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페소아와 페소아들』은 70개가 넘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이명(異名)으로 남긴 산문들 중에서 알베르토 카에이루(Alberto Caeiro), 알바루 드 캄푸스(Álvaro de Campos) 등 대표적 이명 9인의 글과 페소아 자신의 본명으로 남긴 6편의 글을 엮은 책이다.
페소아와 그의 이명들이 쓴 각각의 산문들은 쉽게 읽어나갈 수 있는 글은 아니다. 그가 창조해낸 이명들의 정체성을 상상하거나, 그들이 창작한 산문들의 메시지를 페소아와 연결하여 생각해보기란 쉽지 않다. 각각의 글이 주는 내용과 무게 또한 만만치 않다. 그의 산문들 속에서 발견된 페소아는 낭만주의자 혹은 감각을 추구하는 예술가로서만 봐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자신이 살던 동시대와 밀착하여 ‘자아’와 ‘세계’에 대해서 예민하게 감각하고 사유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우리’의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과정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느끼는 것,
모든 관점을 가지는 것,
매 분마다 너 자신과 모순을 일으키면서 진실할 수 있는 것.
 

-알바루 드 캄푸스(Álvaro de Campos), 「시간의 통로(Passagem das Horas)」중에서

페소아가 개인과 사회에 던진 질문과 사색은 우리가 일상에서 매우 보편적이라고 여겨졌거나, 익숙해진 시스템과 규율 속에서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존재들을 흔든다. 우리의 존재와 감각들이 무엇을 망각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깨닫게 한다.
또한, 일상의 모순을 기민한 감각으로 꺼내 질문 없이 살아온 삶의 존재들을 일순간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지각하기 어려운 삶의 모순들과 부조리함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기원한 것인지, ‘나’와 ‘우리’는 누구인지, 끊임없이 진지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는 70개가 넘는 이명을 통해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페소아의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스스로를 ‘번역가’, ‘무역 회사의 해외 통신원’이라 했으며, ‘시인’ 또는 ‘작가’인 것은 직업이라기보다 소명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대목에서 매일같이 새롭고 철저한 눈과 살아있는 정신으로 ‘나’와 ‘세계’를 마주하겠다는 페소아의 강직함이 느껴진다. 예술가가 지니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점에서 작가이자 동시에 문화예술교육 현장에 있는 내게 <페소아와 페소아들>은 실제 교육프로그램의 방법론을 제시하는 실용주의적 서적이라기보다 참여자와 함께 예술을 통해 무엇을 경험하고 성찰할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참여자들과 깨닫고자 한 것, 나누고 싶은 경험의 중심에는 ‘나를 느끼기’라는 매우 소박해 보이는 내용과 바람이 있었다. 익숙함과 편안함 속에 존재하는 ‘나’는 오히려 그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점철된 고질적 장벽 때문에 잠재된 나, 낯선 자신을 소환하여 대면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페소아들’을 소환하려는 이유
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를 만들어냈어. 이 모든 걸 실제 세계의 틀들에 맞췄지.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에 눈금을 매기고, 우정 관계들을 구체화시키고, 내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토론들을 경청했고, 이 모든 것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를 창조한 사람 그러니까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아돌푸 카사이스 몬테이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예술은 ‘나와 세계’에 대한 질문인 동시에 고정되고 경직된 틀을 허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틀이 견고하면 견고할수록 허물기 쉽지 않고, 고정된 틀일수록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마주하기 어렵다. 페소아는 이런 지점에서 어쩌면 자신을 ‘탈 개성화’하고 ‘나’라는 중심을 없앤 투명한 자리에 ‘페소아들(이명)’을 소환함으로써 전혀 다른 삶을 경험하고 타자의 시각으로 세상을 느끼려고 했던 건 아닌지 생각해 본다.
‘나’라는 중심을 비워내고 온전히 타자가 되어봄으로써 새로운 세계관을 갖는 일은 남의 옷을 잠시 빌려 입고 남인 척하는 일시적 행위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타자가 되기란 끊임없이 경험하며 감각을 확장하는 동사적 성격을 가지며, 생생함과 실존적 충만함이 동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여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은 세상을 보는 학습이자 동시에 공간을 이동하지 않고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여행’이기도 하다.
삶에 동의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과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 『불안의 책』 중에서

페르난두 페소아의 주장처럼 ‘나’라는 주체는 본능적으로 독점적 존재가 되려고 한다. 낯선 타자를 몰아내려는 행위 역시 차이와 자기모순을 견디지 못하는 결과라고 엮은이는 말한다. 즉 ‘모든 것을 모든 방식으로 느끼기’, ‘타자되기’ 속에 존재하는 ‘조화’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정과 편안함이 아닌, 고도의 긴장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복잡한 사회 체제와 수많은 인과들 속에서 눈으로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이면들을 마주하기 쉽지 않다.
이런 지점에서 페소아가 자신의 고정된 시각이 아닌 타자의 시선과 감각을 통해 최대한 자의식을 게워내고 새로운 시각으로 거듭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 것은 세상에 순응하는 것과는 정반대적 의미로써의 ‘조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페소아의 ‘타자되기’와 ‘본다’라는 행위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인간다움’과 ‘살아있는 감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질문하며 성찰을 요구한다.
‘감각의 확장’이라는 이름의 예술적 놀이
나는 대답하지 않으면서 대답했다.
 
“이것만 말해주세요.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뭐죠?”
“내가 나에게 뭐냐고?”
  
카에이루가 반복했다.
“나는 내 감각 중의 하나지.”
 

-알바루 드 캄푸스(Álvaro de Campos), 「내 스승 카에이루를 기억하는 노트들」 중에서

얼마 전 한 워크숍에서 만난 참여자들과 함께 ‘새로운 이름 짓기’라는 작명 놀이를 진행했다. 타자와 구분하기 위해 지어진 도구로써의 이름이 아닌 나다운 이름을 발견해보는 시간에서 참여자들은 비언어적 소통과 ‘본다’라는 일상의 감각을 극대화하여 서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상상하여 파트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시간을 가졌다. ‘푸른 들판의 땀방울’이라는 이름부터 시작해 ‘궁금한 초원의 들꽃’, ‘연민과 열정이 가득한 반듯함’, ‘흔들리는 똘똘이 스머프’ 까지. 처음 만난 사람과 주고받은 새로운 이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개성 그 자체였다.
마치 한 편의 시 구절처럼 탄생한 각각의 이름들은 타자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허락했고, 고정적이거나 상투적인 대화가 아닌 새로운 관계 맺기의 시도가 되었다. ‘나’와 타자를 통해 발견된 새로운 이름들은 ‘내’ 몸과 현재의 삶에 귀를 기울였다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반적으로 부모에게 부여받은 이름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평생 불리는 고정성을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새로운 이름 짓기 놀이는 일상의 고정된 ‘나’로부터 잠재된 수많은 ‘복수’들을 바깥으로 소환해줌으로써 해방감을 가져다준다. 앞서, 예술이 ‘나와 세계’의 경직된 틀을 허무는 작업이라고 언급했듯이, 새로운 이름 짓기는 이런 의미에서 예술적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바깥 세계의 존재를 확장된 시각으로 인식하고 새로운 관계 맺기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 망원경은 눈의 확장, 책은 기억의 확장’이라고 말했듯이, 페소아에게 이명이란 감각의 확장을 의미하며, 감각의 확장은 곧 몸의 확장이 될 것이다.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엮은이도 말한다. ‘알 수 없는 중간쯤 어딘가에, 그가 있다’라고.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나의 이명들은 누구인지.
김현주 대표의 또 다른 추천도서
1.『피로사회』 한병철
우리에게 지금 ‘깊은 심심함’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2.『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금 비밀, 유혹, 에로스, 욕망, 지옥, 고통으로부터 타자가 사라지고 있다!
3.『코르푸스』 장 뤽 낭시
기이하고 낯선 몸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는 책.
4.『걷기의 역사』 리베카 솔닛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읽어보자.
5.『마지막 휴양지』 존 패트릭 루이스(글), 로베르토 인노첸티(그림)
‘추억이란 머리에 쓰는 낡은 모자, 상상력은 나를 어디로든 이동하게 하는 신발과 같아. 잃어버린 마음이여, 쉬어라’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김현주_시각예술가, A.C. Clinamen 대표
시각예술가로 활동 중이며 다양한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과 프로젝트를 기획·운영하고 있다. 동시대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어울리며 그들의 이야기를 몸으로 녹음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 사는 중이다. 현재 서울예술치유허브 7기 작가로 입주하여 독거노인의 삶을 조망하는 프로젝트 <망우忘憂방>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문화예술 행정가 네트워킹 워크숍 ‘몸-관계와 소통의 열림’ 등 다수의 워크숍을 진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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