부 여성들에게는 불편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점잖기로 유명한 은퇴한 남성 노교수는 나의 스승님께 전화를 걸어 혹시 예전에 자신이 그런 실수를 한 적은 없는지 물으며 무엇이 성희롱이 되는지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고 한탄했다는 것이다. 칠순을 넘긴 나의 외삼촌 역시 여성의 가슴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성희롱이 되는지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이렇듯 노년뿐 아니라 중년의 남성들, 그리고 그보다 젊고 어린 남성들과 심지어 여성들도 어떤 것이 성희롱, 성폭력이 되는지에 대해 궁금해 했고 난처해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우리 모두는 무엇이 폭력이고 무엇이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지 배워서라도 알아야 하겠다고. 이제까지는 그런 기회가 없었으니 이렇듯 일상의 무지와 폭력이 난무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에 대한 (성적) 폭력은 일상 속에 속속들이 뿌리 깊게 스며있어 피해를 경험하지 않았거나 여성이라는 소수자의 위치를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 폭력에 대한 감각을 갖게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특히 남성의 입장에서, 남성 중심사회의 주류의 위치에서 그 감각을 가지려면 오랜 기간에 걸친 교육과 꾸준한 의식화, 그리고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역시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으므로 젠더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은 우리 모두가 훈련해야한다. 우리 모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배움의 기회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소개한다. 젠더의 경계를 넘어 우리를 인간으로 교류하게 하는 문화예술교육의 현장과 그 교육자들을.
나를 지키는 실근육을 만드는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
- 인터뷰이 | 장윤실 _ 연극배우, 기획자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출과를 졸업하고 극단 ‘여기는 당연히, 극장’ 단원으로 활동하며 <과학 하는 마음> <낯선 하루이야기> <동창생들> <인터내셔널리스트> <삼년상>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했다.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푸른시민연대 어머니한글학교, 가톨릭청년회관 다리연극교실, 한국폴리텍대학교, 다솜학교 등에서 연극수업을 기획·진행하고 있다.
- 공공하는청년 페이스북
프로그램 소개를 부탁한다.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제목처럼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연습’을 해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폭력을 의식했던 혹은 의식하지 못했던 참여자의 자기 경험에서부터 출발해 함께 나누고, 논의하여 적절한 대응방법을 찾고 즉흥극 형식으로 재현, 연습하고 가장 나은 방법을 매뉴얼화 해서 결과물로 남기는 것까지가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다. 또 모여서 함께 움직이고 소리 내며 몸을 쓰는 활동, ‘폭력·폭력적’에 대한 우리들의 정의 만들어가기, 참여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공감하는 게임을 하고, 자기 기록의 시간, 자기가 좋아하는 글 혹은 음악을 나누는 시간 등 재미있으면서도 무겁지 않게, 즐겁게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 모집할 때 참가대상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성별 나이 불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 혼자가 아니구나,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구나 하는 ‘믿는 구석’이라고 할까, 연대의 느낌을 가질 수 있으면 했다. 이번 한 번의 워크숍으로 당장 각자의 삶이 달라지진 않겠지만 폭력에 대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실근육처럼 조금씩 조금씩 생길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재작년 말에 대안학교 로드스꼴라 대표교사 김현아(어딘)의 제안으로 워크숍을 구상하게 되었다. 어딘이 ‘책 읽는 대학’이란 모임에서 청년들과 공부하고 이야기하다 일상적인 성희롱, 성폭력에 대한 경험들을 나누게 되었고 대처방법을 연습해 보는 워크숍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 진행을 저에게 제안했다. 그래서 작년 2월 4회에 걸쳐 1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워크숍을 진행했다. 올해는 제가 워크숍을 발전시켜서 다시 하자는 제안을 해서 로드스꼴라와 ‘공공하는청년’이 공동으로 8회차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이 젠더감수성을 높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참여자에 제한을 두지 않고 완전히 열어서 모집하면서, 위험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기대도 컸다. 이번 워크숍도 10대, 20대 여성과 남성들이 함께 하고 있는데, 젠더감수성이나 페미니즘적 관점을 내세우거나 강조하지 않고 워크숍을 진행하는데도 폭력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는 활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스며들거나 나온다. 참여자 서로의 이야기를 듣는 경험, 자신의 위치에서 확인되고 인식되는 젠더적 시선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감하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간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혐오 등 차별과 폭력의 문화를 바꾸는 데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워크숍 안에서 자신의 사례를 나누고, 폭력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갈 때, 폭력의 한 형태로 혐오가 꼭 등장한다. 내가 혐오의 대상이 될 때, 내가 부지불식간에 혐오의 가해자가 될 때의 경험을 나누고 어떤 방식으로든 더 나은 방법을 찾아가는 활동을 한다. 참여자들의 작은 변화들이 여성혐오를 바꾸는데 분명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내 공간을 지키는 힘을 발견하는
‘하늘을 나는 아프리칸 댄스’
‘하늘을 나는 아프리칸 댄스’
- 인터뷰이 | 권이은정 _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 대표
- 심리학과 여성학을 전공한 후 20대 후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그간 항상 꿈꿔오던 춤과 인연이 닿아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힙합과 재즈댄스로 무용을 시작했으나 5년 전 우연한 기회로 서아프리카 춤을 접하고는 격식을 강조하지 않고 흥을 마음껏 펼치는 새로운 춤의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2016년부터 서아프리카 세네갈, 부르키나파소, 베냉 등을 오가며 현지 무용수들에게 트레이닝을 받고 이를 다시 국내에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 ‘따그(Tagg)’란 세네갈의 민족 언어 중 하나인 월로프(Wolof)어로 ‘둥지’라는 뜻이다.
-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 페이스북
프로그램 소개를 부탁한다.
‘하늘을 나는 아프리칸댄스(하나아댄)’는 서아프리카 춤 입문 강좌이다.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북소리에 맞춰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 연습을 통해 내 몸이 가지고 있는 힘도 깨닫고 몸을 쓰는 즐거움과 해방감도 느껴보는 것이 이 수업의 목표다. 남녀노소 모두에게 열려있어 60대 참여자도 종종 있고 현재 10기 수강생 중에는 9살 어린이도 있다. 내 몸의 컨디션에 맞게,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맞춰 진행하기 때문에 누구든 관심이 있다면 참여할 수 있다. 함께 춤을 출 동료에게서, 나를 지탱해줄 바닥에서, 점프하며 만나는 공기 중에서 에너지를 모아 서로 나누는 의식으로 수업의 문을 연다. 그 뒤로는 여느 춤 수업과 마찬가지로 워밍업, 복근 운동 등으로 몸을 데운 뒤 젬베 댄스나 사바르 댄스 같은 아프리카 전통춤, 쿠데데칼레나 아프로비트 같은 아프로-팝 댄스, 아프리카 현대무용인 아프로-컨템포러리 댄스 등 다양한 장르의 춤을 배운다. 마지막에는 아프리카 현악기인 코라나 은고니의 은은한 멜로디에 몸을 맡기고 거친 숨을 가다듬는 운동으로 마무리한다. 아프리칸 댄스는 다른 장르에 비해 제약이 적기 때문에 몸 쓰기를 두려워하는 분들에게 춤에 대한 마음의 장벽을 낮추기 좋다. 서아프리카 전통춤의 하나인 젬베 댄스의 경우 팔을 최대한 길게 쓰고 무릎을 최대한 높이 드는 특성이 있어 몸의 가동 범위도 커진다. 이것이 자신감과 자존감을 향상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몸도 마음도 힘이 세지는 효과가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2015년 1월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의 시민 강좌 프로그램 ‘하늘을 나는 교실’로 시작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강의 시작부터 3년간 ‘하늘을 나는 교실’의 간판프로그램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2017년 ‘하늘을 나는 교실’이 활동을 대폭 축소하면서 우리 프로그램도 따로 독립하게 되었다. 현재는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가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이 젠더감수성을 높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방송 촬영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그때마다 “이렇게 격렬하게 추면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겠네요? 성공 사례는 없나요?” 같은 질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만큼 다이어트가 아닌 몸과 마음의 건강에 초점을 둔 춤 수업이 흔치 않다. 우리 프로그램은 날씬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예쁘게 보이기 위해 춤을 추지 않는다. ‘좋아서 추는 춤’을 익히고 몸을 검열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진다는 장점이 있다. [일다]의 프로그램으로 시작해서인지 초창기에서부터 수강생 중에 여성주의자가 많았다. 그래서 자기소개를 할 때도, 수업을 마치고 소감을 나눌 때에서도 여성주의 감수성을 가진 분들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채식주의자들에 대한 배려가 당연하게 여겨졌다. 같이 땀을 흘리다 보면 금방 친해져서 수강생끼리 오프라인 모임을 갖는 경우도 많은데 퀴어문화제에 함께 가자는 제안이 하나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혐오 등 차별과 폭력의 문화를 바꾸는 데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같은 춤을 추더라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추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앞서 기대효과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젬베 댄스가 갖는 특유의 확장성이 마음의 확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을 강사가 인지하고 소극적으로 움직이는 습관이 되어 있는 분들께 몸을 크게 쓰는 것이 갖는 의미를 전달하고 그것을 마음을 다해 독려한다면 내면의 힘을 기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한국의 여성혐오 문화 속에서 살아가려면 일상적인 차별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차별주의자가 나의 물리적·정신적 공간을 무례하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 공간을 지켜내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 과정에서 서아프리카 춤이 소수자들에게 내 안의 힘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자신의 축을 세우고, 상대와의 연결과 경청을 훈련하는
‘2030 그린웨코’
‘2030 그린웨코’
- 인터뷰이 | 한지영(이다) _ 힐링모션 대표
- 사랑하는 춤과 전공했던 심리학 둘 모두를 함께 하고 싶어서 ‘무용동작심리’라는 분야를 추가로 전공하게 되었고, 그 후 2006년부터 이전에는 만나기 어려웠을 국내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 함께 춤추거나 움직임으로 소통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2015년 『나를 치유하는 동작』(문학동네)을 출판했고, 지금까지 약 1만 3천 명 정도의 국내외 참여자들과 동작치유 프로그램으로 만났다. 홍대 앞에서 동작치유 스튜디오 ‘힐링모션’을 운영하며 스트레스가 많은 직장인, 교사, 돌봄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동작치유 워크숍을 하고 있다.
- 그린웨코 카페
프로그램 소개를 부탁한다.
‘2030 그린웨코’는 20대 사회초년생들의 일과 사랑을 응원하고자 만들어졌다. 웨코는 ‘웨스트 코스트 스윙 댄스’의 줄임말로 소셜댄스, 파트너댄스인 스윙댄스의 한 갈래이다. 웨코와 같은 파트너댄스는 기본적으로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계나 소통, 경청 등을 연습하는 기회가 된다. 예전의 저처럼 사람들만 마주하면 이유 없이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머리가 하얘지는 사람들도 이런 춤을 경험한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다른 파트너댄스도 그렇지만 웨코 역시 자신의 축을 먼저 세우고, 그 상태에서 상대와 연결되고 경청하는 훈련의 연속이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인다고 자신의 축을 잃는 순간 춤이 무너지게 된다. 이 현상이 우리 관계와 매우 닮았다. 연애에서도, 부모 자식 관계에서도, 그리고 직장 동료 사이에서도. 사람들과 연결성을 유지하고 같은 음악 안에 존재하면서 함께 춤추지만, 그래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연습을 말이 아닌 우리 몸 자체로 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실제로 10회 정도 수업을 받은 20대 참가자들이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 얘기해주는 것을 들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나다. 20대 후반의 한 여성 참가자는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서 쉽게 주눅이 들고 동료들과는 눈 맞추는 것조차 어려움을 느꼈는데 그린웨코에 참여하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요즘 달라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먼저 일주일간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 나누고 원으로 서서 하는 집단 동작치유 움직임으로 모두와의 바디 커넥션(신체 연결성)을 다시 만든다. 그리고 음악을 들으면서 둘씩 마주하고 웨코 스텝을 배우거나 새로운 패턴을 연습한다. 사이사이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기 위해 150여 가지의 동작치유기법을 하나씩 경험한다. 서로 좋아하는 음악을 추천하거나, 움직임을 통해 경험하는 파트너의 강점을 발견해서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있다.
이 프로그램이 젠더감수성을 높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웨코는 음악을 듣고 즉흥으로 안무 패턴을 정해서 제안하는 ‘리더’와 음악을 들으며 리더의 제안을 경청하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표현을 해내는 ‘팔뤄’ 이렇게 둘이 추는 춤이다. 예상하다시피 대부분 전통적인 파트너댄스에서는 남자가 리더를, 여자가 팔뤄를 한다. 우리 강사진에는 여성 리더와 남성 리더 둘 다 있다. 첫 수업에서 리더와 팔뤄에 대해 설명하고 지금 자신의 삶에서 더 필요한 부분, 연습해보고 싶은 부분이 담긴 역할을 자유롭게 선택하라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많은 여자 참가자들이 리더를 선택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1기 수업이 끝나가는 지금도 여성 리더는 여전히 리더 역할을 재미있어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파트너댄스에서 성별 역할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 현재 나의 성향에 좀 더 집중해서 역할을 선택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사회 초년생이고 게다가 여성이라면 현실에서는 많은 경우에 정해진 것을 따라야 하고 목소리를 낼 수 없다. 그런데 춤을 추면서는 상대가 누구든 내가 음악을 듣고 그 사람을 이끌어야 하고, 순간순간 결정하고, 심지어 그걸 바로 실행에 옮겨야 한다. 작은 팀을 운영하는 셈이다. 이론이나 논리의 차원이 아니라 팔과 다리, 그리고 나의 심장이 함께 현실 안에서 대담하게 상대를 이끄는 경험을 하는 일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여성혐오 등 차별과 폭력의 문화를 바꾸는 데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도시괴담 같은 여성에 관한 많은 편견들이 있지 않나. 생수통을 들지 못한다거나 남자와 싸우면 진다거나 소심하고 리더십이 낮을 것이라거나. 그러나 우리는 춤 안에서 매번 목격하고 있다. 자기 체중과 정확한 축을 이용해서 덩치가 두 배나 되는 남성을 바람 같이 가뿐하게 회전시키고 옮기고 원하는 동작을 표현해내는 분들. 몸으로도 머리로도 견고해 보였던 다양한 편견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륵 녹아버리는 기분이다. 저 역시도 20대 성인들이 춤으로 하는 자기표현, 이 안에서의 작은 성취를 목격하면서 저의 편견들을 하나씩 다른 문장으로 대체하고 있다. 몸으로 직접 이행하는 어떤 것들은 말이나 선언보다 훨씬 더 즉각적이고 힘이 세다. 그런 의미에서 변화는 잡은 손끝에서, 몸의 중심(센터링)에서, 땅에 안정되게 딛고 있는 발(그라운딩)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춤을 추는 이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의 관계 연습을 매우 심플한 움직임 구조 안에서 연습하고 자신의 몸에 밴 기존 패턴을 바꾸어 세상에 다시 나아가는 것은 무용동작심리 기법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다.
사진제공 _ 공공하는청년, 아프리칸댄스컴퍼니 따그, 힐링모션
- 지현
- 1997년 페미니스트 가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공감과 환대, 치유와 회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페미니스트 가수로 20여 년간 다양한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청소년페미니즘교육연구소 소녀서당 대표, 여성문화생산자협동조합 무지개공방 이사를 맡고 있으며, 기획자로도 활동 중이다.
www.ziihiio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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