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화성 아래 자리 잡은 동네 행궁동은 수원 도심 한복판에 자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 오래됐다. 40~50년 된 집들이 낮은 담장과 이어져 옹기종기 붙어 있고, 미로 같은 골목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과거의 영화를 간직한 오래된 동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수원에서 제일가는 부촌이자 번화가였던 행궁동. 이곳은 화성 밖으로 택지개발이 진행되면서 도심공동화 현상이 일어났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쳤고, 상가는 몇 년째 ‘임대 중’을 붙이고 있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난 곳에는 행궁동 토박이 어르신들만이 살고 있다. 도심 한복판 초등학교 중 유일하게 6학급만이 있는 미니 초등학교가 있는 동네가 바로 행궁동이다.

 

겉보기에 마을은 쇠락하고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오래된 세월이 품은 놀라운 이야기가 한가득이다. 어르신들의 삶은 말 그대로 우리네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어 낸 날것에 가까운 생생한 기록이다. 행궁동의 건물과 길 또한 오래되기는 마찬가지다. 푸른 곰팡이가 버짐처럼 피어나는 건물마다 어김없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마치 70년대 흑백영화 속 시간이 멈춘 듯한 이곳의 이야기를 모으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야기 보따리를 구비구비 풀어내며

 

그들은 바로 수원시 청소년들과 지역문화단체 ‘설낭’. 단어 그대로 ‘이야기 주머니’라는 뜻의 설낭은 2010년부터 화성 아래 동네의 오래된 이야기들을 모아 오고 있다. 화성 성곽투어 이외에도 지역이 가진 다채로운 이야기를 발굴해 문화 콘텐츠로 만들기 위해서다.

 

‘설낭’의 김형아 대표는 “한 시대를 살아낸 어르신들의 삶 자체가 우리들의 소중한 역사”라며 청소년들이 어르신과 만나 옛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 이상의 어떤 대물림, 전수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한다. 또한 세대 간의 소통과 연대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설낭’의 이야기 채집에 참여하는 청소년은 약 10여 명. 이들은 ‘맨발’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지고 행궁동을 누비며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한다. 거기에 김형아 대표를 비롯한 4명의 멘토들이 청소년들의 채록을 돕고 있다.

 

 

 

지난 5월부터 시작한 청소년 구술 채록 작업. 오늘은 3명의 청소년들이 올해 여든 둘인 이영자 할머니로부터 한국전쟁 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세상에도… 그런 세상이. 사람들을 굴비 엮듯 묶어서 광교산으로 데불고 가 총으로 싹 쏴 버렸어. 그래서 이 근처 과부촌 여자들은 남편 제삿날이 모두 한날 한시였어. 과부들은 한 동네에 모여 살면서 재봉틀로 츄리닝을 만들어 팔았지. 육이오 때문에 사람만 죽었나. 화성하고 장안문도 다 망가졌었어.”

 

청소년들은 할머니의 이야기를 녹음하고 중요한 부분은 필기하면서 진지하게 경청했다. 연세에 비해 정정한 기억력을 자랑하는 할머니는 손자뻘인 청소년들 앞에서 침착하게 옛이야기를 풀어 놓으셨다. “어떻게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믿을 수가 없어요.” 한승민 학생이 고개를 내젓자 이영자 할머니는 “내가 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더 힘든 일 겪은 집도 부지기수야. 그나마 우리 집은 큰 탈이 없었지.” 역사학도를 꿈꾸는 주순영 학생은 “이런 이야기는 역사책에 나오지 않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멘토 최화정 씨가 “그래서 구술과 기록이 의미 있는 거야.”라고 말한다.

 

기록을 남기는 손길에 정성이

 

청소년들은 어르신들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미리 행궁동의 옛 모습을 공부하고, 지도와 역사책 등을 통해 지명과 전설을 숙지하는 등 많은 준비를 한다. 하지만 70여 년 이상의 세대차이가 있다 보니 의사소통에서부터 어려운 점이 많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용하는 일본식 표현이나 옛날 입말을 못 알아들어 “네? 네? 그게 뭐에요?” 되묻기 일쑤.

 

하지만 사라져 가는 표현들조차 이들에겐 소중한 기록이다. 더불어 오래된 동네의 방언을 기록하는 가치 있는 작업이기도 하다. “쓰는 단어도 다르고 저희가 배운 역사와도 다른 점이 많지만,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살아 오신 세월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과 내용이라서 귀담아 들으려고 해요.” 한승민 학생의 이야기다. 처음 인터뷰에 나설 때 쑥스러워 자꾸 피하던 어르신들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해 답답해 하던 청소년들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어느새 이야기 채록 시간을 기다리고, 이 작업의 가치를 공유하는 관계가 됐다.

 

 

이렇게 모은 행궁동 이야기는 앞으로 서적 및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질 예정이다. 또한 오는 10월에는 행궁동 어르신들의 생애 구술축제를 준비하고 있다. 청소년들은 앞으로 또 다른 동네의 오래된 이야기 채집에 도전하고자 한다. ‘설낭’은 이와 같은 청소년 구술 채록 작업을 더 많은 지역으로 펼쳐 나갈 계획을 가지고 있으며, 1년에 한 권씩 지역의 이야기를 담은 채록집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청소년들이 기록하는 오래된 미래, 민초들의 역사는 이렇게 제 빛을 찾아 가고 있었다.

 

글.사진_ 노영란 경기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