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개인의 예술인가, 혹은 공적 사안인가? 영화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 참으로 고색창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한때 이러한 질문은 영화를 보는 사람들, 혹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치열하게 영화를 보고 만들고 논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는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예술로서의 영화, 혹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영화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영화는 상품”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에 대답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자신의 역사 속에서 영화는 작가적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로서의 가능성과 사회 개조의 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을 모두 보여주었지만, 이제 그러한 질문은 낡디 낡은 것이 되었다. 한국에서도 그것은 최소한 10여 년 전에 이미 창고 구석에 처박힌 질문이자 기억이 되었다.

  • 시네마, 퍼블릭 어페어
<시네마, 퍼블릭 어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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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때로 이러한 잊혀진 질문을 매우 생생하게 환기시키는 영화들이 있다. 유령처럼 홀연히 출현하는 이 영화들은 너무도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등장해서, 자신이 제기한 질문을 순식간에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로 소생시킨다. 러시아 출신 감독 타티아나 브란트루프의 <시네마, 퍼블릭어페어(Cinema, A Public Affair)>가 그런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89년 소비에트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 건립된 모스크바 박물관과 시네마테크 ‘뮤제이 키노(Musey Kino)’의 명멸과, 이 영화 박물관을 러시아 최고의 지적 토론의 장으로 만든 박물관장 나움 클레이만의 해고를 둘러싼 이야기이다. 모스크바의 시네마테크가 러시아 시민들에게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정부와 마찰을 겪으면서도 영화인들은 왜 그렇게 고된 영화상영 운동을 계속하려 했는지, 그러한 노력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지 영화는 우리의 귀에 속삭이듯 들려준다. 소비에트 개혁, 개방의 물결 속에 1989년 설립된 모스크바 영화박물관은 그동안 금지되어온 세계고전영화와 소련 영화를 상영해온 공간이다. 이곳에서 러시아 시민들은 오랜 기간 금지된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의 예술적, 사회적,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고 토론해 왔다. 그러나 2005년 국가는 박물관을 폐쇄한다. 터전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나움 클레이만과 그의 동료들은 근 10년간 프로그램을 직접 짜고 모스크바 상영관 곳곳으로 필름을 들고 가 상영과 토론을 조직하면서 시민들의 아고라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서 박물관이 폐쇄되는 시기가 푸틴 집권기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푸틴 정부는 2014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나움 클라이만을 해고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을 새로운 박물관장으로 임명한다. 정부 결정에 맞선 전 세계 영화인들의 항의와 동료들의 총사퇴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뒤집히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것은 나움 클라이먼이 스스로 사표를 내면서도 동조 사퇴하려는 동료들에게 힘들더라도 여기에 남아 이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설득한다는 점이다. 나움 클라이만과 그의 동료들이 그렇게 힘겹게 지키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절대로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도덕을 주입하거나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 기술에 대해 교육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단지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영화를 제공하고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 그들은 그것이 영화 박물관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다양한 집단과 세대가 영화라는 꿈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대 간 단절을 극복하고, 분열과 적대를 조장하는 현실 정치에 맞서 공통의 역사의식을 공유하고 연대를 꿈꿀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세계를 탐구하는 나침반으로서 ‘영화예술’의 존재가치를 이해했고, 그러한 영화예술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임무라 보았던 것이다. 나움 클라이만이 영화의 매력에 눈을 뜬 계기가 다른 영화가 아닌 <바그다드에서 온 도둑>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현실과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것, 상상력을 허용하는 것, 다른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하는 것. 그게 바로 영화예술의 효용이라는 것.

  • 척 노리스 vs 코뮤니즘
<척 노리스 vs 코뮤니즘(Chuck Norris vs Commu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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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옛 동구권에서 온 또 다른 영화 한편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마니아 감독 일링카 칼루가루누(Ilinca Calugareanu)의 <척 노리스 vs 코뮤니즘>이라는 영화다. 감독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1989년 루마니아 혁명의 시기를 배경으로, 하찮은 쥐 한 마리가 단단한 벽에 구멍을 내듯이, 척 노리스라는 할리우드 액션영웅으로 대변되는 서구의 자유로운 문화가 니콜라이 차우세스쿠라는 독재자의 거대한 아성을 무너트리는 동력이 되었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어린 시절 그녀는 다른 많은 루마니아 시민들처럼 매일 밤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진행된 비디오 상영회에 참석했고 그것은 숨 막히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되어 주었다. 섬세한 재연은 당시 밀회와도 같았던 비디오 상영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살려주고, 시종일관 호기심과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는 영화는 예술은 칼보다 강하다는 것을 풍성한 영화 언어로 보여준다.

  • 터키 시네마
<터키 시네마, 리메이크에서 포르노까지(Remake, Remix, Rip-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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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해 보자. 표현의 자유가 철저하게 억압된 사회에서 감시를 피해 본 수많은 영화들이 자신들의 통제 사회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자유와 문화를 맛보게 해주었고, 이렇게 켜켜이 쌓인 문화적, 집단적 경험은 결국 수십 년 지속된 독재자의 철권통치를 종식시키는 밀알이 되었다. 당신은 동의하는가? 영화라는 대중문화가 견고한 철의 장막을 무너트리는 혁명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혁명의 원인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그렇다, 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관객마저도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만든다. 아마도 영화에 내장된 이러한 힘과 가능성이야말로 억압적인 국가의 정부들이 그토록 영화를 검열하고, 시민들로부터 예민하고 지적인 영화들을 떼어놓으려 했던 이유일 것이다. 내친 김에 <터키 시네마, 리메이크에서 포르노까지>라는 터키 영화를 한편 더 언급하자. 같은 맥락에서다. 비록 할리우드 영화의 뻔뻔한 베끼기였지만, 열악한 조건 속에서 터키 영화인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상상력을 펼쳐 왔다. 그것이 검열이라는 압력과 만나 어떻게 좌절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흥미롭게 보여준다. 우연히, 구 동구권영화, 그리고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터키의 영화를 연달아 언급했지만, 사실 이 영화를 본 한국 관객들의 공통적인 지적은 이 영화들이 한결같이 일종의 기시감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사회 역시, 이 억압적인 사회들이 현재 앓고 있는 문제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징후일지 모른다. <시네마, 퍼블릭 어페어>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움 클라이먼이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한 채 했던 말로 이 글의 마무리를 대신할까 한다. “모세 11계-두려워하지 마라.” 무엇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인가? 대답은 당신의 몫이다.

맹수진 _ 영화평론가
맹수진 _ 영화평론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고, 2013년에는 DMZ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2015년에는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를 역임했다.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 한국독립영화협회 운영위원 등의 활동을 통해 한국독립영화의 미학에 대해 고민해 왔다. 평론 및 대학 강의활동을 통해 한국 독립영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며, 저서 『진실 혹은 허구, 경계에 선 다큐멘터리』(소도출판)와 역서 『모크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큐멘터리』(커뮤니케이션북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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