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행의 의미를 사전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 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행이 무엇일까를, 한 명씩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 좋은 일을 할 때 염라대왕님 얼굴을 한 번 떠올린다든가 혹은 내 곳간이 조금 찼겠지? 라는 그런 상상을 할 수 있는 아이가 딱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게 하나의 성과가 아닐까요?”
-이윤미 예술교육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2017 세계문화예술교육 주간을 맞아 문화예술교육 워크숍의 일환으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우수 교육 프로그램 개발 및 실현을 위한 전문가 양성과정 KCP(KACES Certificat Program, 우수 교육 프로그램 수료과정) 연극과정을 수료한 이윤미, 유은정, 안용세 예술교육자들의 <곳간 채우기 프로젝트> 연극놀이 워크숍에 다녀왔다. 이 프로그램은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 이야기 구조의 흐름을 따라 참여자들이 조각상 만들기, 역할 내 교사와 극적 상황 체험하기, 즉흥연기, 장면 만들기 등 다양한 볼거리 및 연극적 기법과 연극놀이를 통해 활동 안에서 스스로 묻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활동을 해 보도록 구성되었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1층 공간 네모, 참여자들이 도착하기 전, 연극놀이 수업 준비로 세 명의 예술교육자 모두 분주한 모습이다. 바닥에 테이프로 참여자들의 자리를 표시하고 영상과 음향을 체크한다. 수업 중간 중간에 쓰일 검은 천, 모자, 핸드드럼, 소품 바구니며 노자장부, 보면대 등의 위치를 확인하고 곧이어 공간 네모로 입장하는 학생들을 맞이한다. 인솔교사를 따라 두 줄로 들어왔던 아이들은 이름표를 붙이고 소지품을 한 쪽에 치워두고 예술교육자들이 미리 테이핑 해 두었던 그 자리에 원으로 둥그렇게 선다.
눈빛으로 자리바꾸기
“우리가 처음으로 같이 해 보려는 놀이는 ‘눈빛으로 자리 바꾸기’예요. (손가락으로 원 한 가운데를 가리키며) 저 가운데 테이프 보이죠? 선생님이 ‘준비’라고 하면 모두 저 테이프를 바라보다가 ‘시작’ 이라고 하면 고개를 들어 서로 눈을 바라보는 거예요. 이때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끼리 상대방의 눈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자리를 바꾸는 거예요.”
안용세 예술교육자의 준비, 시작! 소리에 참여자들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낯선 공간, 처음 만나는 선생님들, 놀이로 시작하는 낯선 수업 방식. 비실비실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꾹 참고 눈빛이 마주친 사람들끼리 서로 자리를 바꾼다. 서로가 상대방의 자리에 완전히 도착할 때까지, 끝까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 간단한 규칙 하나로 참여자들은 연극놀이의 세계로 한 발 발을 들여놓는다. ‘보기’와 ‘자리 바꾸기’. 내 자리나 저 자리나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막상 그 자리에 가보면 안다. 무엇이 얼마나 다른지를. 그 자리에 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서 보기. 오늘 연극놀이에서는 누구의 자리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연극놀이에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다른 이의 신발 신어보기’ 혹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being in another person’s skin)’라고 표현한다. … 다른 인물의 외양을 내 몸과 목소리로 표현하면서, 다른 이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고 다른 이의 피부를 통해 느끼고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 드라마 내에서 우리가 아닌 인물을 더 많이 연기할수록 우리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 <2016 우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연극)>, 15-16쪽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 <2016 우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연극)>, 15-16쪽
오늘 워크숍에서 참여자들은 김진희의 소설 <노잣돈 갚기 프로젝트>의 주인공 동우와 함께, 그리고 때로는 동우가 되어서, ‘선행(善行)’이라는 주제를 탐색한다. 대부분의 참여자들은 이 소설에 대해 모르지만 연극놀이를 참여하는 데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소설 속 이야기 중 1)동우의 갑작스러운 죽음, 2)염라대왕과의 만남, 3)텅 빈 동우의 곳간, 4)노잣돈을 빌려 준 염라대왕, 5)염라대왕에게 노잣돈 갚기(동우의 곳간 채우기) 이렇게 다섯 장면이 어떤 것은 예술교육자들이 보여주는 짧은 연극으로, 또 어떤 것은 참여자들이 상상해서 즉흥적으로 만들어내는 연극 장면으로 탈바꿈하여 원래의 소설과 같으면서 또 다른 ‘선행’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탄생했다.
동우와 자리 바꾸기- 동우는 지금 어디에?
본격적인 연극놀이를 시작하면서 세 명의 예술교육자들이 ‘오늘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연극의 주인공’과 관련된 짧은 연극 장면을 보여준다. ‘동우’가 ‘준희’와 짧은 실랑이를 벌이다가 느닷없이 차 사고를 당하고, 염라대왕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따져 묻기 위해 저승사자를 따라가려고 하는 순간 이윤미 예술교육자가 연극을 멈추고 참여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 동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동우가 어떻게 되었죠? 동우가 지금 누구를 만나러 간다고 했죠? 우리가 다같이 직접 동우가 되어서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을 만나러 가는 건 어떨까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직접 물어보기로 해요.”
연극 장면 밖에서 동우를 지켜보기만 했던 참여자들은 이제 모두 동우가 되어서 저승길로 여행을 떠난다. 검은 색 갓을 쓰고 불꽃이 프린트된 오버 사이즈 검은 셔츠를 입고 저승사자로 분한 유은정 예술교육자는 “저승으로 가는 길은 어두컴컴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이게 필요할게야” 라고 하면서 참여자들에게 소형 led양초를 하나씩 나눠준다. 양초를 받아든 참여자들은 자기들끼리 무섭다고 키득키득 농담처럼 몸을 떨면서도 누구 하나 입 밖으로 “에이, 어떻게 우리가 다 같이 동우가 돼요? 우리가 저승에 간다는 게 말이 돼요? 이거 인터넷에서 파는 거잖아요?” 하고 따져 묻는 사람이 없다. 모두가 저승길로 떠나는 동우인 것처럼 양초의 불을 밝혀 들고 두 명의 예술교육자가 양 쪽 끝을 잡고 높이 치켜든 길다란 검은 천 아래로 한 사람씩 들어가서 펄럭이는 천을 따라 한 쪽 끝에서 한 쪽 끝으로 재빠르게 뛰어 간다. 저승에서 울려 퍼질 법한 음산한 음악과 천둥소리 음향 효과. 우르릉 쾅쾅.
염라대왕의 눈으로 동우 바라보기- 텅텅 비어 있는 동우의 곳간
이윤미 예술교육자는 어느 틈엔가 ‘진달래골 윤부자’가 되어 긴 지팡이를 짚고 허리를 구부려 노파 연기를 하면서 가까스로 저승길을 빠져나온 ‘동우들’을 만난다. 윤부자는 동우보다 먼저 저승에 와서 염라대왕의 심판을 기다리는 인물이다. 친절한 이윤미 선생님이 아니다. 윤부자는 퉁명스럽게 아이들이 들고 있던 양초를 얼른 꺼서 바구니에 넣으라고 다그치면서 곧 염라대왕께서 오실 테니 얌전히들 앉아있으라고 아이들을 타박한다. “에구, 나는 오래 살다가 늙어서 저승에 오게 되었지만, 너희들은 무슨 사연이 있길래 나이도 어려보이는데 여길 왔누…” 하면서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간단한 의상으로 저승사자, 염라대왕, 윤부자로 변신(?)하여 이승에서 저승으로 참여자들을 능수능란하게 이끌어가는 예술교육자들의 역량이 돋보였다. 세 명의 예술교육자가 적재적소에서 꼭 필요한 인물로 등장하여 스무 명의 참여자들을 이끌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다시 저승에서 이승으로 무섭고도 짜릿한 여행을 떠날 때, ‘역할 내 교사(teacher in role)’를 수행하는 예술교육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배역을 그럴싸하게 잘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술교육자의 연기는 허구의 시공간 안에서 참여자들이 ‘진지하게’ 반응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톤 앤 매너’로 충분하다. 역할 내 교사는 참여자들을 연극의 세계 안으로 자연스럽게 초대하기 위해 평소 ‘연극쌤’ 이라면 절대 짓지 않을 짐짓 엄숙하고 무서운 얼굴로 아이들을 대한다. 아이들 역시 짐짓 겁먹은 체(?)하며 ‘동우의 저승길’ 연극놀이를 무척이나 즐기는 모양새다.
“염라대왕 납시오!”
저승사자의 외침에 윤부자는 납작 엎드려 고개를 조아리고, 순간 주위가 고요해지면서 염라대왕으로 분한 안용세 예술교육자가 등장한다. 금박을 두른 검은 두루마리를 차려입은 염라대왕은 근엄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윤부자의 곳간을 열어보자고 한다. 저승사자는 동영상을 틀어 윤부자의 곳간문을 삐이걱 열어 보인다. 돈 없는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를 쳐서 돈을 빌려줬다가 돈을 못 갚으면 차도 빼앗고 집도 빼앗아서 악착같이 부자가 됐다는 윤부자는 자기 곳간이 그득할 것이라고 자신한다. 그러나 저승의 곳간은 이승의 곳간과 다르다. 이승에서 돈이 많았다고 저승에서도 부자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곳간에는 달랑 쌀 몇 가마니만 있을 뿐이다.
“쯧쯧쯧 (저승의) 곳간이란 돈이 많다고 해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어떻게 살았길래 곳간이 이렇게 비어있는 것이냐? 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지옥에 가서 잘 생각해 보도록 하여라. 저승사자야, 윤부자를 지옥불로 끌고 가거라!”
염라대왕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윤부자는 울며불며 지옥으로 사라진다. 갑자기 참여자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곧이어 염라대왕은 전동우를 호명한다. 모두 움찔하더니 염라대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몇몇 친구들은 무릎까지 꿇었다. 아이들은 어느새 가상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어 있었다. 동우의 곳간은 어떤 모습일까? 삐이걱! 동우의 곳간이 열리고 텅텅 비어있다 못해 입구부터 주먹만 한 거미들이 여기저기 거미집을 어지럽게 쳐놓고, 대들보며 서까래가 다 썩어 문드러져서 곧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동우의 곳간 내부 모습이 동영상으로 펼쳐진다. 모두가 아연실색. 염라대왕 몇 천 년 만에 이렇게 형편없는 곳간은 처음 본다며 염라대왕조차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 둥둥둥둥 북이 울리며 이윤미 예술교육자가 잠시 또 연극을 멈춘다.
“동우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길래 곳간이 저렇게 비어있는 것일까요?”
다시 나의 자리에서 상상하기- 동우는 왜, 그리고 이제 어떻게?
윤부자가 동우 곳간에 있는 것을 다 빼앗아가서 그렇다, 동우가 집세를 안내서 그렇다, 아니다, 동우가 깡패여서 그렇다, 동우는 돈도 없고 친구에게 나쁘게 굴었다, 폭력을 썼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터져 나온다. 예술교육자들은 참여자들을 세 모둠으로 나누고 각각의 모둠에서 동우의 곳간이 왜 비어있을까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모둠 토의에서는 지하철에서 다리 쩍 벌리고 앉기, 쓰레기 아무데나 버리기, 수영장에서 실례하기, 짝이 의자에 앉으려고 할 때 의자 뒤로 빼기, 급식할 때 새치기, 친구 머리에 껌 붙이기, 친구를 위협해서 돈을 빌리고 돈 안 갚기 등 주변에서 쉽게 마주치는 심술궂은 행동에서부터 심각한 학교폭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악행(?)들이 나열되었다.
“으~ 정말 싫다~”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소박하고 귀여운 장난일지라도 초등학생의 눈높이에서 공감하고 반응하며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예술교육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때 (연극놀이) 리더와 참여자는 공동협력하는 협력 예술가(co-artist)이다. 그 목적은 발표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제(이슈, 이벤트, 관계)에 대해 연구, 조사, 탐구함으로써 집단적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 <2016 우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연극)>, 11쪽
–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 <2016 우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연극)>, 11쪽
참여자들이 동우의 곳간이 비어있는 이유를 생각해서 얼음조각상-움직이지 않는 신체 동작 표현-으로 표현하는 활동은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연극이라기보다는 ‘선행에 반대되는 행동’에 대한 참여자들의 생각을 알아보고 ‘합의’하기 위한 활동이다. 이 때 예술교육자들은 ‘선행이 무엇인지’알려주는 전통적인 의미의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가 되어서 참여자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바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게 조율하고 모두의 목소리가 나오도록 주위를 살핀다. 예술교육자들이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을 때, 참여자들은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생각하는 선행은 무엇이고, 무엇은 선행이 아닌지, 자신이 머리로만 아는 선행과 자신들의 입장(자리)에서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선행은 무엇인지, 어떤 장면을 어떻게 보여줘야 다른 관객-참여자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을지 고민과 연습을 거듭했다.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연극 만들기-보여주기 활동의 핵심은 참여자들의 ‘자발성’이다.
“연극놀이의 가장 큰 매력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해요. 즐겁고 재밌기 때문에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자발성을 가지고 움직이게 되고 스스로 움직임으로서 체험을 통해 살아있는 배움을 얻게 되는 것이지 싶어요. 그렇게 배운 것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지식을 얻게 되고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 연극놀이의 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이윤미 예술교육자
문화, 예술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묻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문화, 예술에는 목표보다 의미나 가치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따라 붙는다. 그런데 문화예술에 ‘교육’ 자를 붙여 문화예술교육이 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그것의 목표와 효과에 대해 궁금해 한다. 놀이도 마찬가지다. ‘목표’나 ‘효과’를 따질 때,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그러나 목표나 기대효과 없이 연극놀이를 말하기는 어렵다.
연극놀이는 “드라마 활동에 직접 참여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게 하고 참여자들의 전인적 성장을 꾀”하는 ‘교육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 <2016 우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연극)>, 9쪽
–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 <2016 우수 문화예술교육 전문가 교육프로그램 개발 연구(연극)>, 9쪽
그렇다면 연극놀이가 주는 ‘즐거움’은 교육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기만 할까? 워크숍을 마친 후 가진 인터뷰에서 세 명의 예술교육자는 모두 한 목소리로 “연극놀이 수업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업을 짤 때 가장 큰 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재미있는 수업’이라는 것이다. 연극놀이의 즐거움은 교육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자 연극놀이의 가장 큰 힘이며, 모든 연극놀이 수업의 목표이자 전제이다. 스스로 깨닫는 재미, 나와 다른 생각을 발견하고 수용하는 재미, 느낀 대로 생각한 대로 한 번 (연극) 해 보는 재미… 연극놀이에서 맛볼 수 있는 재미가 무궁무진하다. 오히려 즐겁지 않은 연극놀이 수업이 비슷한 교육 목표를 내세우는 도덕교과와 뭐가 다르냐고 반문해야 할 것이다.
무섭고도 고마운 염라대왕의 얼굴
“잠깐만요! 이 전동우가 그 전동우가 아니랍니다!”
수업의 막바지, 곳간이 텅텅 빈 동우에게 심판을 내리려는 염라대왕 앞에 저승사자가 막아선다. 실수로 사람을 잘못 데려왔다는 것이다. 동우는 이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곳간이 텅텅 비어서 이승으로 돌아가는 뱃삯을 지불할 수가 없다. 염라대왕은 동우에게 노잣돈을 빌려주는 대신 49일 안에 자기 곳간을 채워서 이 노잣돈을 갚으라고 엄포를 놓는다. 오늘 연극놀이 수업의 하이라이트다. 이승으로 돌아온 동우가 어떻게 해야 곳간에 쌀가마니가 쌓일까? 노자장부에 ‘正’자 스무 개를 무슨 수로 지운단 말인가? 참여자들은 모둠 별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는 동우의 모습을 연극 장면으로 만들어 발표했다.
좋은 일, 착한 일, 선행이란 무엇일까? 왜 착한 일을 해야 할까? 내가 지금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착한 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한 시간 반 남짓 진행된 <곳간 채우기 프로젝트> 연극놀이가 끝나고 초등학교 4, 5학년 참여자들이 둘러앉아 선행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잘못한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기, 몸이 불편한 친구 도와주기, 친구에게 지우개나 연필을 빌려주기, 정직하게 행동하기, 거짓말 하지 않기, 친구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초등학생의 눈높이에서 나올 수 있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노잣돈 갚기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나보다 친구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선행이라고 생각해요.”
-워크숍 참여자 양유진 (4학년)
내가, 그러니까, 동우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노잣돈을 빌려주고, 49일 안에 착한 일을 해서 노잣돈을 갚으라고 엄포를 놓은 염라대왕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런 것과 상관없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진짜 선행이라는 한 참여자의 말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그러고 보니 염라대왕은 나에게, 그러니까, 동우에게 그냥 무서운 얼굴이 아니다. 아무리 저승사자의 실수로 내가 저승에 왔다 해도 내 곳간이 텅텅 비어 이승으로 돌아갈 길이 막막할 때, 나에게 선뜻 노잣돈을 꾸어 준 고마운 얼굴이다. 염라대왕이 나에게 먼저[선(先)] 베풀어준 것을 내가 지금 갚는 것이다. 그러니까, 선행(善行)은 선행(先行)이다. 어쩌면 말장난 같은 이 말이 워크숍 참관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입 속에서 맴돌았다.
- 홍서연_서로연극연구소 대표
- 나만 하는 연극, 너만 하는 연극 보다 서로 하는 연극이 좋아서 서로연극연구소를 차렸다. <혜화에서 연극이 된 세계 놀이>, <꼬물꼬물 나의 탄생 여행> 등의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였으며, 2015년 국립극단의 작은 극장 큰 배우 프로젝트에 독립공연예술가로 참여하여 요세피네의 첫 번째 서로연극 <외양간 창문이 열려있지 뭐예요>를 올렸다. 다양한 환경에서 문화예술교육 실행가로, 교육가로, 독립공연예술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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