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말했다. “다른 것을 맛보는 것이 예술이지 일등을 매기는 것이 예술이 아니다.” 이는 단지 예술 분야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교육 또한 일등을 매기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될 순 없다. 문화예술교육 분야에선 어떠한가. 수많은 교육기관에서 다양한 대내외 활동을 통해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연극, 무용, 음악, 미술 등 순수예술을 기반으로 한 교육이 대부분이다. 탈장르, 융·복합으로 대변되고 있는 복합문화의 시대. 문화예술교육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작지만 큰 변화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현장에 가다
지난 8월 29일 늦은 오후.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위치한 초월고등학교를 찾았다. 유난히 무더웠던 2017년의 여름도 지는 해와 함께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대부분의 학생이 하교를 준비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본관 3층 컴퓨터실엔 또 다른 수업 준비로 분주하였다. 2017 학교 예술강사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기획사업 <프로젝션 맵핑* – 미디어파사드**> 수업이 예정돼있기 때문이었다.
* 프로젝션 맵핑 : 대상물의 표현에 빛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투사하여 변화를 줌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 다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술
** 미디어파사드 : 미디어(media)와 건물의 외벽을 뜻하는 파사드(facade)가 합성된 용어로, 건물의 외벽에 다양한 콘텐츠 영상을 투사하는 것을 이름
전국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학교 예술강사 지원사업은 기본적으로 순수예술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다. 경기도 내 초·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특수,대안학교에 8개 분야(연극, 영화, 무용, 만화/애니, 공예, 사진, 디자인, 국악) 예술강사 지원을 통해 학교 문화예술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지역의 특성 및 수요를 고려하여 지역별로 다양한 ‘기획사업’도 운영 중에 있다.
광주 초월고에서 진행되는 <미디어파사드> 수업은 결과발표회 성격을 띤 <청소년 페스티벌>, 지역특성화 미술 교육 프로그램 <청출어람, 단원에게 묻다>와 함께 운영기관의 학교 예술강사 지원사업의 기획사업으로 분류된다.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접목된 탈장르적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다른 문화예술교육과 그 성격을 달리한다. 7월부터 광주 초월고, 여주 세종고, 동두천 동두천외고에서 각각 그 첫발을 뗐다.
디지털 융합 미디어를 활용하여 전달하는 자신만의 메시지
수업에 앞서 초월고 미디어아트 교육을 담당하는 김진태 교수를 만났다. 그는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미디어창작 학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더불어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미디어아트를 베이스로 하는 커머셜(commercial) 작업, 파인아트(fine-art)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현재 미디어아트는 가장 빨리 발전하는 산업이자 융복합 예술의 첨단 분야입니다. 하지만 여러 장르를 아우르는 비정형 미디어*를 실제로 제작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고등학교에서 교육할 수 있는 선생님이 많지 않습니다.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는 제가 이번 미디어파사드 교육을 선뜻 맡게 된 이유가 이 점입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미디어파사드의 바탕이 되는 비정형 미디어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데, 단어 자체가 생소할 수 있어서 좀 더 친근하게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작품들을 접하게끔 하고 있어요. 너무 첨단인 것들만 보여주고 교육하다 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고전 예술 작품들과 접목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 비정형 미디어 : 정상적인 사각의 구조가 아닌,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를 디스플레이 구조에 맞게 재편성하는 방식을 활용한 미디어
고전예술과 미디어아트의 만남이라니, 커리큘럼부터 심상치 않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영상매체, 스마트매체를 접하고 자라온 학생들의 환경을 주목한다. 그만큼 미디어아트를 익숙한 것, 친근한 것으로 느끼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김 교수는 아이들이 알고 있는 미디어의 폭이 좁다고 말한다. 우리가 흔히 4K, UHD*라고 일컫는 용어 자체가 영상의 규격에 국한돼 있는 것과 마찬가지란 얘기다.
* 4K UHD : 초고선명(UHD, Ultra High Definition) 영상 기술 방식 중 하나로, 가로·세로 3840×2160 화면 해상도의 차세대 고화질 영상 품질 기준을 말함
“미디어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길 바라고 있어요. 다양한 매체를 일찍부터 접해 온 친구들이긴 하지만 그 개념을 확장하여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조금만 프레임을 넓혀주면 훨씬 더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수업을 통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비정형 미디어를 만드는 가장 바탕이 되는 작업이 바로 프로젝션 맵핑이거든요. 프로젝션 맵핑 작업이 전체 수업의 중심이 될 거예요. 향후 진로나 전공을 선택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미디어아트는 산업적으로도 다양한 직군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분야입니다.”
적성 보다는 진학 중심의 교육에 익숙한 요즘 학생들에게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는 이 수업 내용을 통해 학생들이 무엇을 얻게 될까? 그 점이 궁금했다.
“최근에 엄마들 사이에서 ‘프로그램 코딩 교육’ 열풍이 불었어요. 미디어파사드라는 영역에서 프로그램 코딩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딩을 할 줄 안다는 것보다 그 문법을 이해하는 쪽이 훨씬 가치가 크죠.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적인 부분보다 ‘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디지털 융합 미디어를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이 점을 이해시키고 싶습니다.”
“또 다른 목표가 있다면,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작업한 저의 경험을 최대한 나누려고 합니다. 학교 교육만을 통해서는 현장 전문가가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물론 이번 교육을 통해서 참여 학생들은 많은 소프트웨어를 직접 다루고 미디어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현장 전문가와 함께 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입니다. 모두가 미디어 아티스트가 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도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 처음 발을 어떻게 들여 놓아야 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미디어 제작자가 된 시대
그동안 총 16회의 수업 중 3회에 걸쳐 다양한 미디어아트 사례를 살펴보고 그 개념을 정립하는 이론 수업이 주가 됐다면, 이날은 본격적인 실습에 돌입하는 첫 수업이었다. 당일 수업은 영화 ‘스타워즈’를 사례로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됐다. 수업 내용 중 우리 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 카메라 성능이 웬만한 카메라보다 더 좋아졌다는 얘기는 얼마만큼 기술이 발전이 빠르게 이뤄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휴대폰으로 찍은 상업영화의 한 장면도 소개됐다. 굳이 고성능 장비를 활용하지 않아도 누구나 미디어 제작자가 될 수 있는 시대가 된 셈이다.
영상 촬영은 생산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촬영된 원본을 재편집하는 건 또 다른 창조의 과정이다. 영상 편집은 불필요한 부분을 지워나가고 필요한 부분을 가져다 붙이는 작업이지만 단순히 기술을 익히는 문제만은 아니다. 이제는 일상에서도 많이 활용되는 프로그램들이지만 전문성을 확보하기까진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며, 작업에 대한 개념 이해와 구상 과정도 중요하다. 이번 수업은 그런 의미에서 프로젝션 맵핑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기능을 익히는데 목표를 두고,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시간 가량의 이론 수업을 마치고 본격적인 실습이 진행됐다. 사진을 합성하고 레이어의 개념을 익히는 디지털 포토 콜라주의 시작. 모니터 앞 학생들의 두 눈이 반짝였다. 서툰 손놀림으로 교수님의 지도에 따라 프로그램을 익혀 나갔다. 단순히 사진을 잘라 붙이는 작업에도 누구 하나 지루한 내색이 없었다. 탄탄한 기초가 바탕이 돼야 멋진 미디어 아트가 탄생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유일무이한 창조 세계를 꿈꾸다
수업이 끝나고 두 명의 학생을 만나 수업에 대한 소감을 들어보았다.
“원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미술 작품은 단순히 벽에 걸어두고 보기만 하는 건데 미디어아트는 기기와 결합해 다양한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잖아요? 다른 예술 장르와 융합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로웠어요. 아직까진 제가 표현하고 싶은 대로 표현되지 않아서 어렵기도 한데 더 열심히 배워야겠죠?”
박소현, 초월고등학교 2학년
“대학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싶어요. 꿈은 가상현실 디자이너가 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이런 수업이 마련됐다고 했을 때 기회다 싶어 참여하게 됐어요. 그동안 이론 수업이 많아 다소 힘들었는데 앞으로 실습 위주로 진행된다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이기현, 초월고등학교 1학년
수업을 끝마친 학생들에게 어떤 작품을 구상하고 있냐는 질문을 해보았지만 부끄러운 미소만 띄울 뿐이었다. 하지만 우린 이미 알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 낼 각각의 작품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유일무이한 세계를 창조해 낼 것이라고. 본 프로그램의 목적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단순한 목적, 혹은 도구가 아닌 창의적인 표현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 공존과 충돌이라는 융합적인 작업을 통해 미처 몰랐던 자신의 꿈을 찾아낼 수도 있다는 것. 이미 예술은 장르 밖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우린 그저 진화하는 문화예술교육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김진태 교수와의 마지막 대화로 이번 수업을 갈무리해 본다.
“미디어아트는 재미있어요. 기존의 순수예술과 접목하면 기존의 것 이상을 상상할 수 있거든요. 앞으로도 다양한 교육기관에서 독립적인 미디어아트 수업이 활발히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미디어아트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게 프로그래밍 쪽이거든요. 프로그래밍은 전 분야에 연결고리가 형성돼 있어 주목해 볼 필요가 있어요. 다양한 실험 교육이 가능할 겁니다.”
- 엄현석_자유기고가
- 대학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2008년 신춘문예 희곡부문을 통해 등단했다.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 문화예술, 사회공헌활동분야 칼럼을 주로 썼다. 현재 아카이빙 전문 단체 <엠카이브>를 운영하며 서울문화재단,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등과 함께 일하고 있다.
fanjourna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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