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백에 생각의 창을 내는 아이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어린이는 무엇을 믿는가 <어린이 예술작업실 담길>

박달재 터널을 주욱 밟고 나가 이윽고 터널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눈에 보이는 풍광에 가슴이 탁 트인다. 굽이굽이 산세에 둘러싸여 고요하고 점잖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은 마을, 백운면 평동마을의 첫인상을 마주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위의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것이다. 내 아버지의 고향, 나의 유년시절 행복한 추억들이 담뿍 담긴 곳에 ‘일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찾아가게 되다니. 제천에서 진행되는 ‘어린이 예술작업실 담길’ 프로그램 취재 제안이 너무나도 반가웠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상상하며 떨리는 마음과 아이들과 함께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궁금함이 혼재되어 기대감과 설렘은 점점 커져만 갔다.
자유롭게 넘나드는 놀이터
“머루! 나 이것 좀 들어줘!”
“솜, 이거 자르는 것 좀 도와주지 않을래?”
백운복지회관 앞, 350년이 된 느티나무 아래 위치한 공터에서는 이미 삼삼오오 몇몇 친구들이 모여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나무를 세워가며 저마다의 텐트를 세우기 위해 뚝딱거리고 있었고, 다른 몇몇 친구들은 남머루(이하 머루), 송민혜(이하 솜) 작가의 주변에 앉아 나무로, 털실로 각자가 만들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공터를 옹기종기 둘러싸며 세워진 텐트 앞에는 만든 아이의 이름과 함께 ‘아무개의 텐트, 신발을 벗고 들어오시오’라는 안내 문구가 팻말에 적혀 다소 귀엽고도 비장한 모양으로 주인 없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2시에 프로그램을 시작한다고 해서 사전에 인사도 드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눌 겸, 나름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럴싸한 구색을 갖춰 세워진 텐트들 사이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분주히 돕고 있는 운영스텝의 모습을 마주하고는 ‘내가 시작 시간을 잘못 체크했나?’ 하고 조금 당황했다. 운영스텝의 말에 따르면 대체로 프로그램 준비가 완료되는 시간은 1시 30분 전후 즈음인데 몇몇 아이들은 시작 전부터 공터에 모여 작가들과 운영스텝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머루 작가와 함께 깎고, 뚫고 사포질하며 나무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나무공장’, 다양한 천 재료와 여러 종류의 줄과 끈을 소재로 한 솜 작가의 ‘베틀집’, 간식을 먹으며 노닥거리기도 하고, 만화책도 보는 등 여러 딴 짓을 할 수 있는 ‘콩밭’, 물감과 크레용 등을 활용하여 자유롭게 칠하고 그리는 ‘물들어집’까지, 총 4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어린이 예술작업실 담길’ 프로그램은 아이들 스스로 자유롭게 섹션을 넘나들며 매주 나무와 천을 활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다양한 활동들을 유도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스스로를 믿는 아이들
그날그날 예술가들이 준비해 온 여러 종류의 만들 거리를 공터에 툭 하고 내려놓으면, 아이들은 주저 없이 머릿속에 그려온 무언가를, 혹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지는 무언가를 착착 완성해 나간다. 작가를 포함한 운영스텝, 그 누구도 ‘어른’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아이들의 사고방식으로 자유롭게 사유하고 그것을 실행해나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어른’의 역할이란, 말하자면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라며 방법을 지시하고 가르치는 ‘교사(敎師)’의 역할을 말하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어른’은 먼저 해 봄으로써 아이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할 때 손을 보태주는, 조수의 역할을 갖춘 ‘선생(先生)’이자 ‘친구’로서 존재한다. 스스로의 것을 만들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자세를 낮추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 결정에 힘을 실어주는 ‘어른’의 역할 덕분에 아이들은 자신의 결정을 진취적으로 실행하고 나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저는 여기 매주 왔어요. 지난번엔 형들이랑 나무로 창을 만들었어요. 그냥 우리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거예요. 머루가 그래도 된대요. 그걸로 내년 여름에 형들이랑 물고기를 잡기로 약속했어요. 이 텐트는 다 만들고 나면 옆면에 그림을 그릴 거고요, 앞에 계단도 만들 거예요. 다른 애들은 끈으로 묶고, 못으로 쳐냈는데 저는 글루건으로 고정시킬 거예요. 그렇게 해도 다 만들어져요.”
– 김용건 (참가자, 11살)
눈인사를 나누자마자 얼떨결에 텐트의 골조를 세우기 위해 나무와 나무를 글루건으로 고정시키는 일에 손을 보태게 된 나는, 재료를 가지고 진지하게 방법을 고민해가며 텐트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친구의 말에 또 한 번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해도 다 만들어진다’는 말에 ‘혹여나 고정이 덜되어 나중에 넘어지면 어쩌니, 다른 친구들처럼 못을 박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며 호들갑스럽게 조언을 한 내 모습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용건이의 말처럼 그렇게 하니, 정말 다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어른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틀, 그와 연관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지, 언제나 경계하고 조심하려고 해요.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놀라요. 공통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각각의 아이가 접근하는 독창적인 방식을 보며 항상 깨닫게 돼요. 아, 우리가 참 어렵게 생각하고 있구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구나.”
– 송민혜(솜) 작가
여덟 살 이다한 어린이는 솜 작가의 옆에 앉아 아까부터 계속 나뭇가지를 털실로 감고 있다.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나무가 겨울엔 추우니까 따뜻하게 해주려고” 답한다. 조그맣고 연약한 손끝으로 어떻게 저렇게 촘촘하게 감쌌는지, 형형색색 다채로운 색깔의 털실을 꼼꼼히 감아낸 솜씨에서 한겨울을 견뎌야 할 나뭇가지가 안타까운 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보인다. 그 마음이 나무에게로 전달되니 예쁜 털옷을 차려입은 세상에 하나뿐인 나뭇가지 작품이 되었다.
믿음이 만드는 여백과 놀이
어느덧 해는 슬슬 산 너머로 퇴근할 준비를 하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시작 전엔 네댓 명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는데 마무리가 될 때 즈음 주위를 둘러보니 다소 쌀쌀한 날씨임에도 열댓 명의 친구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나무를 깎고 털실을 만지고 나무 주위를 뛰어다니며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참여 계기는 꽤나 다양했다. 언니가 하는 것을 보고 따라온 아이, 우연히 할아버지 댁에 왔다가 또래들이 무언가를 하는 모습에 마음이 동해 참여하게 된 아이…. 어떤 아이들은 처음 만나는 사이인데도 쭈뼛쭈뼛 서로를 어색해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 하나 없이 함께 과자를 나눠 먹으며 콩밭에 앉아 하하호호 웃음꽃을 피운다. ‘누구라도 함께하면 즐거울 수 있어!’라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눈높이를 낮추고 자연스레 마음이 열릴 때를 기다리며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두 작가의 진심이 전달된 걸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공터 여기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는 그냥 거들뿐이지, 아이들이 알아서 다 잘해요. 다음엔 무엇을 할 것인지 아이들에게 생각해보라고 해요. 그럼 아이들이 일주일의 시간 동안 무엇을 만들지 생각하고 고민해서 오니까, 이제는 우리가 뭘 해보자고 이야기하면 싫어해요. 지금은 그냥 아이들의 방법을 구경해요. 아이들에게 의도를 가지고 제안을 하면 아이들은 언제나 그 틀을 깨버려요. 그리고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내요. 아이들에게 자꾸 재촉하고 만들자고 쫓아다니고 하지 않으니깐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가 어찌 보면 무언가를 그려낼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되고, 아이들은 그 여백에 놀이를 그려내게 되는 것 같아요.”
– 남머루(머루) 작가
10월부터 지금까지 야외에서 총 7번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단 한 번도 비를 맞은 적이 없다며, 이게 다 느티나무 할매의 보살핌 덕분이라고 했다. 그 덕에 프로그램의 분위기나 흐름이 끊기지 않았고,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공터가 편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남머루 작가의 시선 끝에는 아이들이 있다.
“우리 아이들이 프로그램 참여했을 때부터 함께해 왔어요. 이제 3주 남짓 남았다고 하는데, 아이들이 많이 허전해 할 것 같아요. 시골이라 널린 게 자연이라고 해도,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냥 보이는 어떤 것에 불과해요. 이런 경험들을 할 수가 없어요. 경험 하나하나가 아이를 성장시키는데 정말 중요한 요소인데…. 우리는 여기 살면서 참, 그런 것들이 필요했거든요.”
– 송수경 (다한&슬한 어머니)
어느덧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나무 카주(Kazoo)와 화살, 드림캐처 목걸이와 목도리 등을 두 손에 꼭 쥐고 간식을 기다리고 있다. 야외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작은 손들이 순식간에 냄비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니 냄비가 국물만 남은 채로 바글바글 끓고 있다. 여전히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은 먹고 끓이고 또 먹기를 반복하면서도 깔깔 웃느라 여념이 없다. 각자 먹은 자리를 알아서 정리하고 그릇을 들고 설거지를 하러 개수대로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제법 의젓하다. 정리가 끝난 후 아이들은 머루, 솜을 다시 한 번 부르며 “다음 토요일에 또 만나자. 다음에 또 만나.”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공터를 떠났다.
우리의 인생에서 교사(敎師)가 아닌 선생(先生)을 만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내 경험으로는 어른이 만든 규격화된 틀 안에 맞추기 급급해서 해야만 하는 대로 해내야만 했던 순간이 참 많았다. 그래서인지 오늘 만난 아이들이 내심 부러웠다. 아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그 자체를 존중하는 예술가를 만나 세상과 소통하는 자신만의 창문을 만들어내는 아이들, 예술가 친구를 만난 아이들의 미래지도는 앞으로 어떻게 그려질까.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오늘 만난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때의 나는 참 좋은 어른을 만났었지’하고 회상해주길, 아니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확신과, 앞으로도 아이들의 순수한 상상력과 엉뚱함을 공감하고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더욱더 확산되길 바라는 마음을 창문 밖 멀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어린이는 무엇을 믿는가>
‘어린이의 세계를 믿는다’라는 주제로, 예술가가 예술 작업을 토대로 8~13세 어린이들의 재미나고 엉뚱한 세계를 지지하고 존중하는 시각예술교육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정규프로그램으로 회화, 사진, 설치미술 등 5개의 프로그램이 전국 5개 지역(서울, 충북, 전북, 경남, 제주)에서 진행되며 각 프로그램별로 10월부터 8~10주에 걸쳐 운영된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어린이들은 예술가와 함께 자신이 믿고 있는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프로그램 종료 후에는 5개 프로그램별 지역 전시가 개최되고, 12월 17일(토)부터 서울 선유도공원 이야기관에서 전체 프로그램의 결과물을 모은 통합결과전시회 및 예술가별 소규모워크숍이 개최되어 올해 추진사업의 과정, 시간, 이야기 등을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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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어린이는 무엇을 믿는가’ 통합결과전시회 & 소규모 워크숍 안내
신지혜
신지혜
국문학을 전공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거쳐 문화예술협력네트워크 추진단에서 일하고 있다. 비정기적으로 혜화 일대에 배포되는 무가(쪽)지 [낙엽]을 발간하기도 한다.

jhnal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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