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최영애(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오사카 간사이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또 기차로 갈아타고 도착한 히메지(姬路) 시는 한눈에도 소박함을 엿볼 수 있었다. 히메지 시의 상징인 히메지 성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지정된 세계문화유산으로 히메지 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도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은 우리 일행은 긴 여정에 지쳤음에도 불구하고 히메지 성으로 향하였다. 밤 불빛에 하얀 자태를 뽐내던 모습은 우리 일행의 마음속에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새겨졌다. 우리는 첫날 히메지 시 호텔에 묵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일행은 효고현립(兵庫縣立) 아동관을 향해 출발했다. 짙은 초록의 낮은 산과 호수에 둘러싸인 나지막한 아동관은 콘크리트의 회색빛을 그대로 살린 건물이었다. 이건물이 과연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도 다다오(安藤忠雄)가 디자인한 공간일까 하는 의구심과 무엇이 이토록 평범해 보이는 건물을 유명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기대감이 교차했다. 우리 일행을 맞이한 마유미 아리모토(眞有美有本) 아동관 관장을 비롯한 관계자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의 통로는 온통 미로와도 같았고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염려하며 일행을 부지런히 뒤쫓아야 했다. 이렇게 미로처럼 설계한 것은 어린이들에게 이 길을 따라가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재미와 호기심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어른과 어린이의 관점이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체험한 순간이었다. 관장실로 들어간 우리는 준비된 자료를 받고 영상자료를 보면서 관장의 긴 설명을 들었다.
아이들의 상상과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
아름다운 산과 호수를 배경으로 한 아동관은 배 모양으로 만들어진 건물로 ‘아이들을 배에 태워 세계를 향해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안에서 보면 높은 천장과 통유리로 시원스럽게 낸 큰 창문이 아름다운 자연을 비추고 있었다. 밖에서 보던 무색 건물의 밋밋한 느낌은 사라지고 창 너머로 보이는 잔디 위의 조각들은 신선함을 더해주었다. 그 조각들은 어린이들의 그림을 예술가들이 조각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선의 형태와 색깔에서 아이다움을 엿볼 수 있었다. 어린이의 상상과 어른의 기술이 하나가 된 예술세계는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이곳의 모든 조각들과 미술, 전시, 공연 등은 건축가, 미술가, 연극인으로 구성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관리,운영된다고 한다. 아동관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의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색, 무음이 아동관의 전략이며 어린이들의 상상과 생각으로 색깔을 입히고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의도했다는 것이다. 환경교육의 일환으로 시설 안에는 식당도 자동판매기도 쓰레기통도 없었다. 점심은 각자 집에서 준비해오고 아동관에서는 물만 제공하며 쓰레기는 되가져 가도록 하였다.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환경교육을 실감나게 했다.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지역에서 아이들을 키우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아동관은 히메지 시에서 부지(8만 2천 평)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아이, 부모, 교사를 교육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17년 전에 건축되었다(약 100만 평의 3층 건물). 예전에는 조부모에게서 자연스럽게 전수되던 전통문화예술교육이 전후시대에 점차 핵가족화 되면서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고, 어린이들이 물질만능의 시대 속에서 받는 것에만 익숙해져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이 떨어지게 되었다. 이에 지역사회에서 나서서 어린이를 양육하고 부모를 교육시키는 운동에 나서게 된 것이 효고현립 아동관의 설립 배경이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공간은 무료입장이다. 돈 한 푼 없이도 하루 종일 신나고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효고현립 아동관이다. 아동관 운영에 드는 막대한 경비는 모두 시에서 제공한다. 아동관의 기본개념을 살펴보면
1) 어린이들의 건전한 성장을 유도한다. 출산율의 저하로 양육에 대한 엄마들의 경험이 부족하며 이를 보완할 수 있도록 보육을 도와준다.
2) 표현, 창작, 독서 활동을 통해 자율성을 기르도록 도와준다.
3) 어린이들이 자연을 몸으로 느끼고 직접 체험한 것을 표현하도록 도와준다.
4)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발상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교육보다 아이들이 있을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
5) 어린이들의 국제교류를 통해 일본의 예술분야를 소개하고 세계 어린이들의 회화를 모집하여 그림전시를 한다.
등이다.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발상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교육의 장소로서보다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는 장소로서 역할을 한다는 점이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 과연 이런 식의 공간이 가능할까? 어린이가 걷기도 전에 날기를 원하는 한국 부모들의 열성과 극성을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까? 일본인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며 그들의 슬기로움에 놀라웠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체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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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의 자유로운 발상과 표현을 위한 나무놀이 공간 |
아동관 건물의 특징은 모든 공간이 공연장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어디서든지 공연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긴 벽, 계단, 기둥 사이, 실내공간이 공연장으로 쉽게 바뀔 수 있었다. 건물 안에는 나무놀이 공간, 기획 전시실, 원형극장, 도서실, 악기실, 공작실의 영역이 나뉘어져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각 영역을 충분히 돌아보고 프로그램에 참여도 하고 싶었으나 시간에 쫓겨 바쁘게 순회했다. 우리가 방문한 시간은 평일인데다 점심시간까지 겹쳐 실제 수업이 진행되거나 행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시설을 돌아보고 설명을 듣고 자료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각 영역의 특징을 간단히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 기획전시실: 책 속의 세계를 올가미와 숲 속 배경 등을 이용해 전시하고 있었으며, 작품전시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골판지와 색종이로 만든 아테네 올림픽이 전시 중이었다. 그밖에도 3세부터 고등학생까지 참여하여 만든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 중이었다.
? 도서실: 4만 5천여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으며, 중학생들이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림책을 이용하여 인형극을 할 수 있도록 작은 규모의 액자형 이동 무대가 있었다. 또한 어린이들이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껏 상상의 세계에 젖어들 수 있는 이야기 방도 따로 있었다. 이 작은 방은 촛불을 켠 채 이야기를 들으며 마법의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부모들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 실습실: 재활용을 기본으로 하는 재료들이 설명서와 함께 비치되어 있었지만, 원하는 만들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정말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나는 창의성이라고나 할까. 기발한 아이디어와 자유로운 사고의 조합을 즐겁게 볼 수 있었다. 1엔을 받고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재료들도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 원형극장: 관객 22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로 네 계단의 객석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여섯 개의 입구가 있었다. 무대와 객석의 일부를 원하는 높이로 각기 다르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필요에 따라 다양한 무대 형태를 만들 수 있도록 설치하였다. 순식간에 원형무대에서 삼면 무대, 프로시니엄 무대(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고 액자틀처럼 무대를 보여주는 형태)로 바뀌는 것을 보면서 테크놀로지의 위력을 실감했고, 극장의 경제성과 효용성에 대한 세심한 배려에 감탄했다.
? 목공실: 본 건물과 떨어진 곳에 별관처럼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고도의 숙련을 필요로 하는 공작기계와 기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기계 사용법 및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장인도 만날 수 있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기계사용의 위험성에 대해 묻자 그곳에서의 교육은 위험한 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어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작실은 아빠와 어린이가 함께 물건을 만들어보는 교육장으로 참여자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특히 방학 때는 학교에서 할 수 없는 체험학습 숙제를 하기 위해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공작실이 비어 있는 시간이 없다고 한다. 공작실에서 사용하는 재료는 주로 대나무인데, 대나무는 효고현의 특산품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청소년들이 공연 발표를 할 수 있는 야외극장과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숲이 자리하고 있었다. 숲에서는 호수를 이용한 물고기 잡기, 대나무로 막대기 만들기, 막대기에 끼운 물고기를 불에 구워 먹기 등의 자연체험, 자연관찰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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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만든 학생들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
전통과 창의성에 중점을 둔 교육 프로그램
아동관에서의 교육은 0세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연령에 따라 같은 주제를 다르게 체험하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고, 영역 간의 자연스런 연계를 프로그램화하기도 한다. 아동관을 찾는 어린이와 부모는 효고현에 사는 이들뿐만이 아니다. 일본의 다른 지역은 물론 외국에서도 찾아오는데 관람자 수가 연간 33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아동관에는 운영위원회가 있으며, 개념을 조사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수업을 개발하고 실제반응을 분석하는 연구위원회 및 다른 위원회가 그 아래 속해 있다. 아동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일본 전통공예와 문화를 전수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을 발상해내고, 발견하고, 창작하는 것이다.
전자의 예는 일본 전통 연 만들기를 들 수 있는데, 그 지역의 장인에게 직접 연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잔디에서 실제로 연을 날려보는 것이다. ‘오다이고(大太鼓)’라는 일본 전통 큰 북 치기 수업도 있는데 이 수업에서는 어린이들이 스스로 발표할 수 있도록 20시간을 지도한다.
후자의 예로는 시 낭독, 창작 이야기 낭독, 이야기 책 만들기, 인형극, 연극발표 등이 있는데 어린이들의 자발적인 표현과 의사소통 능력을 개발하도록 돕는다. 청소년들로 이루어진 자체 극단 ‘야카타’도 운영한다. 특히 방학기간 중 중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연습과 공연은 청소년들에게 몸으로 표현하는 능력,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 함께 작업하는 능력을 발달시킨다. 매년 6월이 되면 연극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양성강좌가 열려 이 과정을 마친 자원봉사자들은 7월 말부터 한 달간 학생들의 공연연습을 돕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아동관 운영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자원봉사자들이다. 아동관에서 운영되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이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데, 매년 35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아동관의 정규 직원은 14명이며 비상근 직원은 33명 (수업담당 10명, 운영 23명)이 근무한다. 자원봉사자의 선별기준은 양육에 대한 생각과 경험인데, 무엇보다도 양육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한다.
삼대가 함께하는 공간을 꿈꾸며
이외에도 효고현립 아동관은 학교교육과 지역사회와의 연계를 모색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이들과의 상호교류를 통한 ‘아이 키우기’를 지원한다. 또한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상담 프로그램과 아빠의 양육 참가를 유도하는 가정교육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양육에 관한 다양한 시도와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 아동관장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부모만이 아니라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다각적인 방법을 구상 중이라고 하면서 삼대가 함께할 수 있는 만남의 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새삼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되새겨보며 우리나라에 필요한 어린이 공간은 어떤 철학을 담아내는 곳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어린이들이 삶을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 창조의 공간이 머지않아 세워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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