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클라리넷에서 그윽한 선율이 흘러 나왔다. 중후한 음색, 영혼을 어루만지는 듯한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곡조가 짙푸른 가을 하늘로 퍼졌다. 수줍은 듯 마지막 음표가 사라지자 리드를 입에서 뗀 조순환 씨가 물었다. “듣기가 괜찮습니까?” 잘 들었다 대답하니 그의 얼굴에 기쁜 홍조가 서렸다.
클라리넷과의 첫 만남
강원도 강릉시에서 십오 대를 살아 온 강릉 토박이 조순환 씨. 올해 일흔 여섯의 조 씨는 보험설계사인 동시에 강릉의 명물 ‘그린실버악단’의 클라리넷 주자로 활동하고 있다. “수자폰부터 클라리넷까지 관악부가 모두 갖춰진 아마추어 브라스 밴드는 전국에 많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노인들로 이루어진 밴드라면 우리 그린실버악단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네요.” 연주를 통해 어르신들의 건강과 활력을 찾고 노익장을 과시하는 그린실버악단.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더러 여름휴가철 강릉을 찾는 전국의 관광객들에게 ‘명물’로 인정받아 온 이 악단의 모든 단원들에게 음악이란 삶의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조순환 씨에게 있어 음악은 다른 누구에게보다 훨씬 더 특별한 대상이다. 마치 골이 깊은 산길처럼 구비구비 굽이쳐 온 인생길, 음악은 그에게 가장 소중한 길동무이자 삶의 위안이었기 때문이다.
“이십대 초반,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가 됐어요. 사범학교에서 풍금 연주하는 법, 악보 보고 가르치는 법을 배웠지요. 당시 또래들에 비하면 음악을 제대로 배운 셈이에요. 그러다 6.25가 일어났고, 군대에 입대하여 군악대 생활을 하게 됐죠. 군악대에서 클라리넷과 처음 만나게 됐고요.” 모든 것이 파괴된 전쟁터에서 음악은 사람들의 영혼을 어루만졌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의 시름을 달래 주는 고요한 관악기의 음색, 조순환 씨는 처음으로 음악의 힘을 느꼈다고 했다.
삶의 격랑 속을 헤쳐나가다
교사로 10여 년 가량 재직한 후 조순환 씨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조 씨는 “사업을 한 번 해 보고 싶었어요. 형님께서 사업을 하시는데 교사 생활보다 훨씬 역동적으로 보이더군요. 가족에게 경제적인 여유도 주고 싶었고, 다른 직업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서 전직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그때의 심경을 밝힌다.
그가 처음 시작한 사업은 운수업. 동해안의 해산물을 전국 각지로 운송하는 일이었다. 트럭 한 대가 집 한 채 가격보다 비싸던 시절, 그는 트럭 여러 대를 두고 사업을 크게 했다. 오랜 세월 강릉 토박이로 살아 오며 쌓은 신망도 사업에 큰 밑거름이 됐다. 하루 네다섯 시간밖에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바쁜 나날이었지만 일하고 돈 버는 재미에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뒤이어 농기계 대리점 사업과 사료 대리점 사업도 일구었다. ‘조 사장’으로 살아 온 30여 년의 세월 속 음악은 어느새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음악이 다 무업니까. 클라리넷은 커녕 풍금이나 피아노조차 만지지 않은 채 삼십 년을 살았어요. 요새 젊은이들도 그렇겠지만, 우리 젊을 때도 일들을 참 열심히 했어요. 저도 그렇고요. 열심히 일하는 만큼 보람이 돌아오니 그것이 인생의 과정이자 목표였죠.”
우리나라가 전쟁의 상흔을 딛고 중진국으로 향하던 1970년대에서 80년대. 조순환 씨의 삶도 근대화의 격동을 고스란히 겪었다. 다섯 아이를 낳아 키우며 아버지로, 그리고 경영자로 살아온 시간. 예술은 멀었지만 삶은 가까웠다. 어느덧 자녀도 모두 성장해 어엿한 사회인이 되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 지역 유지로 안정적 노후를 계획하던 무렵이었다. “다시 입에 담기도 힘드네요. 그때 이야기를 하자니…” 조순환 씨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멀리 시선을 던진다.
절망에서 일어설 수 있었던 힘
1990년대 후반 IMF 구제금융사태의 여파는 지역 경제를 붕괴시켰을 뿐더러 축산농가의 줄도산을 불러왔다. 이 때문에 조순환 씨의 사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방법이 없더군요. 꼼짝없이 모든 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십 년을 일궈 온 사업이었는데 스러지는 건 한순간이었어요. 빚잔치를 하고 나니 사료 한 포대 남지 않았습니다.”
65세에 찾아온 실패는 깊고도 어두웠다. 다시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는 날들이었다. 아내와 자녀들은 그가 삶을 포기할까봐 걱정에 빠졌다. 조순환 씨는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가족들에게 이렇게 마음 고생을 시키다니, 그냥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요. 나만 없어지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절망 속에 잠겨 있던 조순환 씨를 보다 못한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나가서 뭐라도 배우고 바깥 바람도 좀 쐬자’고 이끌었다. 그렇게 이끌려 간 강릉문화원에서 서예반 활동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린실버악단의 단장이 그를 찾았다. “조 선생, 젊으실 적 악기 연주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악단에 클라리넷 주자가 필요합니다. 함께하시면 어떨까요.”
악기를 놓은 지 사십 년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연주하지 않아서 자신감도 없었다. 일단 한 번 해 보자며 들어 간 연습실. 악단에서 제공한 클라리넷을 들었다. 꽃같이 젊던 이십 대 청년에서 삶의 질곡을 건너 온 육십 대 노인이 되었지만 음악은 그대로였다. 떨리는 손길로 숨결을 내뿜고, 이어 마음을 감싸는 클라리넷의 음률이 퍼져나올 때 조순환 씨의 눈가에 눈물이 슬며시 어리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알려 준 음악
조순환 씨는 악단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았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연습을 하고, 그린실버악단을 부르는 곳 어디나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 인생의 목표를 다시 세우게 됐습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일하겠다는 것, 그리고 제가 하는 음악으로 세상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것이 지금 제 목표에요. 저희 악단은 주로 시설에 있는 노인들이나 장애인들을 위해 공연을 많이 합니다. 사람이 그립고 즐거움이 없는 그분들 앞에서 생음악을 연주하면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름철 강릉 해수욕장 퍼레이드에서나 지역 문화축제 때 공연을 하는데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저희의 연주에 맞춰 어깨춤을 추고 따라 부르는 것을 보면 음악이 가진 위대한 힘을 새삼 느껴요. 제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었다 해도 제 돈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 주지는 못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연주하는 음악으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을 흥겹게 해 줄 수 있잖아요. 그게 참 대단한 겁니다.” 조순환 씨는 클라리넷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예술의 가치를 깨달았다.
“음악은 힘든 순간마다 저를 구원했어요. 젊은 시절 전쟁터에 나섰던 저를 위로해 주었지요. 그리고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실패의 순간, 음악 덕분에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음악은 저만 바라보고 살아 온 인생에 다른 사람과 함께 더불어 기뻐할 수 있는 방법이 되어 주었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었지요.” 조순환 씨의 회고에는 예술 안에서 오롯한 기쁨을 찾은 한 사람의 순정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이 사람, 행복하여라
요즘 조 씨는 지역아동센터와 유치원에서 오카리나를 가르친다. 사범학교에서 배운 음악교육이론에 클라리넷으로 다진 실전 경력이 어우러져 그는 인기 최고의 ‘할아버지 쌤’이다. “병아리처럼 고물거리는 아이들에게 처음 악기를 쥐어 주면 바람 빠지는 소음만 내요. 하지만 한 달 가량 지나면 소리 맞춰 합주를 하고 부모님 앞에서 공연을 선보이죠. 그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고 대견한지 몰라요.” 꼬마 학생들을 자랑하는 그의 얼굴에 대견함이 가득하다.
음악과 함께하는 삶이 행복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조순환 씨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는 제가 행복하다는 말을 다시 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건 없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지금은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 이 일로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함께 통할 수 있는 것… 그럴 수 있기에 행복합니다.” 일흔 여섯의 클라리넷 연주자 조순환 씨는 악기를 어루만지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글.사진_박세라 자료사진_조순환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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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지날수록 추억을 담은 더욱 깊은 음악을 연주하시는 것 같네요^^ 너무 멋지게 사시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