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한 사람의 눈이 카메라이고, 그의 몸속 어딘가에 그가 보고 느낀 것을 녹화하는 테이프가 들어 있다면? 한 사람의 일평생을 통해 일어나는 모든 희로애락의 순간이 생생한 영화처럼 담길 것이다. 여기, 자신과 세상의 이야기를 카메라로 기록하는 한 여인이 있다. 비록 그녀의 눈은 렌즈가 아니지만, 그녀에겐 무엇보다 소중한 도구, 카메라가 있다.
기계치’ 엄마의 새로운 도전
“아이들 키우면서도 짬짬이 무언가 배우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매듭공예를 배우러 서울까지 다닌 적도 있었지요. 아이들이 모두 성장한 50대 초반 무렵,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어요. 평소 짬을 내어 배울 수 있는 것 말고, 조금 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을 배우자는 생각이 들었지요.” 조정희 감독(66세)은 처음 영화와 만난 14년 전을 회상했다. ‘기계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무지했지만, 광명시 평생학습원의 ‘홈비디오 촬영과정’이 그녀의 시선을 이끌었다. 평범한 것은 배우고 싶지 않았다고. 조금 어렵게 느껴져도 재미있는 것을 배우고 싶었단다.
“홈비디오 촬영을 배우면 나중에 손자가 생겼을 때 재미난 모습을 담을 수도 있고, 가족끼리 볼 수 있는 좋은 추억이 남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처음 잡아보는 캠코더에 가슴이 두근두근, 이렇게 찍으면 어떤 장면이 담길까 설레는 마음으로 홈비디오 촬영을 배웠다. “촬영하다 보니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었어요. 촬영한 후 편집도 해야 하니까 자연스레 컴퓨터 사용도 배우게 되고, 비디오플레이어와 편집기를 다루는 것도 배웠습니다. 물론 낯설고 두려운 마음도 있었지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용기를 냈습니다.” 조정희 감독은 “기계치 엄마의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말하며 웃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영화처럼
조정희 감독은 광명시 평생학습원 ‘해오름 영상동아리’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해오름 영상동아리는 40대부터 6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의 주부들이 직접 6mm 카메라를 들고 VJ로 활동하는 아마추어 영상촬영단체. 이들은 해마다 영상제를 개최하는 것은 물론 지역방송에 현장취재 영상물을 투고하고, 다양한 민간영화제 출품 및 수상 기록을 여럿 가지고 있다. 이들의 신분은 아마추어지만 열정과 실력은 프로이다.
해오름 영상동아리 창립멤버인 조정희 감독은 VJ로 활동하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자식들 다 크고 나이 들면 주부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도 있는데요. 저는 카메라를 통해 그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어요. 섭외부터 시나리오, 촬영, 편집까지 모두 저 혼자 하다 보니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고, 이를 통해 성격이 저절로 쾌활하고 외향적이 되더군요. 원래 조용한 성격이었는데 VJ를 통해 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한 거죠. 그리고 생활 속 작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는 섬세함도 생겼습니다. 어떤 멋진 장면을 만났을 때, 예전 같으면 마음으로만 ‘아, 참 좋다.’라고 느꼈겠지만, 지금은 ‘카메라 어디 있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것을 기록하고 싶다는 열정이 생기거든요. 또한, 항상 배우는 자세가 된다는 점도 좋습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한 번 들어서는 자꾸 잊어버리거든요. 그럴 때마다 묻고, 배우고, 모르면 연습해 보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태도가 생겼지요.”
조정희 감독에게 ‘주로 촬영하는 대상, 혹은 주제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모든 것’. “삶의 모든 순간, 저를 둘러싼 일상의 모든 것이 제게 주제가 되고 촬영 대상이 되지요. 저는 저의 카메라가 제 인생을 계속하여 찍어내기를 바랍니다.” 큰며느리가 첫 번째 손자를 출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방보다 먼저 카메라를 챙기고 뛰어 갔다는 조정희 감독. 각기 부산과 천안에 살고 있는 세 명의 손자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13년 동안 계속해서 아이들의 삶을 기록해 오고 있는 그녀다. “나중에 이 녀석들이 어른이 되면 깜짝 선물을 하고 싶네요. ‘너희들의 평생이 여기 담겨 있다’고 테이프를 주고 싶어요. 그러려면 손자들 클 때까지 건강하게 계속 촬영을 할 수 있어야겠지요. 하하~” 조정희 감독에게 촬영은 이렇듯 삶의 목표의식을 부여해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집밥’처럼 담백하고 소중한 느낌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의미를 찾는 그녀의 작품은 우리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이번 제4회 서울노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조정희 감독의 작품 <내 작은 농장> 또한 ‘평범한 삶’이 가진 작지만 큰 의미를 전하는 작품이다. 조정희 감독 본인이 내레이션을 하고, 자신과 남편이 함께 출연한 이 작품은 조 감독 자택 옥상 텃밭의 모습을 담아냈다. 뇌졸중으로 몸이 불편한 남편과 함께 옥상 텃밭을 정성껏 가꾸는 그녀. 작물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삶의 지혜를 발견하고 손수 일구는 건강한 삶의 가치를 체험하는 일상의 감동이 <내 작은 농장> 안에 그대로 담겨 있다.
“큰 상을 받아서 기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있어요. 그냥 우리 부부 사는 모습을 촬영했을 뿐인데 많은 분들이 재미있다고 해 주시고, 감동을 느꼈다고 하셔서 고마웠지요.” 조정희 감독의 얼굴이 발그레 물든다. “몸이 편치 않은 남편의 모습, 자그마한 우리집 모습, 멋진 성우가 아닌 저의 목소리로 펼쳐지는 내레이션까지, 사실 너무 평범한 것이라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중에 돌아 보면 ‘그땐 그랬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 촬영했죠.” 가장 물리지 않고, 몸에도 좋은 담백한 ‘집밥’의 맛처럼, 조정희 감독의 작품은 ‘엄마가 만들어 주신 집밥’의 느낌을 전해 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카메라를 들어야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촬영할 거에요. 우리 손자들 장가가서 아이 낳는 모습까지 찍어 주었으면 싶고요. 만약 기회가 닿는다면 극영화에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습니다.” 조정희 감독은 처음 카메라를 들었던 그때 그 마음, 초심 그대로 변치 않는 VJ가 되겠다고 말한다. 카메라를 통해 자신은 물론 가족과 지인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전하는 사람, 조정희 감독의 멋진 작품 활동을 기대해 본다.
글.사진_박세라 자료사진제공_조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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