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인도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National Bal Bhavan)

글_최도인(메타기획컨설팅 책임컨설턴트)

본 원고는 ‘어린이 문화예술교육 공간 운영 및 구축방안 연구’의 일환으로 인도의 국립 어린이 문화교육기관인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National Bal Bhavan)를 방문한 기록을 담고 있다.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는 단순히 하나의 기관이 아니라 어린이를 위한 국가적 문화교육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 만큼 큰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내년이면 50주년을 맞이한다. 역사가 깊은 만큼 공간이나 시설은 다양한 시대의 스펙트럼을 보여주지만, 그 이념과 철학은 매우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다. 3일간의 짧은 여정으로 50년 역사의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를 제대로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여정의 기록을 상세히 남기는 것으로 대신 하겠다.

#1. 꿈의 공간에서 네루와 조우하다_ 2005.6.7 09:00

반세기의 역사를 갖고 있는 인도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는
하나의 기관이라기보다는 어린이를 위한 국가적 문화교육 시스템이다


호텔에서 델리의 북부지역에 있는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근방에 ITO(국세청)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방문 첫째 날인 월요일은 쉬는 날이어서 한가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이 기관의 책임자인 마두 판트(Dr. Madhu Pant) 여사를 만나 인터뷰를 하기로 하고,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 센터를 잠깐 둘러보았다.
이 공간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오래되고 낡은’ 공원의 이미지였다. 진입로에는 우리나라의 어린이 대공원에서나 볼 수 있는 미니열차의 레일, 새장, 동물 우리 같은 것들이 보였다. 중앙에 큰 잔디 운동장이 있었고, 운동장 너머에는 우리나라 대학로에 있는 문예회관처럼 벽돌로 지어진 복합건물이 위치해 있었다. 나중에 공간 전체를 차분히 둘러보면서 안 사실이지만, 이곳은 중앙 운동장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각종 교육과 워크숍이 벌어지는 소규모 다목적 공간, 체육관, 기숙사, 도서관, 오디토리움, 어린이 박물관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센터의 건축물들은 제각기 지어진 연도가 달라 1960년대와 1990년대의 모습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 공간에서 세월의 무게만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 2003년 어린이 날(인도는 11월 14일이 어린이 날이라고 한다)과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만든 2장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중 한 장은 링컨이 아들의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포스터였고, 다른 한 장은 ‘어린이문화교육센터 – 네루 수상의 비전(Bal Bhavan – A Vision of Pt. Nehru)’이라는 글을 담은 포스터였다(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는 인도의 첫 번째 수상인 네루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그는 어린이문화교육센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노래하고 싶고 춤을 추고 싶다. 나의 창의성이 발휘될 기회가 있는가?
나는 다양하고 풍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과 매체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내 자신의 신문을 만들고 싶다. 어린 기자를 위한 공간이 있는가? 열린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는 공간이 있는가?
어린이문화교육센터로 오라. 너희를 위한 꿈의 공간, 네가 스스로 설 수 있는…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는 1956년 델리 시 터크만 게이트(Turkman Gate)의 작은 오두막에서 시작되었다. 인도에는 아직까지도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어린이의 비율이 10% 정도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을 상상해보면, 당시 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학교에 다니지 않는 많은 어린이들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는 것이었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어린이문화교육센터에서는 학교 수업이 이루어지는 오전 시간 동안 학교에 다니지 않는 학생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네루 수상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학생의 표현 기회가 박탈되는 근대적 학교 교육시스템에서 -아마 영국의 지배 하에 형성된 근대 교육의 영향으로 보인다- 숨통을 트이게 하는 새로운 문화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나는 네루 전 수상의 글과 어린이 문화교육센터의 과업, 비전, 교육 방법론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창의성(Creativity)’이라는 말이 현재 과연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나는 이 질문을 판트 여사에게 몇 차례 반복해서 다른 각도로 물어보았다. 그녀의 대답은 맨 마지막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이사장 집무실에서 판트 여사를 기다리며 전 이사장들의 명단을 보다가, 국립 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초대 이사장과 5대 이사장이 바로 인디라 간디 전 수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인도에서는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 프로젝트가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2. 소외된 지역의 아이들을 보듬는 어린이문화교육센터 지부(Bal Bhavan Kendras)_ 2005.6.7 11:00

지역의 초등학교와 연계하여 운영하는 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지부는 소외된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판트 여사와의 첫 번째 인터뷰 후에 우리는 델리 북부에 있는 지부로 안내되었다. 어린이 문화교육센터는 문화공간이라기보다는 인도의 어린이 문화교육 정책이 학교교육과 연계하여 발현되는 시스템에 가깝다. 인도에 모두 73개의 주 단위 어린이문화교육센터가 있으며, 델리에만 모두 52개의 지부가 운영되고 있다. 지역 초등학교와 연계하여 운영하고 있다는 어린이 문화교육센터의 지부는 우리가 이번 조사에서 주목한 대상 중 하나였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약 40분 정도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니 매우 낙후된 시장 골목을 지나 초등학교가 보였다. 우리가 지부 담당 선생님과 함께 학교에 들어가자 약 200여 명의 학생들이 주변으로 모여들어 악수를 청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방학 중이었지만, 많은 수의 아이들이 학교에 나와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을 지나 작은 창고와 같은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어린이문화교육센터 지부였다.
평상시 그곳에는 미술, 음악(또는 무용) 담당 선생님이 두 명 정도 중앙에서 파견되고 있으며, 방학 중에는 학교로 밀려드는 아이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다섯 명 정도가 더 충원되었다고 한다. 매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아이들은 매우 즐겁게 그림 그리기, 공예, 전통무용 배우기 등의 프로그램을 선생님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학기 중에는 학교의 정교사 선생님들과 협력하여 이러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고 한다. 나에게 이곳 지부의 모습은 환경적으로 열악한 도시 외곽 지역의 학교가 어린이들에게 제공하는 최소한의 문화적 장치로 보였다. 그리고 이곳 어린이들의 낯선 사람들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방문 일정 중 매우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된다.

#3. 교사들의 배움터, 국립인력양성센터(National Training Resource Center)_ 2005.6.7 14:00

국립인력양성센터는 창의성에 기반을 둔 통합교육을 위한 교사 재교육을 담당한다


어린이 프로그램이 쉬는 월요일,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인력양성센터에서는 학교 교사를 위한 워크숍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 프로그램의 담당자와 인사를 나눈 뒤, 그룹별로 발표 준비를 하고 있는 교사들과 만났다. 각 팀에서는 인도의 환경문제를 다루는 음악극, 사회성 짙은 연극 등을 준비하고 있었다. 음악 교사로 보이는 선생님이 같은 동료 교사들에게 노래를 지도하고 있었고, 시나리오를 계속 수정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모두 30여 명의 교사가 21일 일정으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인도 전역에서 본 프로그램에 참여를 원하는 학교에서 파견된 교사들이다. 각 학교는 미술과목 1명, 공연과목 1명, 주제과목 교사라고 불리는 사회나 언어 교사 1명으로 구성되는데, 이처럼 창의성에 밑바탕을 둔 통합교육을 실현하는 데 있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교사의 수를 적절하게 배분하는 것을 볼 때 매우 세심한 방법론이 작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4. 10가지 활동들이 펼쳐지는 하나의 공간 – 수많은 어린이들이 있는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_ 2005.6.8 09:00
다음날 아침, 우리는 다시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로 갔다. 그곳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가 매우 밝은 얼굴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다람쥐 새끼를 어디서 주웠는지 공책 위에 놓고 유심히 보고 있었고, 우리에게 다가와 어디에서 왔냐고 말을 거는 아이들도 있었다.
판트 여사와 함께 오늘 하루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야외 집회장을 방문하였다. 아마도 오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이, 교사, 자원봉사자 모두가 모인 듯 하였다. 정확히 수를 세지는 못하였지만, 전해 듣기로는 약 800명 정도의 어린이들이 하루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들 모두가 모여 노래도 함께 부르고, 새로 오신 선생님, 새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을 알리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판트 여사의 배려로 대한민국에서 온 우리들을 참석자들에게 알리는 시간도 있었다. 집회장에서 내가 판트 여사에게 매우 영적인 분위기인 것 같다.고 했더니, 여사는 고개를 저으며 단지 시작의 기쁨을 나누는 자리라고 답하였다.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야외집회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작의 기쁨을 나누었다


약 30분간의 집회가 끝나고 어린이들은 제각기 신청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하여 각각의 공간으로 이동하였고, 우리는 두 명의 대학생 자원봉사자를 따라 프로그램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하나하나 탐방하기 시작하였다.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어린이 프로그램은 모두 10가지의 섹션 – 창조적인 예술, 통합 활동, 공연 예술, 사진, 신체 교육, 가정 관리, 박물관 클럽, 출판관련 활동, 도서관/독서 활동, 과학 활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들은 하루에 모두 세 개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데, 도서관/독서 활동은 필수이며 나머지 두 개의 프로그램은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한다. 개별적인 활동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예술교육 활동과 매우 유사한 점을 보이고 있으나, 특징적인 것은 이 모든 프로그램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동시에 펼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 문화교육 만물상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모든 프로그램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거쳐 어린이박물관에 도달하기까지는 약 두 시간이 걸렸다.

#5. ‘창의성’이라는 수수께끼 풀기
이제 드디어 앞에서 언급했던 ‘창의성’에 대한 나의 궁금증과 판트 여사와의 대화 내용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어린이문화교육센터를 처음 접하고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창의성’이라는 말이었다. 거의 모든 자료에 ‘어린이의 창의성 향상’, ‘모든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데 있어 창의적 방법론으로 접근’, ‘창조적인 환경’ 등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의 철학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의 질문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상대가 생각하지 않을 경우 자칫 상대를 테스트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두 번에 걸쳐 판트 여사에게 ‘창의성’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다. 첫 번째로, 나는 조심스럽게 ‘방법론’에 관한 질문을 꺼냈다.

문: 어린이문화교육센터의 홈페이지를 보면 창의적인 방법론, 창의적인 접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해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답: 우리 기관의 선생님들은 미술, 음악, 과학, 문학 등 매우 다양한 분야를 전공하였으며, 이들이 서로 협력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존의 단일한 분야,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통합적인 협력 작업을 통하여 어린이를 위한 새로운 주제를 찾아내고 이를 프로그램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의적인 접근의 사례라고 할 수 있죠.

두 번째 질문은 판트 여사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점심식사 때였다.

문: 당신이 생각하는 창의성이란 무엇인가요? 특히 창의성이 어린이 교육의 핵심 이념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참 어려운 질문이죠. 제가 생각하는 창의성이란 스스로를 표현할 줄 아는 것이며, 이를 통하여 남과 소통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 안에서 사회적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표현의 도구는 글이기도 하며, 음악이기도 하며, 몸짓이기도 하지요.

‘창의성’과 ‘사회적 의무’. 서로 매우 커다란 간극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되지만, 판트 여사의 말에는 매우 힘이 담겨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창의성이라는 개념조차 남과 비교하는 경쟁력의 요소나 대상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 국립어린이문화교육센터를 가까이에서 보며 나에게 남겨진 것 하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린이의 문화를 염려하는 한 국가 지도자의 생각이 어떻게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에게 어떠한 문화공간을 남겨 주길 바라고 있는가? 반세기가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을 튼튼한 정신적 토대를 찾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일 텐데,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최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