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년 남짓한 기간 동안 arte365에 ‘정진홍의 컬처 인사이트’라는 코너명을 갖고 모두 아홉번에 걸쳐 글을 올렸다. 이제 끝으로 문화예술교육에 관한 몇 가지 제언을 전하면서 이 코너에서의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1. 애써 가르치려들지 마라
문화예술교육이라고 하면서 너무 가르치려 들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기고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사실 문화예술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기 보다는 문화적 향취와 예술적 체험을 경험할 수 있는 여건을 열어주고, 그런 가운데 느낌과 공감이 자연스레 일도록 돕는 게 정석이다. 그러니 애써 가르치려 들지 마라. 음악이든 미술이든 그 무엇이든 그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폭넓게 열어줘라. 문화예술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 들면 엇박자가 나기 십상이다. 문화예술교육은 틀에 가두고 코스에 맞춰서 가르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그 안에서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예술교육의 제1번임을 잊지 말자.
2. 느낌을 주고 공감을 자아내라
‘애써 가르치지 않는데 어떻게 문화예술적 지평을 터득해간다는 말인가?’하고 반문할지 모른다. 거기에 이렇게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예술적 지평을 열어가고 이를 터득해 가는 바탕은 철저하게 ‘공감’이다. 스스로 느껴서 공감하는 게 없다면 아무리 많은 지식과 투자가 있어도 소용없다. 문화예술은 느낌과 공감을 통해 자기증식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써 친절하게 혹은 시시콜콜하게 설명해주지 마라. 특히 요점정리 식으로, 혹은 무슨 단답형 문제풀이 식으로 주입하려 들 필요도 없다. 문화예술교육은 느낌을 주고 공감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우선이다. 먼저 느끼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면서 억지로 기능적인 배움만 있으면 곧 싫증 내고, 이내 조금만 바빠져도(요즘 아이들은 너무 바쁘지 않은가??) 내쳐버리게 된다. 그러니 애써 뭔가를 설명하려 들기 보다는 느낌을 주고 공감을 자아내라. 느끼고 공감하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화예술교육이다.
3. 내버려둬라(Let it be!)
느끼고 공감하는 것은 정해진 방도가 따로 없다. 그러한 힘을 길러주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닐까 싶다. 너무 무책임한 방임이 아니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갈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것이다. 또 막연한 방임이나 방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눈과 귀로 자기만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본능적인 힘을 키워주는 과정인 것이다. 이런저런 간섭을 배재한 채 온전히 내버려둘 때 비로소 스스로 문화예술적 향취를 맛보고 즐길 수 있는 내면적인 자양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문화예술교육은 꽉 채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여백과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게 정말 중요하다. 그런 여백과 여지에 자신만의 의문, 자신만의 상상을 맘껏 덧칠하는 가운데 진정한 창의와 창조 그리고 창발의 싹이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4. 해봐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문화예술교육은 단순한 지식 쌓기나 스펙 쌓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을 넘어선 공감적 행위요, 단순한 경험을 넘어선 일상 속의 도전과 응전이다. 그래서 문화예술교육은 단지 관람해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백날 “글은 이렇게 쓰는 거다, 악기는 이렇게 생긴 거다, 이 사람의 그림은 이게 특징이다”라고 말해주면 뭣하겠는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지식이 곧 문화예술을 이해하는 첩경은 아니다. 정작 글은 써봐야 하는 것이고 악기는 다뤄봐야 하는 것이며 그림은 그려봐야 그 맛을 알지 않겠나. 그러니 해봐야 한다. 맞고 틀리고가 없다. 잘하고 못하고도 없다. 그런 기능적, 산술적 잣대로 애꿎게 점수 매기지 말고 그냥 하게 놔둬야 한다. 뭔가 해보는 데서 재능도 발견되고 그 자신의 미래도 열린다.
5. 렛슨 시스템을 넘어 하모니를 추구하라
우리나라는 어느새 클래식 음악의 영재들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1,2,3 등을 휩쓰는 나라가 됐다. 특히 현악기 부문에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는 갖고 있지 못하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말해 렛슨 시스템 때문이다. 우리는 개개인이 렛슨 시스템 속에서 키워져 콩쿠르에서는 우승할지언정 그들을 모아놓고 하모니를 창출하라고 하면 서로 엇박자 내기 일쑤다. 자기 목소리, 자기 악기 소리만 잘 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모니를 맞추는 것 보다 혼자 잘하는 것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는 우리와 달리 하모니에서 출발했다. 길거리의 아이들에게 악기를 쥐어주고 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스스로 하모니를 터득해가고 그런 그들에게 베를린필 단원과 같은 세계적인 기량의 연주자들이 자원봉사 차원에서 마스터클래스를 열어 그들의 미래를 열어줬다. 그것은 단지 전설이 아니다. 현실이다. 그렇게 자라난 사람 가운데 구스타프 두다멜 같은 이도 있다. 그는 LA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3월에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펼친다. 그러니 더 이상 렛슨 시스템에 갇히지 말고 한 차원 높은 하모니의 연대로 넓게 펼쳐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6. 안목을 키우고 상상력을 더해라
데생만으로 미술대학을 진학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데생의 기능보다 사물을 다르게 보는 눈, 그렇게 본 것을 보다 융합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내러티브의 힘과 상상력 등이 더 중요한 시대다. 문화예술교육도 그에 상응해서 바뀌어야 한다. 안목을 키우려면 일단 많이 봐야 한다. 양적인 축적이 결국엔 질적인 전환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단지 관념의 증식이 아니다. 진정한 상상력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마치 불가항력의 범주에 있다고 치부해버리는 것에 도전하는 구체적 행위다. 그래서 진정한 상상력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과 통념을 깰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안 되는 일이야!” 라고 단정하는 순간 상상력은 고갈되고 질식한다. 문화예술교육은 그런 의미에서 ‘아웃오브박스(out of box)’ 즉 틀을 깨고 통념의 상자 밖으로 나오는 일이다. 고정된 생각보다 더 큰 문화예술에 대한 적은 없다.
7. 장르별 편식없이 골고루 먹여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편식이 문제이듯이 문화예술교육도 편식을 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보다 균형 잡힌 식단이 필요하다. 문화예술교육이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장르별 교육과 장르별로 가로막힌 벽이다. 그림 좋아한다고 그림만 그리고, 음악좋아한다고 음악만 듣게 하면 안 된다. 음악도 접하고 그림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발레 한다고 춤만 추면 안 된다. 진정한 발레리나가 되려면 음악에 대한 이해도, 그림에 대한 느낌도 더 나아가 인문학적 바탕도 갖추어야 한다. 그것들을 다만 몸의 질서로 표현하는 것이 발레일 뿐, 발레가 동작의 기능적 맞춤구성만은 아닌 것이다. 그림도 볼 줄 알고, 음악도 들을 줄 알며, 연극이나 뮤지컬 혹은 발레나 오페라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다 균형 잡힌 문화예술적 시야가 확보되고 그 자양이 삶에 축적될 수 있는 것이다.
8. 문화예술교육이 미래투자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는데 문화예술교육의 측면에서도 맞는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접하는 문화예술이 있으면 나이 들어 삶이 퍼석해지지 않는다. 사실 어려서부터 습관이 들지 않으면 나이 들어서 미술관이나 박물관가기가 쉽지 않다. 클래식 음악회도 청소년기에 접하면 거리감이 덜한데, 그렇지 않으면 자칫 자기와는 먼 동네 이야기처럼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문화예술교육은 어려서부터 진입장벽 없이 실시 되어야 한다. 어려서 문화예술교육의 세례를 받지 못하면 요즘 같은 고령화 사회에는 필연코 나이 들어서 후회한다. 노년의 삶에서도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의 공감 기회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문화예술교육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미래 투자인 셈이다. 문화예술교육이야말로 곧 다가올 미래 삶의 질을 좌우한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삶이 풍요로워 지고 또 다른 차원의 미래가 열리기 때문이다.
9. 우리 모두의 르네상스를 준비하라
문화예술교육과 인문학은 함께 가야 한다. 인문학 따로, 문화예술교육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둘이 아니라(不二) 하나다. 문화예술교육의 최고목표는 ‘행복의 진화, 희망의 창조’이다. 나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 그리고 공동체의 행복이 서로 충돌하지 않으면서 공생하며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희망이다. 그래서 ‘행복의 진화, 희망의 창조’인 셈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문화예술적 공감대요, 그것에 다가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진정한 문화예술교육인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이 우리 모두에게 구체적인 일상 속에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행복과 희망을 만드는 연결망이 된다면 우리의 삶은 저마다의 처지에서 말 그대로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르네상스’를 열게 될 것이다. 문화예술교육은 바로 그런 르네상스를 준비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나!
- 정진홍 _ 글
- 컨텐츠 크리에이터, GIST다산특훈교수, 한국문화기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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