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과 동시에 찾아온 추위가 잠시 주춤하며 따스한 햇살에 자리를 내어준 11월 27일. 먼 길을 달려온 버스 한 대가 경상남도 거창군의 어느 시골마을 공터에 멈춰 선다. 한눈에도 알록달록 화려한 것이, 여느 평범한 버스와는 뭔가 다른 듯하다. 비단 외관만이 아니다. 의자를 떼어내고 방처럼 개조한 버스 내부는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은은한 조명, 온기가 도는 바닥,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정체불명의 소품들. 마침내 2시 정각이 되어 동네 초등학생 아이들 십여 명이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스에 올라타자, 오늘의 프로그램 ‘움직이는 예술정거장 – 문門 라이트’를 진행할 예술가 세 사람이 한 목소리로 그들을 반긴다.
“어린이 친구들, 예술버스에 오른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마음속 상상 세계를 여행한 다음 그것을 멋진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전시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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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버스 타고 겹겹의 마음속으로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농산어촌 이동형 문화예술교육으로, 내·외부를 전면 개조한 버스와 트럭, 선박 등을 이용해 전국 각지의 소외지역을 찾아다니면서 초등학생 아이들과 고령의 어르신들에게 양질의 문화예술 체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2012년 시범사업으로 시작된 후부터 지금까지 이 사업이 꾸준히 운영된 데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 예술가들과 예술강사들의 공이 컸다. 그들은 남다른 열정과 의욕으로 프로그램 기획부터 진행까지 책임졌고, 이는 참가자들의 높은 호응도와 만족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처럼 좋은 반응과 평가를 얻는 속에서 ‘찾아가는 예술교육’은 해마다 양적, 질적으로 성장해왔다.
올해가 저물어가는 11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거창 시골마을로 달려온 미술작가 강다영 씨는, 자신이 직접 기획한 ‘문門 라이트’로 지난 3년간 무수히 많은 아이들을 만나온 베테랑이다. 하나하나의 문을 열어젖힐 때마다 각기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비밀의 화원처럼, 겹겹이 포개진 사람의 마음도 갈피마다 다른 세계를 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됐다는 이 프로그램에 대해, 그이는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짧은 안내를 덧붙였다.
“여러분 마음 안에 다섯 개의 문이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하나의 문을 열면 또 하나의 문이 나타나고, 그 문을 열면 또 다른 문이 나타나요. 그럼 문과 문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신비롭고 재미난 세상이 있지 않을까요? 바로 그 상상의 세계를 다섯 장의 그림으로 표현해보는 거예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마음 속 여행. 그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이들의 눈동자가 서서히 부풀어 오를 무렵, 이번에는 그 여행을 도와줄 도구가 하나씩 제공된다. 원하는 것을 전부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요술봉’부터 길고 날카로운 ‘마녀의 손톱’까지, 재미나거나 혹은 무시무시한 소품들이 가득한 상자 안에서 자기만의 초능력을 ‘득템’한 아이들은 저마다 흥분하여 환호성을 질러댄다. 그러나 소란하고 들뜬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책상 위에 놓인 갖가지 색깔의 종이와 펜 앞에서 아이들이 입을 다물고 쓱싹쓱싹 그림 그리는 데만 몰두하기 시작한 것.
한눈에도 개구쟁이로 보이는 어느 남자아이는 첫 번째 종이 위에 돌고래와 토끼와 뱀이 한 데 모여 사는 동물원을, 두 번째와 세 번째 종이에는 엽기적인 만화 캐릭터와 날름거리는 괴물의 혀를 그려 넣는다. 또한 그 옆에서 조용히 사색에 잠겨 있던 아이의 손끝에서는 기다란 팔다리와 큰 외눈을 지닌 요괴의 성(城)이 탄생한다. 그런가 하면 좁은 집에 갇혀 살려 달라 울고 있는 거인을 구출하는 데 온통 마음을 빼앗긴 여자아이도 있다.
그림을 모두 완성하고 나면 이제 칼질을 할 차례. 다칠 위험이 없는 세라믹 칼을 이용하여 아이들은 방금 전 자기가 그린 그림들에 문을 낸다. 칼을 잘못 놀려 종이가 찢어지거나 그림이 훼손되면 그것을 창조한 자신의 마음에도 상처가 난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칼을 쥔 아이들의 태도가 사뭇 진지하고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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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문 열어 소통해요”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다섯 장의 그림을 순서대로 세우고 난 뒤, 아이들은 각각의 그림에 이야기를 써 붙이는 작업을 한다. 상상 속 그림인 만큼 그에 맞추어 풀어내는 이야기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엔 학교와 학원을 시계추처럼 오가며 과도한 시험과 경쟁에 시달리는 아이는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일등과 꼴등, 모범생과 사고뭉치, 왕따 가해자와 피해자 따위의 구별도 없다. 대신 요리 재료를 구하기 위해 빗자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마녀나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와 푸르고 너른 바다를 향해 헤엄쳐가는 오리들이 등장한다. 먹을수록 나이가 어려지는 피자와 살이 빠지는 초콜릿으로 가득한 냉장고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어떤 것은 사랑스럽고 어떤 것은 기괴하며, 또 어떤 것은 경쾌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캐릭터와 이야기에 아이들의 마음이 녹아 있다는 것, 그래서 버릴 게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마음을 ‘그림’과 ‘이야기’라는 작품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아이들 앞에는 이제 거쳐야 할 단 하나의 과정만이 남아 있다. 그것은 나의 작품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또 남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마음 세계의 문을 열어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는 게 예술가가 되어가는 마지막 순서라 할까? 이를 위해 아이들은 준비된 사각형 판을 이용하여 전시대를 만들기 시작한다. 예닐곱 개의 판을 이리저리 끼워 맞추다 맘에 안 들면 다시 풀고 조립하길 여러 번. 마침내 모든 아이들이 크기도 높이도 제각각인 ‘자기만의 전시대’를 완성하여 각자의 작품을 올려놓는다. 그 위에 다양한 색깔의 조명을 드리운 뒤 버스 내부의 전깃불을 끄니, 다른 사물들이 전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반면 아이들의 작품만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마치 이제껏 보이지 않던 마음에 작은 불씨가 던져져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이 프로그램의 제목이 왜 ‘문門 라이트(Light)’인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다.
“자, 이제 한 명씩 나와서 자기 작품을 설명해볼까요? 나머지 사람들은 눈과 귀를 활짝 열어서 그 친구가 표현한 마음 세계를 잘 보고 잘 듣도록 해요.”
강다영 예술강사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하나하나의 작품을 둘러보는 아이들의 둥근 머리 위에도 빛이 머문다. 그 밝음 속에서, 자신의 그림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읽어주는 아이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나고, 다른 친구의 그림을 감상하며 이야기를 경청하는 아이의 표정은 한없이 다정해진다. 그들은 또한 어느 순간 다함께 공포의 비명을 지르거나 동시에 큰 웃음을 터뜨리면서, 그렇게 온몸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특별한 씨앗 하나를 품고 간 아이들
초겨울 짧은 해가 서쪽하늘 끄트머리에 걸릴 즈음. 프로그램이 끝나고 버스에서 내릴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짧은 소감문을 남기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한다. 한 여자아이의 어깨 너머로 들여다본 종이 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오늘은 전에 없던 특별한 토요일이었어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우르르 몰려나간 아이들이 신발을 꿰차고 달음박질치는 길 너머, 어두워진 하늘에 주홍색 저녁놀이 옅게 번져간다. 오늘 하루 ‘움직이는 예술정거장’과 함께한 아이들의 마음에도 저렇게 고운 물이 들었으면 싶다. 그 또한 언젠가는 희미해지겠지만 뭐 어떤가. ‘마음밭’에 뿌려진 특별한 경험의 씨앗이 이제 곧 뿌리를 내려 무럭무럭 커갈 테니. 그리하여 아이들이 성장하는 내내 때론 향기롭고 때론 서늘한 그늘이 되어줄 테니.
움직이는 예술정거장
지역 간 문화격자 해소를 위하여, 평소에 문화예술을 접하기 어려운 지역 현장을 예술가가 직접 방문하여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사업이다. 올해에는 문화예술교육 체험공간으로 내·외부를 개조한 ‘예술버스’, ‘예술트럭’ 병원선과 연계한 ‘예술선’이 경기·강원·충청·경상·전라지역의 경로당, 분교, 아동복지시설 등을 찾아간다. 예술버스가 방문한 지역의 주민들은 이색적으로 꾸며진 예술버스 안에서 예술가들과 함께 미술, 공예, 무용 등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 활동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올해부터는 전남지역의 섬마을 주민들을 위해 전남도청이 섬마을 주민들에게 의료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해 운영 중인 병원선과 연계해, 마음의 건강도 함께 유지할 수 있도록 문화예술 체험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2012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진행된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은 2013년 120회, 2014년 200회의 프로그램을 진행했으며, 올해는 연말까지 130회의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움직이는 예술정거장 홈페이지 바로가기

박미숙
박미숙 _ 칼럼니스트
이따금 글 쓰고 책 만드는 사람. 나머지 시간엔 햇살 좋은 마당에 빨래를 널거나, 길고양이들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동네 뒷길을 산책하거나, 요즘같이 추울 땐 땔감을 모아 아궁이에 불 지피는 재미로 살아간다.
jayam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